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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38화 (38/117)

38화.

이삭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받아줄 거지?”

“…뭐, 그래.”

이 상황이 조금 부끄러웠던 엘레나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맹세를 승낙했다.

그러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미소 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 아가씨.”

그는 뒤를 돌아 유유히 사라졌다.

한참 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엘레나는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걷는 그녀는 잔뜩 신이 난 것 같았다.

도서관 방향으로 한참을 걷다 보니, 개구멍이 있던 숲이 보였다.

숲의 입구에는 보라색 안젤로니아가 잔뜩 피어있었다.

“안젤로니아?”

엘레나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쭈그려 앉아 여린 꽃잎에 손을 댔다.

포근한 느낌이 꼭 구름을 만지는 것 같았다.

“조금만 가져갈게, 미안.”

예쁜 꽃을 뜯는 건 죄책감이 들었다.

꼭 그들의 보금자리를 마음대로 파괴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람에 날아가거나 떨어진 꽃들을 주워 바구니에 담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마음은 어느새 바구니에 담은 꽃들처럼 풍성해졌다.

신나는 발걸음은 어느새 그녀를 저택 안으로 인도했다.

화병에 꽃을 담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엘레나는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갔다.

“어머, 아가씨?”

복도엔 다과가 가득 담긴 트레이를 든 제인이 있었다.

그녀는 금세 기운을 차린 엘레나를 보고 놀란 듯했다.

“제인!”

엘레나는 빠르게 그녀에게 뛰어가 꽃바구니를 내보였다.

“이것 봐. 예쁘지.”

“어머, 안젤로니아 아니에요?”

“응, 맞아.”

“아가씨처럼 너무 예뻐요.”

제인의 칭찬에 활짝 미소를 지은 그녀의 모습은 따듯한 햇살 같았다.

“내 방에 올 셈이었지? 가자.”

엘레나는 소꿉친구처럼 그녀에게 팔짱을 끼고 방으로 향했다.

“근데 아가씨 옷을 갈아입으셔야겠어요.”

숲에서 꽃을 따느라 정신이 없어 옷이 더러워진 줄도 몰랐다.

옷소매와 밑단이 흙먼지로 갈색 빛이 돌았다.

“시종을 불러야겠어요.”

제인이 설렁줄을 당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가 찾아왔다.

“가벼운 옷으로 부탁해.”

“네, 아가씨.”

초여름 날씨라 그런지 햇빛이 쨍쨍했기에 가볍고 산뜻한 옷을 입고 싶었다.

땀이 삐질 난 걸 보니 이따가 목욕물을 받아 놓으라고 해야겠다.

“화병은 어딨지?”

그녀는 꽃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꽃병을 찾아 헤맸다.

그러자 제인은 보물찾기라도 하듯 이곳저곳을 뒤졌다.

“여기에 있어요.”

트로피를 든 것처럼 위풍당당하게 화병을 든 제인의 모습이 퍽 웃겼다. 새하얀 도자기로 만들어진 화병은 길쭉한 곡선을 이루는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바구니에 든 안젤로니아를 하나씩 꺼내 차곡차곡 꽂아 넣었다.

“난 이 꽃이 너무 좋아. 기억엔 없지만 언제부턴가 좋았어.”

“분명 좋은 기운을 담고 있는 꽃일 거예요.”

제인의 말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쯤 다시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새 옷을 가져왔습니다, 시녀장님.”

“고마워, 로라.”

제인은 온화한 미소를 띠며 옷과 꽃병을 가져온 시종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모습을 본 엘레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인은 참 친절해. 화내는 걸 본 적이 없어.”

그러자 제인은 입매를 살짝 올려 웃더니 아니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도 가끔은 화를 낸답니다, 아가씨.”

“거짓말, 언제?”

엘레나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 저택에 온 이후로 그녀가 아랫사람에 화를 내 거나 짜증 내는 걸 본 적이 없다.

제인은 엘레나의 긴 머리카락을 쓸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우리 아가씨처럼 예쁜 황녀님께서 황자님과 치고받고 싸울 때라던가….”

