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초여름의 태양이 피부에 따갑게 내리쬔다.
이불을 푹 뒤집어써 보았지만 얄궂은 햇살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으음….”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그녀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침대를 뒹굴었다.
포근한 실크 이불이 몸을 따스하게 감싸주니 이것만큼 호화로운 생활은 없을 것이다.
“엘레나.”
그때 웬 재수 없는 목소리가 귓전에 퍼졌다.
한창 아침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것까지 방해하다니.
아주 몹쓸 놈이다.
엘레나는 못 들은 척 이불을 더욱 푹 뒤집어썼다.
“엘레나.”
그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엔 정말로 대답하라는 뜻이겠지.
“…….”
침묵으로 일관하자 그는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어제 누가 그렇게 사람을 막 대하랬나.
옛말 하나 틀린 게 없다.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된다.
“대답해야지.”
예전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그가 이렇게 말할 때가 가장 무섭다.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이랄까.
“왜.”
“그만 일어나지 그래.”
엘레나는 눈을 삐죽 뜨고 그를 세모눈으로 쳐다보았다.
자기가 뭔데 사람을 일어나라 마라 명령하는 걸까.
“무슨 상관이야.”
여태 화가 풀리지 않은 그녀는 마치 성난 병아리처럼 삐약거렸다.
데카루스는 그런 그녀가 귀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여워.”
그는 손가락을 뻗어 눈가에 거슬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만지지 마.”
탁-
엘레나는 기분 나쁜 듯 표정을 구기며 고개를 홱 돌렸다.
어쩔 수 없이 허공에 살짝 들린 그의 손은 갈 곳을 잃고 헤매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걸 준비했어.”
이제 와서 아부라도 떨겠다는 것인가.
자기도 어제 했던 짓이 미안하긴 한가 보다.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때 부드러운 이불 사이로 그의 팔이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품 안에 갇힌 엘레나는 당황한 듯 손과 발을 파닥거렸다.
“왜 이래.”
“밤에 뱃놀이에 가자.”
뱃놀이라면 저번에 제인과 함께 본 호수의 배를 말하는 걸까.
순간 혹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와 함께하고 싶진 않았다.
“싫어.”
“엘레나.”
“싫다고. 당신이랑 하는 건 다 싫어. 그리고 이 팔 치워.”
온몸을 버둥거리자 가슴 부근을 감싸던 팔이 더 억세게 조여왔다.
예민한 목에 닿은 날렵한 코가 천천히 그녀를 간질였다.
“하지 말라니까…!”
“당신이 그러겠다고 할 때까진 안 놔줘.”
또다시 시작된 그와의 싸움에 벌써부터 진이 빠진다.
가끔은 미친 걸 넘어서 그냥 어린애를 보는 것 같다.
“하… 벌써 10시가 넘었어. 당신 회의 안 가?”
“응. 안 가도 돼.”
“데카루…!”
입을 뗀 동시에 저절로 몸이 그에게로 이끌렸다.
덕분에 새하얀 얼굴을 마주 보게 된 엘레나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대답 듣기 전까지 못 가.”
마주 잡은 손등 위엔 그의 입술이 진하게 찍혔다.
나른한 눈빛 속에 숨겨진 여우가 꼭 사람을 홀리는 것 같았다.
“…….”
“대답.”
음란마귀가 낀 건가.
왜 오늘따라 그의 입술이 붉고 청초해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사이로 살짝 보이는 혀가 외설적이었다.
“해야지.”
그는 손가락을 뻗어 오뚝한 코를 한 번 톡 쳤다.
살짝 짓는 미소가 예쁘게 번졌다.
“싫어.”
아무리 그가 뱀처럼 유혹한다고 해도 대답은 여전히 ‘NO’였다. 뱃놀이 하나로 그렇게 쉽게 풀어주진 않을 거다.
“그럼 당신이랑 매일 같이 있을 수 있겠네.”
“뭐…?”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어 빠르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계속 대답을 안 하면 매일 일을 안 가겠다는 뜻인 건가, 지금?
“당신은 왜 항상 기회를 놓칠까.”
“…….”
“난 매번 당신에게 선택지를 주는데 말야.”
“허….”
이건 회유가 아닌 반 협박이다.
‘NO’가 아닌 ‘YES’ 버튼만 있는 게임.
처음부터 그는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장난해?”
“장난은 당신이 하잖아. 귀엽게.”
그는 가까이 다가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러니 내가 당신을 가만히 놔둘 수가 있겠어.”
“그만…!”
“늦게 오진 않을게. 기다리고 있어.”
데카루스는 부스스한 머리 위에 살짝 입을 맞추곤 그녀를 놓아주었다.
날쌘 다람쥐처럼 너른 품을 빠져나간 엘레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평생 안 와도 될 것 같은데.”
“엘레나.”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어린아이 같은 행동에 데카루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끼익-
언제 나갔는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그는 문소리만 남긴 채 떠났다.
이불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민 엘레나는 구시렁대며 다리를 내밀었다.
“뭐야, 언제 나갔어.”
식사를 잘하고 기다리라는 그의 말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
괜스레 지는 기분이 들었기에.
“하아….”
다시 혼자가 된 엘레나는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 탓에 밖에 나가고 싶진 않았다.
이 큰 방 안에서 무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종이…?”
