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얼른 일어나라며 눈가에 아른거리는 햇살이 얄궂게 느껴지는 아침이다.
온몸이 찌뿌둥하고 아린 건 분명 어젯밤 있었던 일 때문이겠지.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몸 이곳저곳을 물어뜯을 것처럼 깨무는 바람에 팔과 다리에 빨간 자국이 남았다.
힘은 어찌나 세더니 옴짝달싹 못 하도록 팔을 위로 올려 꽉 잡고 그대로….
“무슨 상상 해.”
순간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놀란 엘레나는 눈을 번쩍 뜨고 옆으로 얼굴을 천천히 돌렸다.
“뭐야, 당신 왜….”
나른한 눈빛을 한 데카루스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장미꽃처럼 고혹적인 눈동자는 그녀를 심연 속으로 데려다주었다.
“말해. 무슨 상상을 했기에 이렇게 얼굴이 붉은지.”
그의 손끝이 천천히 밑 입술을 짓누르며 붉은 속살을 들췄다.
“아무 상상도….”
“정말?”
약에 취한다는 게 이런 뜻일까.
엘레나는 꼭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
그는 꼬리 아홉 개를 숨긴 구미호처럼 유혹적이었다.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퇴폐적인 단어였나.
“진짜야.”
그는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서큐버스 같은 매혹적인 모습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빗장 같은 팔로 몸을 꽉 죄었다. 마주 닿은 맨살엔 그의 온기가 천천히 스며들었다.
“진짠지 볼까.”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따듯한 입김이 불어왔다.
축축한 무언가가 입술을 살짝 꼬집었다.
엘레나는 눈을 꽉 감고 그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여긴 왜 이렇게 뜨거워.”
단단한 손이 온몸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예민한 부위 곳곳을 건드리는 손길에 엘레나는 이따금씩 움찔거렸다.
“어제 많이 해 봤잖아. 응?”
그는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그녀를 살살 달랬다.
“당신, 너무 야해.”
색색거리는 잦은 호흡이 그를 한층 더 자극시켰다.
“하… 그만….”
그녀의 외침에 그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시선을 맞추었다.
“그만?”
“응, 그만해.”
이대로는 위험했다.
꼭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 위험한 계약을 맺는 기분이었다.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마주 닿은 입술 사이로 거친 호흡이 오고 갔다.
볼에 닿은 검은 머리칼은 강아지풀처럼 간지러웠다.
“당신은 책임감이 없어.”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연분홍빛 머리칼이 그의 손에 엉겨 붙었다.
끈적한 분위기 탓인지 머리카락에 닿은 온기마저 뜨거운 것 같았다.
데카루스는 나른한 눈빛으로 눈, 코, 입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관찰하곤 이마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다음엔 진짜 안 봐줘.”
그는 의뭉스러운 말을 내뱉곤 반나체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장 앞에 선 그의 몸은 감탄은 자아냈다. 근육으로 다져져 떡 벌어진 어깨에 탄탄한 가슴.
가는 허리 밑으로 살짝 드러난 장골까지.
시선이 느껴진 탓일까. 데카루스는 엘레나를 향해 슬쩍 눈을 흘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왜, 아쉬워?”
“아니, 그건 아니고.”
잘 익은 토마토처럼 볼이 붉어진 그녀는 눈알을 굴리며 시선을 옮겼다.
“그럼 잘 놀고 있어. 갔다 올 테니.”
“…….”
엘레나는 대답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데카루스는 그런 그녀가 귀여운 듯 살짝 웃으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털썩-
그가 나가자마자 침대에 시체처럼 누운 엘레나는 천장화를 바라보았다.
온몸은 피가 쫙 빠져나간 것처럼 기운이 없었다. 구미호는 사람의 정기를 빼먹는다던데 정말 그가 정기를 다 빼간 것일까.
“진짜 악만가….”
엘레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볕이 이렇게나 쨍쨍한데 나갈 기운이 전혀 없었다.
똑똑-
“들어와.”
“아가씨?”
목소리를 보아하니 제인이 분명했다.
그녀는 팔을 쭉 들곤 천천히 흔들며 생존 표시를 했다.
그러자 제인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가씨, 왜 이렇게 기운이 없으세요. 아침도 거르시고.”
“그러게….”
“혹 밤새 무슨 일이… 아가씨, 목이….”
아, 들켜버렸다.
목에 있던 붉은 자국들을 가릴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운이 없으실 만하네요….”
제인은 당황한 기색 없이 남몰래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것도 우아하게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말이다.
“아무 일도 없었어.”
원래 찔리는 사람이 먼저 거짓말을 한다고, 그녀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부모님한테 들키면 이런 기분이려나. 민망함에 제인의 얼굴을 도저히 쳐다보질 못하겠다.
“나 달달한 디저트 하나면 기운 날 것 같은데.”
엘레나는 괜스레 다른 얘길 꺼내며 화제를 돌렸다.
장담컨대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니다.
온몸에 있는 당이 전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럴 줄 알고 초콜릿을 가져왔답니다, 아가씨.”
“진짜?”
마른 생선처럼 침대에 붙어있던 엘레나는 순간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죠. 제가 아가씨를 얼마나 잘 아는데요.”
“제인….”
제인은 어쩌면 에이든보다 더 그녀를 잘 알지도 모른다. 순간 찡한 마음에 넓게 팔을 벌려 그녀를 껴안았다.
“자, 여기 탁상 위에 놓고 갈 테니 꼭 챙겨 드세요. 전 이만 가봐야 해요.”
“응, 알았어. 고마워.”
엘레나는 활짝 미소 짓곤 살며시 그녀를 놓아주었다. 마주 보며 똑같이 미소를 짓던 제인은 초콜릿이 잔뜩 든 바구니를 탁상 위에 놓고 방을 떠났다.