“아… 근데 그 황녀, 죽지 않았어?”

예전에 들은 기억이 있다.

황녀가 일곱 살쯤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 이후로 모습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항간의 소문에 의하면 돌연사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장 한번 치르지 않을 걸 보면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는 걸까?

“아….”

그 말을 들은 제인의 표정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에 당황한 엘레나는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다.

“미안, 미안해. 내가 실언했어.”

바보같이 앞뒤 생각 안 하고 질러버리는 이 주둥아리 탓에 매번 실수한다.

제인이 황궁에서 일했고 황녀를 모신 걸 알았으면서.

엘레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제인.”

“아니, 아니에요. 아가씨. 황녀님은 분명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을 거예요.”

제인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제인….”

마음이 동한 엘레나는 덩달아 함께 울먹거리며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미안해. 정말.”

흙먼지로 더러워진 옷은 어느새 그녀의 눈물로 젖어 들었다.

한참이 지나자 제인은 목이 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녀님은 인정 많고 순수하신 분이셨답니다. 항상 남에게 베풀길 좋아하고, 우리 아가씨처럼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고 싶어 하셨죠.”

억지로 끌어 올린 입 꼬리가 가여웠다.

엘레나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자책하며 연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제인이 우니까 나도 마음이 울적해지잖아. 그만 뚝. 내가 미안해.”

그녀는 얕게 떨리는 몸을 꼭 안으며 토닥였다.

덕분에 제인의 울음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하지만 마음속에 생긴 작은 돌덩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제인은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아가씨. 울기나 하고.”

“울 수도 있지, 제인. 너무 괘념치 마.”

제인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이내 자리를 떴다.

새로운 시녀들이 온 탓에 시녀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고 한다.

“다시 혼자네….”

그녀에게 홀로 남는 건 익숙지 않았다.

매일 에이든과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기에 혼자 있을 일도, 심심할 일도 없었다.

비참히 그녀를 두고 간 에이든이었지만 여전히 그가 보고 싶었다.

“에이든….”

그렇게 침대에 누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쯤 제인이 말하던 황녀가 생각났다.

“일곱 살 때 갑자기 사라졌다라….”

그 나이에 무슨 마라도 낀 걸까. 그녀 역시 일곱 살에 빙의했기에 머릿속엔 괜스레 호기심이 가득 찼다.

“찾아볼까?”

침대에 누워있던 엘레나는 벌떡 일어나 서재 앞에 섰다.

원래 그녀의 방에 있던 책장보다 훨씬 큰 책장이었기 때문에 분명 도움 되는 책들이 더 많을 테다.

“어디 보자…. ‘황실의 근원’, ‘에스텔 제국의 전쟁과 발달’…. 음… ‘에스텔 제국의 현대사’ 이거다!”

현대사라면 최근의 역사까지 모두 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장 맨 위에 꽂혀있어 꺼내기가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다.

“아이고, 키가 좀만 더 컸으면…!”

어쩔 수 없이 엘레나는 티 테이블의 의자를 꺼내 높은 책장과 키를 맞추었다.

“난 역시 천재야.”

금세 우쭐해진 엘레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에스텔 제국의 현대사」를 꺼내 들었다.

“콜록, 콜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책 겉면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있었다.

별로 오래된 책도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관리가 안 되어 있다니.

이따가 데카루스에게 말 좀 해야겠다.

“응? 이건 뭐지?”

책장의 맨 꼭대기, 그러니까 천장과 가까운 맨 위쪽에 금색 실로 수놓아진 하얀 책이 보였다.

그 책 역시 먼지가 자욱하게 껴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거미줄까지 쳐져 있다니. 족히 십 년은 넘어 보이는 책이었다.

“으….”

엘레나는 눈을 딱 감고 검지와 엄지손가락을 사용해 책을 집어 들었다.

스티로폼처럼 뭉쳐져 툭툭 떨어지는 먼지는 그 세월을 짐작케 했다.

그렇게 두 권의 책을 꺼낸 엘레나는 의자를 타고 내려왔다.

