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아주 긴 꿈이었다.
데카루스라는 남자에게 사로잡혀 결혼까지 하는 꿈.
그래, 세상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꿈이 있을 리가 없지.
아무리 꿈이라고 할지라도 두렵고 무서웠다.
붉은 눈에 검은 머리는 이제 치가 떨릴 정도로 싫다.
새들의 노랫소리, 강가의 세찬 물소리, 나무 사이를 오고 가는 바람 소리.
눈을 감은 지금 이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것이 전부 꿈이었다면 어서 깨어나고 싶다.
“…나!”
누군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익숙하지만 슬픈 목소리.
간절하게 찾아왔던 그 목소리가 귓가를 아른거린다.
“엘레나!”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낯익은 얼굴.
눈부시도록 빛나는 백금발에 금빛 눈동자.
강아지를 닮은 듯한 눈매에 새하얀 피부.
“에이든…?”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열쇠.
그가 눈앞에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
“난… 네가 날 버린 줄….”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엘레나를 보고 뭐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 하는 거야. 무거우니까 비켜.”
여전히 재수 없는 걸 보아하니 아까 봤던 그 에이든은 가짜인 게 분명하다.
“그래, 역시 그래야 너답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허무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 에이든이 아까처럼 그렇게 헛소리를 할 만큼 미친놈은 아니니까.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긴 허공에 대고 실실거리며 웃고 있으니 누구든 이상하게 볼 테다.
“아니, 아니야. 야, 한 번만 안아보자.”
“뭐?”
에이든은 기겁을 하며 놀랐다.
한번 안아보자는 게 그렇게 큰일인가.
“너 뭐 잘못 먹었냐…?”
종잇장처럼 얼굴을 구긴 에이든은 고개를 삐딱하게 숙였다.
“에휴, 됐다. 됐어. 내가 너한테 뭘 바라니.”
혹시라도 이것마저 꿈일까 봐.
네가 바람처럼 날아가 버릴까 봐.
그래서 한 번만 안아보고 싶었다.
“너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던 그는 그제야 걱정이란 걸 해주었다.
“됐네요.”
엘레나는 살짝 삐진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잡곤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슨 꿈인데 그래.”
가까워진 그의 눈동자 속엔 타오르는 태양이 담겨 있었다.
계속 보고 있으면 푹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냥… 이상한 남자랑 결혼하는 꿈.”
“결혼? 네가?”
“응. 근데 되게 별로였어. 잘생기긴 했는데 성격이 파탄 났거든.”
“아… 그래?”
에이든은 갑자기 심각하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눈에 힘을 팍 주고 삿대질을 했다.
“그 남자, 나보다 잘생겼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약간 당황스러웠다.
잘생긴 걸로 따지자면 비등비등한데.
그는 냉미남이었고 얘는 온미남이니까.
뭐, 취향으로 따지자면 그를 택할 것이다.
“응.”
“하, 참나.”
에이든은 팔짱을 끼고 미간을 심하게 찌푸렸다.
아마 자기보다 잘생겼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다는 거겠지.
“안 되겠다. 이리 와.”
그는 팔을 쭉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러곤 쫙 편 손바닥을 이마에 갖다 대었다.
“뭐 하는 거야?”
엘레나는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그에게 물었다.
“나쁜 꿈을 물리쳐 주는 마법.”
“허….”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걸 다 큰 성인한테 하다니.
얘도 참 정신세계를 들여다보고 싶다.
“눈 감아.”
“안 감으면?”
“감아. 얼른.”
엘레나는 입을 뾰족 내밀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는 조용히 이상한 주문을 읊조렸다.
“디스파레스트 르 모베 레브.”
“뭐야, 그건?”
“주문.”
이런 걸 믿는 사람이나 그걸 따라주는 사람이나.
둘 다 이상한 건 맞지만 성의를 봐서 잠자코 따라주기로 했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야?”
“쉿. 집중.”
그는 손을 말아 주먹을 쥐더니 이마에서 손을 뗐다.
궁금한 나머지 실눈을 뜨고 그가 무얼 하는지 훔쳐봤다.
에이든은 주먹을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대더니 다시 손바닥을 폈다.
“됐다.”
“됐어?”
“응. 이제 눈떠.”
사실 아까부터 뜨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해주었다.
왜 뜨고 있었냐며 노발대발할까 봐.
“어때, 좀 나아진 것 같지?”
“응, 그러네.”
별로 나아진 느낌은 없었지만 그냥 그렇다고 해주었다.
안 그러면 그렇다고 할 때까지 계속할 것 같았기에.
“대답이 성의가 없는데.”
“와! 너무 좋아! 기분이 말끔해진 것 같아!”
에이든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힐끗 바라보더니 뒤를 돌았다.
분명 혼자서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애도 아니고….”
“뭐?”
“아니, 고맙다고.”
“뭐, 별거 아닌데.”
아무래도 고맙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나 보다.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 그리고 이거.”
에이든은 등 뒤로 손을 뻗더니 웬 꽃을 꺼냈다.
“뭐야?”
갑작스러운 꽃 선물에 당황한 엘레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별건 아니고 그냥… 네 생각나서.”
