41화.
뜨거웠던 태양은 어느새 지평선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캔버스에 짙은 보랏빛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하늘엔 점묘화처럼 콕콕 찍어놓은 별들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하지만 그를 반기지 않는 자가 있었으니.
“하아….”
엘레나는 고민에 가득 차 있다.
뱃놀이하러 데리러 오겠다는 데카루스의 얼굴이 꼴도 보기 싫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 턱을 괴고 있는 그녀는 힘이 쭉 빠져 매가리가 없어 보였다.
“왜 하필 데카루슨데.”
그가 아닌 제인이었다면 좋다고 따라 나갔을 텐데.
마음속에 딱딱한 돌덩어리가 들이찬 것 같게 너무 답답했다.
“옷 입어야지.”
잠옷 차림으로 갈 순 없었기에 아까 시녀들이 준비해 준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얇은 원피스와 카디건은 초여름 날씨에 딱 맞았다.
“잘 맞네.”
달빛을 빌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아하니 나름 봐 줄 만했다.
차르르 흘러내리는 남색 원피스는 걸을 때마다 슬립처럼 몸매가 살짝 드러났다.
똑똑-
정적을 깨는 소리에 순간 온몸이 굳었다.
“엘레나.”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듣자니 한숨이 푹 나왔다. 꼭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방문한 것만 같았다.
“기분 좋아 보이네.”
그가 문에 어깨를 살짝 기대며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 눈이 삐었나 보네.”
엘레나는 아무도 들을 수 없을 만큼 낮게 읊조렸다.
그러자 그는 피식, 하고 웃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자로 잰 듯 일정했다.
“뭐, 뭐야.”
그는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빗장처럼 허리를 감싼 팔이 그녀를 단단히 옥죄었다. 얇은 옷을 사이에 두고 맞닿은 몸에서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내 눈이 삐었을 리가.”
“좋은 말로 할 때 이거 놔라.”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그는 툴툴대는 그녀가 귀여운 듯 삐죽 튀어나온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자 엘레나는 손을 뻗어 그를 밀쳐냈다.
“됐어.”
반동으로 약간 휘청거리던 그녀는 곧바로 중심을 잡았다.
그러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얄궂게 웃었다.
“가시지요, 아가씨.”
그는 에스코트하려는 듯 왼쪽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예를 차리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필요 없어.”
그녀는 데카루스를 제치고 먼저 길을 나섰다.
주인 없는 손은 허공을 부유하는 온기와 맞닿았다. 그녀가 떠난 자리엔 차가운 공기만 덜렁 남아있었다.
* * *
시원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에 굽이치는 분홍빛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억지로 나온 산책이었지만 오랜만에 길을 걸으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와 같이 걷기 싫었던 엘레나는 보폭을 넓혀 빠르게 걸었다.
“왜 자꾸 쫓아오는 거야.”
“쫓아오는 게 아니라 당신이 빨리 가는 거겠지.”
길가에 놓인 조그마한 등은 어두운 밤을 은은하게 밝혀주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는 그림자는 조용히 그 뒤를 밟았다.
“천천히.”
엘레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제 갈 길을 갔다.
그와 최소 5미터 정도는 떨어져 걸으려면 발걸음을 빨리해야 했다.
하지만 속도를 내어 빨리 걸어도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긴커녕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탁-
“강가라 위험해.”
부드럽게 맞닿은 손 사이로 온기가 스며들었다.
“내가 알아서 해.”
엘레나는 마주 잡은 손을 뿌리치며 그를 앞질러 걸었다.
뒤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괘념치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길가를 따라 이어진 등은 호숫가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은은한 노란 불빛은 물에 반사되어 마치 별 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눈을 뗄 수 없는 풍경에 발걸음은 점차 느려졌다. 어느새 강가 앞에 멈춘 그녀는 양 손가락을 들어 직사각형을 만들었다.
“카메라가 있음 찍어두었을 텐데.”
“카메라?”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데카루스는 무슨 뜻이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몰라도 돼.”
엘레나는 시선을 강가에 둔 채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당신이 가끔씩 어색할 때가 있어. 꼭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다른 세계에서 온 게 맞다.
그것도 여기와는 완전히 다른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하지만 당신이 알 이유도, 알 턱도 없지.
“그래.”
그녀는 심술 난 고양이처럼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바로 앞에 있는 기다란 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타면 위험해.”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몸을 잡아끌었다. 배를 감싸는 팔이 단단하게 느껴졌다.
순간 잡아끄는 탓에 작은 몸이 휘청거렸다. 볼에 맞닿은 머리칼에서 잔잔한 블랙베리 향이 풍겨왔다.
“아….”
그가 살짝 힘을 주자 땅을 짚던 발이 공중에 떴다.
마치 기다랗게 늘어진 고양이를 운반하는 것처럼 배에 실렸다.
아마도 배의 가운데를 밟아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가장자리를 밟았나 보다.
“그대로 기다려.”
그녀의 체중이 실리자 배가 조금 출렁였다.
아마 멋대로 움직이면 위험하니 기다리라는 뜻이겠지.
엘레나는 그가 말한 대로 가만히 멈춰 서 배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베니스의 곤돌라처럼 길고 작을 줄 알았는데 이 배는 사람이 많이 타도 될 정도로 꽤 컸다.
바람에 흩날리는 천은 마치 돛을 연상케 했고 배 가장자리를 환히 밝혀주는 노란 등은 은은한 분위기를 더욱 고풍스럽게 만들어주었다.
“가지.”
배 끄트머리에 탄 사공은 고개를 끄덕이곤 제 몸만 한 노를 저었다.