“일단 먼지부터 없애자.”

그녀는 시녀에게 먼지떨이를 빌려 창문을 열고 하나하나씩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이건 다 됐고, 이제 하얀 책…!”

털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먼지 탓에 엘레나는 몸을 기울여 팔을 쭈욱 빼고 먼지떨이를 탁탁 쳤다.

“자… 어디 보자. 응? ‘엘레나에게’?”

이 제국에서 엘레나라는 이름은 흔치 않다.

한데 책 이름이 「엘레나에게」라니.

끼익-

“엘레나, 거기서 뭘…!”

“꺄악!”

그때 갑자기 박차고 들어오는 데카루스 놈 때문에 창문에서 떨어질 뻔했다. 물론 중심을 잡느라 추락사는 면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만 건사하면 무엇 하나.

“내 책!!!”

“책?”

데카루스는 소릴 지르는 그녀에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 분명 내 이름이 들어가 있는 책이었단 말야.”

엘레나는 의자 밑으로 내려가 얼른 문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탁-

“뭐…?”

데카루스는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엘레나에게’! 책 이름이 ‘엘레나에게’였다고! 하, 진짜.”

“잠깐.”

그는 팔을 뻗어 나가려는 그녀를 막아섰다.

“뭐 하는 거야? 비켜.”

엘레나는 문 앞을 막은 그의 팔을 억지로 떼어내며 안간힘을 썼다.

“아니, 못 가.”

“대체 왜 이러는 건데 갑자기. 비키라고.”

왜인지 그의 얼굴엔 주름이 잔뜩 져 있었다.

“책은 원하는 걸로 다시 사다 줄게.”

“그 책에 뭐 돈이라도 숨겨놓은 거야? 왜 그래. 대체.”

그녀는 그의 팔을 세게 뿌리치곤 문을 박차고 나갔다.

“…….”

그러자 그는 눈을 감고 문 앞에 있는 기사들에게 외쳤다.

“당장 엘레나를 잡아 와.”

“예, 전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에서는 그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놔!! 놔!!!”

위병에게 잡혀 힘껏 몸부림치던 엘레나는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그녀를 짐짝처럼 끌고 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엘레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 꼬리를 파르르 떨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데카루스는 무릎 꿇은 그녀 앞에 거만하게 서 한쪽 구둣발로 일정한 소리를 내었다.

한숨을 쉬던 그는 고갯짓으로 기사들을 물린 뒤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고.”

“허….”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엘레나는 바닥에 닿은 무릎을 털고 일어나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깊이 묻혀 있던 분노가 다시금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사람을 개처럼 끌고 왔으면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사과?”

데카루스의 표정에선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사과라는 단어를 평생 알지 못하고 산 사람처럼 말이다.

“당신은 미안하다는 생각도 안 드니?”

“딱히.”

데카루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너무 기가 차면 도저히 말이 안 나온다던데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미친 새끼….”

“말은 가려가면서 해야지.”

지금 자기 체면이나 살리자고 이렇게 당당하게 허세를 부리는 건가.

도저히 상식 있는 인간과 대화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깟 책이 뭐라고 날 이렇게 대해.”

겨우 책 한 권이다.

어디서 훔쳐 온 책도 아니고 그냥 서재에 꽂혀있던 책 한 권을 꺼낸 것일 뿐이다.

한데 그게 무어라고 이렇게 무자비하게 폭력 아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일까.

“그깟 책은 그만 신경 쓰지 그래.”

“사과해.”

흔들리는 눈빛이 그에게 닿았다. 푸른 눈동자에 담긴 그의 얼굴은 감정 없이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사과하라고 당장.”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는 뾰족한 턱을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런 표정은 당신에게 안 어울려.”

입 꼬리에 닿은 손가락이 억지로 피부를 주욱 들어 올렸다.

“웃어야지.”

짝-

매서운 마찰음과 함께 그녀를 향하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허공에 들린 손은 잘게 떨렸고 시선은 그의 벌게진 볼에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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