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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36화 (36/117)

36화.

투명한 유리 접시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파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제인은 한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아… 아가씨….”

“왜 그래, 제인. 괜찮아? 너… 다리에 피가….”

“아니… 괜찮아요….”

처음으로 제인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손바닥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 손길이 칼날처럼 차가웠다.

“앉아 계세요, 아가씨… 정리는 제가 할게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맨손으로 유리 조각을 집었다.

“제인, 위험해. 뭐라도 끼고….”

“아니에요… 정말, 정말 괜찮아요….”

깨진 접시를 줍는 파리한 손가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정신 줄을 간신히 잡고 있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미안, 내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서. 황궁에 대한 기억도 좋지 않을 텐데.”

“괜찮아요, 아가씨. 그런 게 아니에요.”

제인은 억지로 입가에 포물선을 그리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모습은 꼭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나무 인형처럼 어색해 보였다.

“저 그럼 이만 대공님께….”

“제인?”

“죄송해요, 아가씨.”

“제인!!!”

제인은 사냥꾼에게 쫓기는 동물처럼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8황자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혹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

엘레나는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앉았다.

“대체 뭐야….”

* * *

대공저, 집무실.

똑똑-

“들어와.”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노크 소리에 맞춰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제인이었다.

다리에 피가 묻은 걸 보아하니 분명 어떤 연유가 있어서 이곳에 찾아온 거겠지.

“무슨 일이지.”

무거운 목소리가 집무실 안을 울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고개 숙인 제인은 목소리를 한번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황녀님께서 기억을 되찾으신 것 같습니다.”

“뭐?”

제인의 말에 데카루스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안절부절못하던 제인은 다시 한번 숨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8황자님을 찾으셨습니다.”

“노아를?”

“예, 전하. 8황자님이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그에 데카루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서류에 도장을 쾅 찍었다.

“저번에 황자를 알현하러 궁에 다녀왔다고 했어. 그래서 물어본 것이겠지.”

“아… 하지만….”

제인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손을 쥐락펴락하더니 이내 말을 내뱉었다.

“제가 감히 첨언하자면 8황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물어보셨습니다. 분명 무언가….”

“식장에서 우연히 만난 거겠지. 그 녀석 성격은 쾌활하잖아. 그리고 엘레나가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는 건 미리 일러두었고.”

그녀의 촉은 매번 잘 들어맞는다지만 이번엔 단단히 잘못 짚었다.

노아가 눈치 없이 그녀의 기억을 들었다 놨다 할 사람도 아니니.

“하지만….”

그는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그녀를 멈춰 세웠다.

“내가 나중에 노아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제인, 일단 넌 엘레나의 상황을 계속 지켜봐.”

“예, 대공 전하.”

제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꼭 깨물고 뒤로 돌아섰다.

데카루스는 그녀가 나가자마자 손에 쥔 만년필을 멈춰 세웠다.

그러곤 새카만 활자를 보며 깊이 생각에 잠겼다.

“설마… 그럴 리가.”

* * *

제인이 떠난 방은 쥐새끼 발자국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마치 핵폭탄이 터지고 난 이후처럼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과 그녀의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렇게 꼼꼼하던 제인이….”

그녀는 창가에 낀 먼지 한 톨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세심하던 제인이 허둥지둥 나간 걸 보면….

“분명 무언가 있어.”

엘레나는 작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와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그녀가 바닥을 쓸자 얇은 갈대와 유리 조각의 마찰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노아… 에이든….”

이 두 사람의 연관성은 대체 뭘까.

에이든은 분명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보육원에 버려졌다고 했다.

한데 이제 와서 자기가 황자라니.

“말도 안 돼.”

엘레나는 어깨를 축 내리며 기운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그녀에게 출생의 비밀이라도 숨긴 건 아닐지. 아니면 일부러 속이기 위해 거짓말은 한 것은 아닐지.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별의별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해 지기 전 광장이라고 했나….”

에이든이 분명 삼 일 뒤 해가 지기 전 광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때 그렇게 정신을 잃었어도 그가 했던 말들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말이지.”

저번에 충격을 많이 받았던 건지 요새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데카루스에게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른 것 역시 현실이 맞겠지.

“하… 어쩌지….”

그녀는 침대에 풀썩 앉아 창밖에 비치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괜스레 미안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죄책감 따윈 없었다.

그 역시 그녀에게 못 할 짓거릴 해댔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사과 안 해.”

엘레나는 침대에 풀썩 누워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뭐, 유치원생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복수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일종의, 그러니까 그녀가 할 수 있는 작디작은 반항 중 하나일 뿐이다.

끼익-

“카루스!”

갑작스레 들린 문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노크 없이 문이 열린다면 분명 그일 테다.

엘레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 일로, 당신이.”

너무 티 나게 그를 반기긴 했나 보다.

평소엔 아는 척도 잘 안 했으니까.

데카루스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환영에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 아니겠어?”

