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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35화 (35/117)

35화.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걸린 밤.

달빛에 빛나는 연분홍빛 머리칼이 밤하늘을 건너는 은하수처럼 아름답다.

캄캄한 방 안에는 핏기 없는 얼굴을 한 엘레나가 시체처럼 누워있다.

그녀의 옆엔 데카루스가 미동조차 없이 자리를 지켰다.

“에이든….”

파리한 입술에선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보석처럼 떨어지는 눈물이 볼을 타고 처량하게 흘러내렸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추락하는 눈물을 들어 올렸다.

손톱에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손가락 사이로 갈라졌다.

“언제까지 그 이름만 부를 거야.”

차가운 볼에 맞닿은 손이 따듯하게 그녀를 어루만졌다.

보드라운 살갗을 스치는 손가락은 천천히 곡선을 그려 나갔다.

“으음….”

그러자 그의 마음에 동하기라도 한 듯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카루스….

“일어났어.”

방금 막 태어난 아기 새처럼 눈을 뜨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은 퍽 귀여웠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이름을 불러준 그녀가 사랑스러운 듯 부드럽게 이마에 키스했다.

“몸은.”

“아까보단 괜찮아.”

아까보단 확실히 괜찮았지만 머리가 아프고 몸이 으슬으슬했다.

너무 충격을 받은 탓일까.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정신은 약에 취한 것처럼 비몽사몽 했다.

“계속 있었던 거야…?”

그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꼭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인 것처럼.

“그래.”

덤덤히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선 그 어떤 기쁨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시릴 듯이 차가웠을 뿐.

침대 옆 탁상에는 여러 번 간 듯한 물수건과 물이 가득 찬 그릇이 놓여있었다.

“밤새?”

엘레나는 눈을 비비곤 다시 그를 바라봤다.

예식이 파투 난 지 벌써 몇 시간은 지났는데 여전히 결혼식 예복을 입고 있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과 새하얀 피부는 마치 뱀파이어 신랑을 연상케 했다.

“…….”

그는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가슴팍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을 뿐이었다.

정말 밤새 가만히 자릴 지키며 간호해준 것일까.

마음속에 자리 잡은 오밀조밀한 감정은 그를 향해 무언가 말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고마워.”

그녀의 말과 함께 머리카락을 지분대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처음으로 내뱉은 고맙단 말에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일까.

엘레나는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당기며 그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좀 더 자도록 해.”

미세한 표정 변화도, 눈동자의 흔들림도, 한 치의 당황한 기색도 없이 그는 자연스레 손을 뗐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따스한 손길이 사라지니 조금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나 이제 괜찮은데.”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지어냈다.

장담컨대 그의 온기를 더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그저, 그저 조금만 곁에 더 머물러 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인 것이다.

“안 하던 짓을 하니 아직까지 아픈 거야.”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이렇게 돌려 까는 것일까.

데카루스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눈꺼풀 위에 손을 올렸다.

“자.”

나지막한 외마디에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조금만 곁에 더 머물러 줬으면 하는 마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 건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냥.

옆에 아무도 없는 건 외로우니까, 그뿐이다.

“가지 마.”

앙증맞은 입술에서 튀어나온 그 한마디에 데카루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엘레나는 그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가지 마, 카루스.”

애처롭고도 가엾은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을 맴돌았다.

형형한 푸른 눈빛은 마치 어미 잃은 어린 강아지처럼 올망졸망했다.

“그래.”

높낮이 없이 차분한 목소리에 조금은 기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정처 없이 흐르는 바다 위 종이배처럼 그녀의 마음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가 조금 더 곁을 지켜주길 바라는 이 감정은 대체 뭘까.

데카루스는 그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그저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마음이 이상해. 꼭 고장 난 것 같아.”

엘레나는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예전보다 더 빠르게 쿵쾅대는 심장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의원을 불러야 할 것 같아. 카루스.”

그녀는 지금 제 상태가 심각한 걸 인지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는 손을 들어 왼쪽 가슴 위에 있는 조막만 한 손을 덮었다.

“의원은 필요 없어.”

반쯤 풀린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냥 이렇게. 가만히.”

어느덧 그의 손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그의 손엔 마법 가루를 뿌린 게 틀림없다.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 걸 보면.

엘레나는 비몽사몽 한 상태로 천천히 무언가를 읊조렸다.

“카루스, 에이든을 봤어….”

조용히 내쉬는 짙은 한숨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정말 에이든을 봤는걸.

생생한 피부의 감촉이 아직 손끝에 남아있다.

그의 낯선 향기가 아직 코끝에 일렁인다.

“이만 자.”

“정말이야… 정말 에이든이 식장에 나타났어, 카루스….”

조막만 한 입술은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조용히 움직였다.

그는 말없이 그저 그녀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근데 에이든이 자기가 에이든이 아니래… 다른 사람이래… 지금까지 날 속인 걸까….”

밀려드는 졸음과 맞서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자신이 황자라며 몰아붙이던 그때 그 표정.

더 이상 에이든이라고 부르지 말라며 단호하게 일갈하던 말투.

“마음이 아파….”

