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순풍에 흩날리는 자그마한 꽃잎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들 사이를 아른거렸다.
분명, 분명 매일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사람이 앞에 있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를 만나면 꼭 해주고 싶었던 말들을 연습해 놨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이…든…?”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그를 불렀다.
심장은 고장 난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에이든이 그녀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걸음걸음엔 느려진 시간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엘레나.”
너무나도 익숙한, 그리워했던 목소리가 귓가에 사근거렸다.
꿈에서만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던 그가 지금 그녀 앞에 있다.
“꿈이… 아니지?”
엘레나는 고개를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응, 나야. 레나.”
레나, 그가 자주 불러주던 애칭.
그의 목소리에 이제야 조금씩 실감이 나는 것 같다.
허상이 아닌 진짜 에이든이다.
엘레나는 긴 팔을 뻗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에이든…!”
탁-
“잠깐.”
그는 순간 표정을 굳히며 그녀를 제지했다.
그에게 잡힌 팔목엔 시릴 만큼 차가운 기운이 돌았다.
당황한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아…!”
너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이곳이 대공저임을 까먹었다.
그가 어떻게 들어온 건지조차 확실치 않은데.
실수였다.
“이리 와.”
에이든은 잡은 손을 끌고 정원 내부에 있는 가보제로 향했다.
가보제는 정원과 멀리 떨어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좋기에 은밀한 얘기를 하는 덴 안성맞춤이었다.
“에이든, 조금만 천천히…!”
그는 이곳의 지리를 어떻게 아는지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강하게 잡힌 손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저릿했다.
엘레나는 마치 밧줄에 묶인 노예처럼 끌려나갔다.
“하아… 하아…!”
너무나도 빠르게 걸은 탓일까.
거친 호흡에 입이 말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심장과 폐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가보제에 다다르자 에이든은 급히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었다.
“레나, 괜찮아?”
그의 말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지만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새하얀 기둥을 잡고 거칠게 숨을 고르던 엘레나는 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 대체!”
에이든은 가보제에 도착하자마자 햇빛을 가리는 천막을 모두 내렸다.
그러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대체 이곳엔 어떻게 들어온 건지.
그리고 지금까지 무얼 하다가 온 건지.
머릿속은 정리가 되지 않아 뒤죽박죽이었다.
“에이든, 너 대체 어떻게…!”
“레나, 본론만 말할게.”
갑자기 변한 듯한 그의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됐다.
선생님처럼 무서운 표정을 한 에이든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난 에이든이 아니야.”
그의 말을 듣자마자 웃음이 먼저 나왔다.
에이든이 에이든이 아니라니.
갑자기 심각해진 얼굴로 장난이라도 치자는 건가.
“아… 진짜. 야, 지금 너 장난하는 거지? 진짜. 여기서까지…!”
엘레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한 말투엔 한기가 서렸다.
그는 진짜로 자기가 에이든이 아니라는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뭐야, 너… 왜 그래….”
엘레나는 꼭 무서운 이야기라도 들은 아이처럼 작게 목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오늘따라 그가 좀 이상해 보였다.
“너 어디 아파?”
제인이 아플 때 해줬던 것처럼 그의 이마에 손을 올리려는 순간, 다시 한번 그의 손아귀에 묶여버렸다.
“여기 아무도 안 봐. 괜찮….”
“엘레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야 해.”
“무슨….”
그는 잡은 손을 내리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확신에 찬 표정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여기서 난 더 이상 에이든이 아니야.”
“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엘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입 꼬리를 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말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 레나. 넌 오늘 날 못 본 거야. 그리고….”
이렇게 그가 떡하니 앞에 서 있는데, 이렇게 한눈에 그가 담기는데 보질 못했다니.
에이든은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엘레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내가 왜 널 못 봐? 네가 이렇게 앞에 서 있잖아. 근데 왜…!”
“레나, 내 말 좀 들어줘.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도착지가 없는 보드게임처럼 출발선만 뱅뱅 도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게 설명해….”
“레나….”
“나, 나 진짜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낮게 뛰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꼭 부정맥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몸 전체가 공명하는 것 같았다.