엘레나는 억지로 입매를 올려가며 그를 따라 다람쥐처럼 쪼르르 옷장 앞으로 따라갔다.

사실 제인이 가서 대체 무슨 말을 전했을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뭐, 무슨 일 없었어?”

엘레나는 별일 없는 척 연기를 해가며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몸을 풀었다.

“그래.”

여느 때와 같은 단답식 대답에 할 말을 잃은 엘레나는 작은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럼 나한테 할 말 없어?”

“딱히 해야 할 말은 없는데.”

그의 반문에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갑자기 이렇게 묻는다면 누구든 어쩔 줄 몰라 하겠지.

엘레나는 숨을 깊게 들이켜곤 다시 한번 되물었다.

“제인이 당신에게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는 넥타이를 풀던 손을 잠시 멈추더니 그녀를 힐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닌데.”

엘레나는 삐친 어린아이처럼 빠르게 반박했다.

거울에 비친 데카루스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 말도 안 했어.”

“거짓말.”

그러자 그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와 마주친 붉은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제인이 당신에게 해준 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거짓말….”

제인이 분명 그에게 간다며 뛰쳐나갔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엘레나는 적잖이 실망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 자는 게 좋겠어.”

그는 가는 허리에 손을 올려 그녀를 침대로 이끌었다.

“나 하나도 안 피곤해.”

엘레나는 허리를 감싼 두터운 팔을 잡아 쥐었다.

그러곤 고개를 올려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대로 말해줘.”

데카루스는 곤란한 듯 눈을 감고 깊게 들이켠 숨을 내쉬었다.

“뭘 말야.”

“제인이 정말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래, 정말.”

그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비소를 흘렸다.

장담컨대 지금 그가 내뱉는 모든 말들은 전부 거짓일 테다.

그렇게 나온다면 궁금한 걸 직접 물어볼 수밖에.

“그럼 노아, 아니 8황자님은 어떤 사람이야?”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데카루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로의 눈을 마주 본 채로 말이다.

“엘레나.”

“만났어, 그를.”

그의 눈동자는 고장 난 비디오테이프처럼 빠르게 흔들렸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데카루스는 이내 평정을 되찾아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만 자. 당신 몸도 안 좋잖….”

“다들 내게 무언가 숨기는 기분이야.”

제인도, 데카루스도, 에이든도 전부 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이 기분.

혼자만 바보가 되어 길을 헤매는 것 같다.

“그런 거 없어.”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호수를 담은 듯한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귓가에 맴도는 그의 목소리는 습한 동굴 속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또 거짓말….”

“엘레나.”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툭 떨군 엘레나는 작은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말해줘, 대체 뭘 숨기느라 그렇게 바쁜 거야?”

“그만, 엘레나.”

“말해줘.”

“그만.”

“말…!”

허리에 닿은 단단한 손이 그녀를 더 진하게 잡아당겼다.

아슬아슬하게 닿은 두 입술 사이의 호흡이 뜨거웠다.

나지막이 움직이는 입술이 그녀의 여린 살을 건드렸다.

“단둘이 있을 땐 우리 얘기만 해.”

“그게 아니잖아. 지금 나는…!”

“억지 부리지 마.”

그가 말할 때마다 부드러운 살이 그녀를 조금씩 더 간질였다. 위험을 감지한 엘레나는 그의 팔을 잡고 고개를 떼었다.

“당신이 먼저 거짓말을 하잖아.”

엘레나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데카루스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만하라고 했어.”

냉기를 머금은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턱 끝에서 올라온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엘레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난 그저…!”

“이건 당신이 먼저 그런 거야.”

“읍…!”

찰나였다.

그의 혀가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 사이를 빠르게 파고들었다.

어쩔 도리 없이 거칠게 점령당한 살은 타액으로 끈적하게 뒤섞였다.

그는 가녀린 허리를 붙잡으며 그녀를 집어삼킬 듯이 키스했다.

“하아… 당신… 대체!”

“가만히.”

거친 숨소리와 함께 입 안은 축축한 살덩이로 빠르게 물들었다.

헐떡거리던 엘레나는 주먹을 쥔 채 그를 세게 밀어냈다.

하지만 역시나 자신보다 배로 힘이 센 남성을 밀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카루…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뜨거운 숨결이 입술 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침대 위로 향하는 그의 몸짓은 짐승처럼 거칠었다.

그의 손길에 젖혀진 원피스 밖으로 어깨가 훤히 드러났다. 온 방 안은 그들의 격정적인 호흡 소리로 가득 찼다.

“당신은 매번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보조개가 팬 그의 얼굴에 온몸에 솜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단추 서너 개가 풀린 셔츠 안으로 단단한 사내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부드러운 손길이 무릎을 타고 올라와 천천히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처음부터 내 말을 들었으면 좋았잖아.”

몸을 타고 흐르는 간지러운 움직임이 그녀를 달뜨게 했다.

색색거리는 귀여운 호흡에 데카루스의 얼굴엔 살짝 미소가 띠었다.

“기분 좋게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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