“안젤로니아잖아….”
엘레나는 손가락을 들어 여린 꽃잎을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부드러운 꽃잎은 마치 구름을 만지는 것처럼 포근했다.
언제부터 이 꽃을 좋아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기억이 없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안젤로니아를 좋아했던 것 같은 느낌이랄까.
“고마워.”
이번엔 가짜가 아닌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매번 기억해주고 이렇게 꽃을 가져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정말로 감동받았다.
“이리 와, 이번엔 진짜 안아줄게.”
“야…!”
엘레나는 두 팔을 뻗어 그를 세게 안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따듯한 온기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근데 너 심장이 왜 이렇게 빨리 뛰어?”
“뭐? 아니, 그냥. 그냥 더워서 그래.”
“이상하다. 땀도 안 나는데? 잠깐 놔…!”
“아니.”
몸을 밀어내려 한 순간이었다.
에이든은 팔을 뻗어 그녀를 다시 품 안에 가두었다.
그것도 아까보다 더 세게.
“야… 너….”
“이대로, 가만히.”
괜스레 진지해진 듯한 분위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깐 그렇게 기겁하면서 싫어하더니 사실은 포옹 받고 싶었나 보다.
귀엽게.
“진작 그러지 아깐 왜 튕겼냐?”
“그러게. 진작 그럴걸….”
그는 읊조리듯 말하며 말끝을 줄였다.
서로 맞닿은 심장 소리에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야, 이제 놔…!”
“잠깐, 쉿.”
너무나도 평온하던 순간 저 멀리서부터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한 듯한 에이든은 천천히 숨을 죽이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저 숲으로 가자.”
이상하게도 에이든은 항상 말굽 소리만 들리면 그 자릴 피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그저 말이 무섭다고만 할 뿐이었다.
숲 속으로 숨은 그들은 숨죽여 소리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황실 기사단이야.”
황제파의 상징인 비둘기 문양을 한 황실기사단이 정찰을 나온 듯 풀숲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다행히도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단이 사라지자 에이든은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휴….”
“간 건가?”
“응. 갔…!”
“여기 숨어있었네?”
그때 소름 돋는 사내의 목소리와 함께 에이든의 멱살이 잡혔다.
“에이든!! 에이든!!!”
깜짝 놀란 엘레나는 토끼 눈을 하고 에이든을 잡아끌었다.
“에이든을 놔…! 어?”
눈을 깜빡이자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었다.
녹음이 진 수풀은 전부 사라지고 어두컴컴한 침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놀란 엘레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이리저리 주위를 살펴보았다.
익숙한 시계의 초침 소리가 똑딱거리며 귀를 거슬렸다.
“내가… 왜….”
“엘레나.”
고개를 돌리자 데카루스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꿈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에이든과 했던 모든 것들이 전부 꿈인 건가?
“이게 대체….”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에이든과 줄곧 함께 있었는데.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어나자마자 헛소리를 하는 엘레나의 모습이 조금 이상한 듯싶었다.
“이것도 꿈이야…?”
“엘레나.”
“당신이 여기 있으면 안 되지….”
엘레나는 고개를 흔들며 혼란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왜.
“에이든은…?”
“…….”
그는 그녀의 말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엘레나는 굴하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
“에이든 어딨어…?”
“당신 대체….”
“에이든 어딨냐고.”
“대체 무슨 소릴….”
“에이든 어딨냐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방 안 깊숙이 메아리쳤다.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떠는 모습이 무척 불안정해 보였다.
“에이든!!!”
“엘레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엘레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잡으며 숨을 헐떡거렸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에이든은? 에이든은 어디 있는 거야? 응?”
“엘레나, 당신….”
데카루스는 표정을 구기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모습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신이 그랬어…?”
“무슨 소리야.”
분명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에이든이 곁에 있었다.
이 모든 게 꿈이어야만 했다.
이 끔찍한 현실이 전부 거짓이어야 했다.
“그만 누워. 당신 상태가….”
“당신이 그랬지. 당신이 에이든을 없앤 거지. 그렇지!!!”
“엘레나, 그만.”
“당신이! 당신이….”
호수를 담은 푸른 눈동자에선 소나기가 내렸다.
동그랗게 떨어지는 눈물은 순식간에 하얀 잠옷을 적셨다.
쇳소리를 내며 처절하게 우는 그녀의 얼굴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과호흡이 올 정도로 숨을 헐떡거리던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고 입술을 꽉 물었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왜 또 당신인데. 왜 당신이 내 옆에 있는 건데!!!”
“…….”
지켜보다 못한 데카루스는 그녀를 품 안에 꼭 껴안았다.
너른 어깨에 꼭 안긴 그녀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꺽꺽거렸다.
“에이든이 또 사라졌어. 왜…. 왜 내게 소중한 것들은 항상 사라지는 거야… 왜….”
“…….”
신이 원망스러웠다.
신이란 존재는 왜 항상 시련만 주시는 걸까.
이 모든 것이 다 그의 뜻이라면 따르고 싶지 않다.
“에이든, 에이든 좀 구해줘…. 제발, 제발…. 카루스, 제발….”
“그래, 그럴 테니… 제발, 엘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