“줬으니 또 먹어야지.”
사탕처럼 말린 초콜릿은 한 입 거리로 안성맞춤이었다.
혀를 감싸는 달큰한 맛이 중독적이었다.
“이거 하나 먹었다고 또 힘이 나네.”
초콜릿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하긴, 그러니까 야근할 때 그렇게 초콜릿을 들이부었지.
엘레나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했다. 온몸에서 뼈가 결리는 소리가 나는 게 아주 시원했다.
“방 안에만 있기엔 미안한 날씨지?”
그녀는 초콜릿 바구니를 들고 나갈 채비를 했다. 오고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에게도 나눠줄 계획이었다.
“그럼 나가볼까?”
햇볕이 쨍쨍한 탓에 챙이 긴 모자를 쓴 엘레나는 꼭 소풍 나온 귀족 영애 같았다.
모자를 둘러싼 연보라색 리본은 예쁘게 흘러내려 분홍빛 머리카락과 조화를 이루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시종들은 밝은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엘레나는 그들에게 초콜릿을 건네주며 화답했다.
“자, 이거 먹어.”
빨라진 발걸음은 그녀를 저택 이곳저곳으로 안내했다.
덕분에 힘도 나고 기분도 좋고 아주 일석이조다.
“…어?”
그때 어디선가 본 듯한 사내가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연갈색 머리에 큰 키, 그리고 떡 벌어진 어깨.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점차 가까워졌다.
커다란 눈을 반쯤 접은 그 역시 그녀를 보곤 살며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
“개구멍?”
그들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 손가락질을 했다.
“너!”
“개구멍? 아가씬 내 이름도 기억 못 해?”
그는 개구멍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내 천(川)자를 그린 미간이 그림을 그린 것처럼 선명했다.
“아니, 미안. 근데 생각나는 이름이 개구멍밖에 없는걸?”
“하, 이삭이라고, 아가씨. 이삭 에이브런.”
그는 거북이처럼 목을 쭉 내밀고 서운한 듯 말했다.
“뭐, 미안.”
미안하진 않았지만 미안하다고 해줬다.
그게 조금 더 어른다운 행동인 것 같아서 말이다.
“자, 너도 먹어.”
그녀는 초콜릿을 한 손에 꽉 쥐어 그에게 주었다.
그러자 이삭은 당황스럽다는 듯 초콜릿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뇌물이야?”
“음, 그런 셈이지.”
아무렇지도 않은 그녀의 표정은 그를 더 당황시켰다.
이삭은 생각보다 더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근데 너. 네가 데카루스한테 꼰질렀지?”
그 시계탑에 가는 걸 아는 사람은 이삭, 이놈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삭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가식적인 미소 지었다.
“말해, 개구멍. 안 그럼 넌 평생 개구멍이야.”
“하, 진짜 아가씨 그렇게 안 봤는데. 그래! 내가 그랬어! 데카루스가 날 죽이려고 해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소리쳤다.
찡그린 모습이 퍽 재밌었다.
“죽여? 널? 친구라며.”
엘레나는 표정을 한껏 구기며 입 안에 초콜릿을 까 넣었다.
“아, 너 쫄병이지?”
생각해 보니 데카루스가 여기 왕이고 나머지는 다 쫄병이니까 이놈도 쫄병인 셈이다.
“뭐? 하, 쫄병… 아니….”
“근데 그 개구멍 아직도 살아있어?”
이삭의 말을 가로챈 건 미안했지만 지금 개구멍이 더 중요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더니 이내 대답했다.
“아니, 그때 바로 막았지.”
아, 망했다.
에이든을 만나러 가려면 그 구멍밖에 나갈 곳이 없는데.
엘레나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러자 이삭은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여우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또 나갈 거구나?”
“응, 근데 이제 너한테 안 기댈 거야.”
그랬다간 또 데카루스한테 걸릴 게 뻔하니까.
“내가 좋은 방법을 알고 있는데.”
엘레나는 뱀눈을 하고 그를 유심히 쳐다봤다.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엔 맹세코 안 말할게.”
“정말?”
“그래, 정말. 기사의 용맹을 걸고 맹세해.”
기사의 용맹.
제국에서 정예기사가 되기 위해 꼭 치러야 하는 맹세의 의식.
도덕적 규범, 용기, 명예 등 기사로서 꼭 갖춰야 할 행동 규범이다.
“뭐, 그렇다면….”
“저기, 지금 문이 열린 거 보이지.”
그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회색빛의 철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응, 근데 저게 왜?”
“저 문은 매일 아침 7시와 9시에 열려. 짐 마차에서 음식을 들여오는 시간 그리고 잔반을 처리하는 시간이야.”
“근데 이 방법은 너무 위험하잖아. 누가 보기라도 하면….”
“9시까지가 아침 식사 시간이야.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나갈 수 있어.”
리스크는 컸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방법이었다.
뭐, 이것 말곤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넌 앞으로 개구멍이 아닌 이삭이야.”
“와, 아가씨. 진짜 너무하네.”
이삭은 어이가 없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연극배우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얼굴에 결국 엘레나는 참지 못하고 밝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 역시 연갈색 머리를 쓸어넘기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럼 잘 가, 이삭. 다음에 또 봐.”
엘레나는 얼마 남지 않은 초콜릿 바구니를 들고 다음 장소로 갈 준비를 했다.
“잠시 손을.”
그러자 그는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
“제국의 명예기사, 이삭 에이브런. 당신에게 영원한 충성을.”
갑작스러운 오글거리는 말투와 행위에 닭살이 돋은 엘레나는 얼굴을 구겼다.
“뭐야, 이거. 왜 갑자기 멋진 척인데.”
“아가씨를 영원히 지키겠다는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