밤바람은 살랑살랑 불어 물결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빛을 품은 물이 촛불을 켜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예쁘다….”
그녀의 말에 데카루스도 조용히 호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좋아할 줄 알았어.”
“…….”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뱃놀이가 시작되었다.
반딧불이는 열심히 제 몸을 빛내 호숫가에 별을 띄웠고,
바람에 흩날리는 버들의 노랫소리가 개구리의 울음소리와 합주를 이루었다.
“처음 배를 탔을 때가 생각나.”
호수를 바라보던 데카루스는 추억에 젖은 듯 입을 열었다.
“낮이었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웠어.”
“아, 그래.”
엘레나는 한 귀로 흘리며 시원찮게 반응했다.
이미 호숫가에 빼앗겨 버린 시선에 그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또 당신과의 뱃놀이네….”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반짝이는 물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아주 어릴 적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화창한 봄날, 눈부신 햇살이 눈꺼풀을 간지럽히던 어느 날.
호숫가로 뱃놀이를 하러 갔다.
어린 황녀가 그를 잡고 하도 졸라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섰다.
작은 그녀를 데리고 타기엔 매우 위험했지만 고집불통 황녀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황태녀 전하.”
저보다 조그만 꼬마가 낑낑 배에 타려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데카루스는 그녀의 허리를 폭삭 잡고 들어 배 가운데에 놓았다.
“거기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전하.”
“응.”
소녀는 괜스레 참견하는 그에 기분이 나빴는지 새침하게 대답했다.
꼬마이긴 했지만 본인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간신히 그녀를 태운 데카루스는 한숨 돌리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힘들어?”
“아, 아닙니다.”
“말을 더듬는데?”
“아닙니다….”
짓궂게 그를 놀리던 황녀는 이내 조막만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곤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 데카루스. 널 놀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은 잘 영근 사과처럼 싱그러웠다.
그렇게 호수 가운데에 도착했을 때 황녀는 손을 들어 사공을 멈춰 세웠다.
살짝 턱을 괸 그녀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부드러운 피부를 훑어 내렸다.
간지러운 손길에 데카루스는 잠시 움찔했다.
“카루스.”
“예, 황녀님.”
“우리 결혼할까?”
“…예?”
순간 데카루스의 머리는 불이 난 것처럼 바쁘게 회전했다.
갑자기 결혼하자고 하는 꼬마 황녀의 말에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싫어?”
그의 당황한 얼굴을 본 황녀는 꽤나 기분이 나쁜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럼 좋다는 거네?”
어린 데카루스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막무가내인 그녀의 표정과 말투는 꼭 애어른 같았다.
“네 얼굴 곧 터질 것 같아. 부끄럽니?”
“아닙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눈을 꾹 감았다.
그러자 황녀는 피식 웃더니 그의 검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카루스는 검은 강아지 같아.”
“놀리는 건 그쯤이면 됐습니다, 전하.”
“그럴수록 더 놀리고 싶은걸.”
“전하…!”
* * *
그의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잔잔하게 흐르는 호숫물을 보며 침묵하는 그는 깊게 사색에 잠긴 듯했다.
뭐, 잔망스러운 입이 나불대지 않아서 좋긴 했지만.
“추워….”
점점 깊어지는 밤은 차가운 추위를 몰고 왔다.
아무리 5월 말이라지만 여전히 밤은 쌀쌀했다.
또 호숫가라 그런지 더욱 바람이 찬 것 같았다.
“아….”
아무 생각 없이 호수를 바라보던 그녀의 어깨엔 따듯한 무언가가 툭 하고 걸쳐졌다.
“뭐야…?”
제 몸보다 큰, 빨간색과 남색이 잘 어우러진 체크무늬의 담요였다.
이불처럼 둘러도 될 만큼 큰 담요 덕에 차가웠던 몸이 어느 정도 따듯해지는 것 같았다.
한데 마법을 부린 걸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추위 잘 타잖아.”
그의 말이 맞았다.
현생에서도 전생에서도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라 겨울이 되면 꽤 고생하곤 했지.
하지만 그를 만난 이후로 추워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안 것일까.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에는 노란 등이 비쳐 별처럼 반짝였다.
계속 눈을 마주치기엔 눈싸움을 하는 것 같아 괜스레 민망해졌다.
“고맙다는 말 같은 거 안 해.”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새침하게 말했다. 입에 바람을 넣어 볼록 튀어나온 볼이 마냥 귀여웠다.
“그래.”
그는 입매를 올려 피식 웃곤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황녀였다면 어땠을 것 같아.”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잔잔하게 파도치는 물소리와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어디서 또 무슨 이상한 생각을 주워 온 건지.
어이없을 정도로 생뚱맞은 말에 다시금 그를 바라보았다.
“황녀였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지금? 그리고 당신도 이렇게 여유롭진 못할걸? 황족 은닉죄로 귀족 재판에 넘어갈 테니까.”
평소엔 똑똑해 보이던 그가 왜 이런 상황에서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황녀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감옥에 넣어버렸을 것이다.
지금은 을이니까 그냥 이러고 사는 거지.
“그래.”
여전히 뚫어져라 쳐다보는 데카루스 덕에 얼굴에 구멍이 날 것만 같았다.
그는 미동도 없이 그저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연유를 묻고 싶었지만 무덤덤한 그의 표정에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순간 흥미가 떨어져 버린 엘레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만 갈래.”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공이 노를 젓자 배는 물길을 따라 천천히 입구 쪽으로 향했다.
호숫가에 피어난 풀이 사근사근 소리를 내며 서로를 포개 누웠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더 이상 차갑지도 싸늘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