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쓰레기 같아, 당신….”
잠시 동안 미동조차 없던 그는 이내 비소를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서슬 퍼런 눈빛엔 한기가 어려있었다.
“당신이 뭔데 나를 이렇게 대해.”
그의 눈빛엔 여전히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
붉게 달아오른 볼은 어느새 살짝 부풀어 올랐다.
“질문을 바꿀까?”
“…….”
“난 대체 당신에게 뭐야?”
맑고 푸른 눈은 어느새 물기로 촉촉하게 젖었다. 속눈썹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볼 언저리에 맺혀 뚝뚝 떨어졌다.
“왜 매 순간 당신은 날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
멍울진 목소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빗방울 같은 눈물이 새하얀 원피스를 투명하게 적셨다.
“말해, 당장….”
“…….”
“당신 입으로 말해!!”
그녀는 이를 악물며 투쟁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 입술은 감정을 감추듯 서로를 둥글게 말아 물었다.
“거기까지 해.”
안개가 자욱이 낀 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내리박혔다.
시릴 만큼 얼어버린 그의 표정에 오한이 돋았다.
“당신은 여전히 손버릇이 안 좋네.”
데카루스는 여린 손목을 잡고 그녀를 천천히 뒤로 몰아세웠다.
막다른 벽에 갇힌 엘레나는 잘게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 하자는 거야…?”
그러자 그는 깍지 낀 손을 잡아 올려 천천히 볼에 갖다 대었다.
차디찬 손이 얼음팩 역할이라도 하는 듯 벌겋게 부은 볼을 식혀주었다.
“놔…!”
엘레나는 온 힘을 다해 붙잡힌 손을 홱 뿌리쳤다.
손톱에 긁힌 그의 얼굴은 더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는 잠시 무언가 곱씹는 듯 가만히 눈꺼풀만 깜빡였다.
그렇게 잘게 한숨을 짓던 데카루스는 공허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아랫것을 대하듯 하대하는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잘못 들은 것이겠거니, 하고 고개를 들자 그가 한 번 더 못을 박아버렸다.
“기어오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엘레나.”
“…뭐?”
고압적인 언사에 조소가 튀어나왔다. 엘레나는 얼굴을 천천히 내저으며 고개를 올렸다. 모래사막처럼 건조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꽃잎처럼 물든 붉은 입술에서 다시 한번 가시 돋은 말이 피어올랐다.
“얌전히 굴어.”
그는 그녀를 집어삼킬 것처럼 또박또박 말을 짓이겼다.
엘레나는 구슬처럼 큰 눈망울을 깜빡이며 입술을 씹었다.
가슴은 생채기가 난 것처럼 아렸다. 마음속에 피어난 불꽃이 하나둘씩 꺼지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조용히, 얌전히 있으라고.”
“이게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야…?”
떨리는 눈동자가 간신히 그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은 얼굴로 그녀와 마주했다.
“그래.”
아니, 그가 말하는 사랑은 전부 거짓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이렇게 거칠지 않을 테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앙증맞은 눈, 코, 입을 차례로 쓸어내렸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뭘까.”
“하….”
엘레나는 입매를 주욱 올리고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가를 거칠게 닦아내던 손등은 투명한 눈물로 젖어 들었다.
“아니…. 당신은 나 사랑 안 해. 이건 집착이야.”
그는 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기울여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꼭 또 어떤 말을 할지 들어나 보자는 것처럼.
방 안의 공기는 우주의 한 공간처럼 적막으로 가득 찼다.
“난 당신에게 인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눈가에 맺힌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마음이 답답하고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가. 지금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아.”
엘레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침대로 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이를 악물었다.
끼익-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방을 떠났다.
그 어떤 위로의 말이나 사과도 없이.
가슴속에 들이찬 강물이 수위를 넘어선 기분이었다. 참았던 감정이 목구멍 바깥으로 터져 나왔다.
“하….”
* * *
쾅-
폭발할 듯 우렁찬 문소리와 함께 대기하던 기사들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이는 데카루스는 이를 까득 깨물며 대기하던 집사를 불러 세웠다.
“밖에 떨어진 책을 찾아서 내 2층 지하 서재로 와.”
“예, 대공 전하.”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 든 집사는 예를 차리곤 밖으로 나갔다.
데카루스는 한참 동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곤 2층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마자 자욱한 먼지와 함께 기다란 거미줄이 눈앞을 가렸다.
그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서재 내부에는 열 점이 넘는 초상화들과 오래되어 보이는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 데카루스는 제 키만 한 초상화 앞으로 가 손가락으로 먼지를 쓸었다.
“엘레나….”
분홍 머리를 한 여성과 아이가 사이좋게 앉아있는 초상화였다.
그는 어린 소녀가 그려져 있는 그림 몇 점을 더 살펴보더니 이내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 * *
14년 전, 크리스탈 궁.
따사로운 햇빛이 눈부시게 빛나던 어느 날.
튤립이 잔뜩 핀 황후궁의 새하얀 가보제에서는 헤실리아 황비와 베로니카 황후가 다도를 즐기고 있다.
따스한 햇살과 함께 뛰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공기에 가득 실렸다.
황후와 황비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찻잔을 기울였다.
“엘레나, 여기 이것 봐. 개구리야.”
어린 노아는 작은 청개구리를 들고 짓궂게 웃었다.
아마 그녀를 놀리며 꽤나 즐거워하는 것 같다.