“그래, 엘레나.”

그는 끝까지 믿어주지 않는 눈치였지만 분명 에이든을 만났다.

그와 이야기하고 그를 어루만졌다.

아직도 귓가를 서성이는 부드러운 음성이 잊히지 않는다.

“에이든….”

그렇게 제풀에 지친 엘레나는 아기 천사처럼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귓가를 나부대는 작은 호흡 소리가 부드러운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밤새 그 옆을 지켜준 게 통하긴 했는지 핏기 없던 얼굴엔 조금씩 혈색이 돌았다.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왜일까.”

데카루스는 어루만지던 분홍빛 머리칼을 맞대어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곤히 잠든 그녀가 깨지 않도록 시트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반쯤 감긴 공허한 눈동자 속에 고요히 잠든 엘레나의 모습이 엉겼다.

“당신 입에서 나오는 그 이름이 자꾸만 거슬려.”

* * *

어제 밤샌 그의 간호 덕분일까.

씻은 듯이 나은 건 아니지만 이제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을 만큼 개운해졌다.

“자아-”

엘레나는 침대 위에서 다리와 팔을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아무래도 하루 종일 누워있던 탓에 온몸의 근육이 굳은 기분이었다.

“근데 어제 나 뭘 한 거야.”

어젯밤 그에게서 느낀 몽글몽글한 감정들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진심을 담아 전한 말이 오글거려 미칠 것 같았다.

“가지 마? 가지 마?”

엘레나는 괜스레 죄 없는 베개에 주먹질을 했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내뱉은 스스로에 자괴감이 들었다.

“미쳤어!”

“아가씨…?”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보니 제인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아… 아! 안녕, 제인? 이건 그냥 운동이야! 운동!”

엘레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베개를 제자리로 가져다 놓았다.

그러곤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하하하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가씨, 여전히 아픈 건 아니시죠…?”

“아프긴? 나처럼 건강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제인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닫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소리를 지르며 베개를 열심히 팬 탓에 노크를 듣지 못한 모양이다.

“아가씨가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제가 어제 얼마나 걱정을 했다고요!”

제인은 그녀를 와락 안으며 부서질 듯 몸을 조였다.

그녀의 품은 마치 엄마의 품처럼 따듯했다.

지금 보니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곧장 방으로 달려온 것 같다.

늘 단정했던 연갈색 머리카락이 너저분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근데 나 이제 진짜 멀쩡하니까 괜찮아.”

“네, 네. 아가씨.”

제인의 목소리는 약간 울먹이는 듯했다.

엘레나는 그런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근데… 어제 결혼식은 어떻게 된 거야?”

“대공님께서 아가씨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행사를 전부 취소하셨어요. 아, 대공님이 그렇게 놀라시는 거 처음 봤어요. 표정 변화가 많지 않으신 분이신데….”

“그래, 그렇구나….”

차라리 잘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원하던 결혼이 아니었으니까.

“근데 설마 데카루스가 또 결혼하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엘레나는 얼굴을 잔뜩 구기며 제인을 바라보았다.

그놈은 결혼식이 파투 났으니 또다시 하자고 부추길 인간이다, 분명.

“글쎄요… 하지만 대공님 성격이라면 아마….”

“아! 아니야, 제인. 말이 씨가 된다고 했어. 그만 들을래.”

엘레나는 두 손을 들어 귀를 꾹 눌러 소리를 차단했다.

예부터 어른들이 하는 말은 틀린 게 없다고, 조상들의 지혜를 잘 새겨들어야지, 암.

“한데 어제 정원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시녀들 말로는 아가씨께서 정신없어 보이셨다고 하던데….”

“아….”

엘레나는 어제의 기억을 잠시 떠올렸다.

갑작스레 나타난 에이든과 그의 허황된 이야기들.

“그냥 별일 없었어. 태양 빛이 너무 따가워서 그랬나 봐.”

“휴, 아가씨, 체력을 기르셔야겠어요. 이러다가….”

제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잔소리를 해댔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에이든과 8황자 사이에 분명 어떠한 관련이 있을 테다.

그러니 그도 그렇게 단호히 말한 거겠지.

또 노아라는 이름은 분명 데카루스가 말한 사촌동생의 이름일 텐데 대체 어떻게 에이든이 그를 아는 것일까.

“그러니까 오늘부턴 밖에 나가셔서 운동을…!”

“제인, 근데 예전에 황궁에서 일했다고 했잖아.”

작은 호기심을 품은 엘레나는 열변을 토하는 제인의 말을 살짝 끊었다.

“아… 네, 그렇죠?”

제인은 갑자기 황궁 얘기를 묻는 그녀에 의아한 듯 몸을 떼며 대답했다.

“그럼 황자님들과도 잘 아는 사인가?”

“저는 보통 황녀님들을 뫼셔서 황자님들을 잘 알진 못해요. 뭐, 몇몇 분들을 빼고요.”

“아….”

“한데 왜요, 아가씨?”

엘레나는 잠시 고민하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고 제인의 연갈색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8황자님은 어떤 분이셔?”

쨍그랑-

“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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