테이블 위에는 서류로 보이는 종이들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
그를 골릴 최고의 생각이 떠오른 엘레나는 눈을 반짝이며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처음부터 잘했어야지.”
그녀는 종이를 반으로 접으며 서류들로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만든 비행기는 한 개, 두 개씩 쌓여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여러 개의 비행기 탑들은 끝을 모른 채 마구 쌓여 갔다. 엘레나는 가만히 쌓여 있는 종이비행기를 보더니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어디까지 날아갈까.”
한 손에 종이비행기를 든 그녀는 호기롭게 팔을 뻗어 하늘 위로 날렸다.
“멀리 가라.”
그녀가 갈 수 없는 곳까지 멀리 멀리 날아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힘없이 떨어진 비행기는 분수대에 쏙 빠지고 말았다.
“에이, 다시.”
엘레나는 다시 팔을 들어 한 번 더 힘 있게 날렸다.
하지만 이번엔 더 짧은 거리에서 고꾸라졌다.
“악!!!”
순간 들리는 비명소리에 엘레나는 창밖을 내다봤다.
“누구야!!”
이삭이었다.
머리를 문지르며 식식거리는 이삭을 본 엘레나는 기쁜 듯 손을 붕붕 흔들며 인사를 했다.
“이삭!”
“뭐야, 아가씨?”
“안녕!”
“이거 아가씨가 한 거야? 아오, 씨.”
이삭은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주워 들고 엘레나를 향해 말했다.
“딱 기다려, 아가씨. 나 진짜 머리 쪼개지는 줄 알았네!”
비행기에 맞은 게 분한지 식식대며 뛰는 모습이 퍽 웃겼다. 하지만 그가 올라온다는 소식에 괜스레 마음이 두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쾅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나타났다.
“아니, 종이를 이렇게 던지면 어떡해?”
“네가 맞을 줄은 몰랐어. 미안.”
엘레나의 표정에서는 별로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사람이 방 안에 들어왔다는 것에 기쁜 모양이다.
“나 여기 혹 나면 아가씨가 책임질 거야? 어?”
이삭은 아프다는 표정으로 식식거리며 머리를 문질렀다.
종이 따위가 뭐가 아프다고 저러는지.
“괜찮아. 이리 와 봐.”
엘레나는 그의 머리 위에 손을 뻗어 문질러주었다.
“자, 나아라.”
“뭐 하는 거야? 설마 이걸로 퉁 치는 거야?”
“응.”
“하… 참나.”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는 표정이 재밌었다.
이삭은 해탈한 것처럼 고개를 두어 번 돌리더니 자리에 앉았다.
“아, 근데 아가씨.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카루스 표정이 어지간히 안 좋던데.”
순간 어제 일이 생각난 엘레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제? 하… 네가 한번 들어 봐.”
그녀는 꼭 술집에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같이 회포를 풀었다.
그러자 이삭은 마치 아침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건 내가 봐도 카루스가 잘못했네.”
“맞지, 그 미친놈이 잘못한 거라니까? 하, 내가 억울해서 진짜.”
드디어 이 답답한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생겼다니.
정말 기뻐서 하늘로 승천할 것만 같았다.
“근데 카루스 보고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처음 봤네. 아가씨 진짜 웃긴다.”
“미친놈을 미친놈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
그녀의 말에 이삭은 입 꼬리를 올리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무슨 생각을 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걔 예전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
“뭐?”
엘레나는 놀란 듯 토끼 눈을 하고 이삭을 바라보았다.
“날 때부터 미친놈이 어딨어. 원래 데카루스도 순했다고.”
“아니, 순해? 그자가? 대체 어딜 봐서?”
데카루스에게 순한 모습이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아마 이 소릴 들으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것이다.
“황녀와 황자를 둘 다 잃고 그렇게 된 거야. 게다가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돌아가셨으니 그럴 만도 하지.”
“황자라면… 8황자님?”
“응, 맞아. 최근에 돌아오셨다고 들었는데.”
엘레나는 순간 8황자에 대한 궁금증이 샘솟기 시작했다. 이삭이라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삭, 그럼 8황자에 대해 아는 게 있어?”
“아, 그거라면 나도 잘 몰라. 난 황실의 개는 딱 질색이라. 황실과 거리가 먼 사람이거든.”
이삭은 앞에 있는 종이비행기 앞코를 만지작거리며 정말 모른다는 눈빛을 쏘아댔다.
“아, 그래….”
“근데 왜? 갑자기 관심이라도 생긴 거야?”
“아니, 아니야.”
엘레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에이든을 만날 때까지 아무 사실도 알아내지 못하겠구나.
뭐라도 나올 줄 알고 기대한 게 바보 같다.
그렇게 그와의 긴긴 대화는 날이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제인 말고도 오랜만에 코드가 맞는 사람과 대화를 하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럼 이만 가 볼게. 나도 퇴근이란 걸 좀 하고 싶네.”
“지금까지 농땡이만 부렸으면서….”
“기사단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이삭은 장난스럽게 이마 위에 손을 얹으며 경례를 한 뒤 뒤를 돌아섰다.
“아, 그렇다고 카루스를 너무 미워하지 마. 그 녀석 겉으론 그래도 속으론 아가씨를 엄청 생각하니까.”
“…….”
그의 말에 번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아무리 봐도 데카루스가 그녈 위해 해준 건 편히 살 수 있는 거 정도인데.
인간적으로 대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나를 많이 생각한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