“이런 멍청한 게! 비켜!”
“싫은데, 싫은데. 메롱!”
“노아, 전하 그만 괴롭혀.”
데카루스는 엘레나를 꼭 껴안은 노아를 보며 혀를 한 번 차곤 황후와 황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들과 자신은 맞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엘레나를 흐뭇하게 쳐다보던 황후는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황후마마, 이 책은 무엇입니까?”
황후는 허리를 숙여 작은 데카루스와 시선을 맞추었다.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민들레 홀씨처럼 부드러웠다.
“엘레나를 위해 줄 선물이란다.”
“선물이요?”
데카루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러자 황후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책을 들어 보였다.
“그래, 엘레나의 열 살 생일에 줄 거란다. 매일매일 엘레나에게 해줄 말들을 적고 있거든.”
“우와! 저도요! 저도 어머니께 해달라고 할래요!”
황후는 따듯한 햇살처럼 웃으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러렴.”
* *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의자에 기대어 있던 데카루스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윽고 붉은 입술 사이로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흘렀다.
“들어와.”
“전하, 책을 가져왔습니다.”
나이 든 집사는 고개를 숙인 채 흙먼지가 묻은 새하얀 책을 건넸다.
“수고했어, 나가 봐.”
데카루스는 귀찮은 듯 허공에 대고 두어 번 손짓하며 그를 물렸다. 그러자 집사는 고개를 숙이곤 다시 방문을 조심히 닫고 나갔다.
“엘레나를 위한 일기라….”
무미건조한 눈빛이 한참 동안 책 표지에 머물렀다.
상념에 잠겨있던 그는 이윽고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제국력 408년 4월 15일.
오늘도 예쁜 엘레나, 나의 천사.
엄마라 부르며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궁중 화가를 불러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단다.
나중에 네가 보면 참 좋아하겠지. 벌써부터 웃음이 나오는구나.」
「제국력 408년 9월 4일.
말썽꾸러기, 엘레나.
오늘은 데카루스를 때렸더구나.
어린 게 벌써부터 사람을 때리고 다니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지만 네가 씩씩하니 보기가 좋구나.」
「제국력 408년 10월 10일.
아가, 우리 아가. 소중한 우리 천사, 엘레나.
그년이 말한 신탁은 모두 거짓말일 거다.
이 어미는 그렇게 믿고 있어. 나는 널 절대 버리지 않아.」
탁-
책을 덮은 그는 손을 떨며 미간을 구겼다.
황후의 얼굴을 생각하니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베로니카 황후….”
거칠게 떨리는 그의 손바닥엔 깊게 팬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이 손으로 당신을….”
* * *
“짜증 나….”
울음이 다 그친 엘레나는 연신 한숨을 내쉬며 애꿎은 베개를 움씬 때렸다.
베개는 숨이 죽어 푹 들어갈 만큼 잔뜩 꺼져있었다.
“재수 없는 새끼….”
그가 내뱉은 달콤한 말들은 전부 탐스러운 선악과에 불과했다.
“뱀의 꼬임에 넘어가선….”
모든 것이 후회되었다.
그와의 입맞춤도.
그와의 하룻밤도.
그에게 내준 자그마한 마음의 방 한 칸도.
“바보 같아….”
스스로가 한심해 보였다.
에이든 말고는 앞으로 절대 사람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멍청하게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똑똑-
침대에 앉아 멍하니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을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나는 작게 한숨을 짓곤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구야.”
“저요, 제인.”
생각해 보니 오늘은 제인과의 티타임을 가지기로 한 날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햇살을 맞아가며 여유롭게 수다를 떨 만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다면 이건 모두 그 재수 없는 데카루스 놈 때문일 테다.
“미안, 제인. 오늘은 이만 가줄래.”
“네, 아가씨….”
제인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을 내뱉었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 상태로는 누군가를 맞이할 자신이 없었다.
“짜증 나….”
침대에 돌아누운 엘레나는 천장화를 보며 생각했다.
“에이든은 대체 어떻게 보러 가지. 저 미친놈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이제 더 이상 방법이라곤 없었다.
개구멍도 막혔을 게 뻔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도 않는다.
고분고분 그의 뜻에 맞춰 정말 인형처럼 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조금은 풀어줄지도….”
따사로운 오후 햇살 탓일까.
실컷 울어 피곤했던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다.
“조금만, 조금만 자야지….”
그렇게 태양이 저물고 달이 뜨는 밤.
찬란하게 빛나는 별빛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빛이 그녀의 머리칼에 닿아 반짝반짝 빛났다.
끼익-
문틈 사이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조용히 발을 내딛는다. 어스름한 달빛에 비친 사내의 실루엣이 방 안에 스며든다.
색색거리는 고요한 숨소리에 구둣발 소리조차 조심스럽다. 작게 부풀었다가 다시금 쪼그라드는 작은 생명체가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많이 울었구나.”
손가락에 엉기는 머리카락이 부드럽다. 언제나처럼 당신에게선 좋은 향이 풍겨와.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자꾸만 당신을 삼켜버리려 한다.
“우는 것조차 예쁘면 어쩌자는 걸까, 당신은.”
욕망으로 가득 찬 입술이 볼록한 이마에 닿았다. 살짝 찌푸리는 눈꺼풀에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온다.
“다시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얼기설기 엉킨 머리칼을 쥔 손이 조금씩 떨려온다.
“그러려면 황후 먼저 처리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