“하….”
그는 어깨를 잡고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웅변이라도 하듯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잘 들어, 더 이상 에이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 그리고 여기서 날 본 건 잊어야…!”
“장난치지 마.”
어이가 없었다.
사람 앞에서 장난질이나 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인 건가, 지금?
그와 대화를 할수록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장난이 아니…!”
“이게 장난이 아니면 뭔데? 너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야? 어? 날 봤으면 최소한 내 안부부터 물어야 하는 거 아니야?”
“엘레나. 제발…!”
에이든은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답답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엘레나는 입술을 꼭 깨물며 올라오는 화를 참았다.
“제대로 말해.”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그가 안심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하지만 그것 역시 오래가진 않았다.
“레나, 난….”
“제대로 말하라고, 에이든 밀러!!!”
정원을 울리는 큰 목소리에 모이를 먹던 새들이 놀라 달아났다.
그녀의 눈동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하염없이 흔들렸다.
엘레나는 그의 어깨를 잡은 채 숨을 크게 들이쉬곤 말을 이어 갔다.
“너 진짜 에이든 맞아?”
금발이 싫다며 매번 흑발로 염색했던 그,
어떠한 일에도 침착하게 일을 해결하던 그,
어느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던 그가 아니었다.
“레나… 제발…!”
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애원하듯 속삭였다.
“네 머리, 네 향기 그리고 네 말투까지. 전부 에이든이 아니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저 멀리까지 메아리쳤다.
흥분한 듯 숨을 헐떡거리던 엘레나는 고개를 저으며 울먹거렸다.
그러자 고개를 숙인 에이든은 눈을 꼭 감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나 에이든 아니야. 엘레나.”
“하…하하….”
코미디 영화를 볼 때 웃는 것과는 달랐다.
이건 웃겨서 나오는 웃음이 아닌 너무 황당해서 나오는 웃음이다.
엘레나는 입을 죽 찢으며 비소를 흘렸다.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가 잘게 부서졌다.
“에스텔 제국의 8황자, 노아 폰 제네우스. 이게 지금의 내 이름이야.”
“헛소리하지 마….”
그는 엘레나를 단숨에 끌어당겨 품 안에 가득 채웠다.
그의 너른 가슴에 힘없이 안긴 그녀는 어이가 없는 듯 실소했다.
“오늘 넌 여기서 날 못 본 거야. 혹 이따가 식장에서 날 본다고 해도 절대 아는 척하지 마.”
“너 약 먹었어? 아님 술이라도 잔뜩 마신 거야? 대체 왜 이래…? 어?”
“레나.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여긴…!”
“너 진짜 이상해….”
속이 답답했다.
가슴속에 큰 돌덩이가 들어찬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헛웃음이 나와 얼굴 근육이 당겼다.
화가 난 듯한 엘레나는 어깨를 뿌리치며 소리 질렀다.
“내가 납득할 수 있게 말해. 황자는 뭐고, 이름은 왜 노아인지…. 제대로 말해. 당장…!”
“레나….”
그녀는 어지러운 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테이블을 짚었다.
“아니… 아니야….”
입꼬리가 찢어질 것처럼 웃는 그녀의 모습은 잘 만들어진 피에로 같았다.
에이든은 넘어질 것 같은 그녀를 잡아끌며 품에 껴안았다.
“삼 일 뒤, 해가 지기 전에 광장으로 나와. 꼭. 모든 걸 설명해줄게.”
“에이든! 에이든!”
재회의 기쁨을 나눌 새도 없이,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그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기둥을 잡고 선 채로 그저 가시에 찔려 피 묻은 손가락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이든을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의 생각에 몇 날 며칠을 지새운 적도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고 가면 대체 어쩌자는 거야, 에이든.
“에이든….”
“아가씨! 아가씨!!!”
혼란스러움도 잠시 시종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결혼식 날에 신부가 사라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
마음이 이렇게나 아픈데.
춤추는 마리오네트처럼 연극을 할 시간이 다가왔구나.
“아가씨! 이제 곧 식장에 들어가 보셔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대체 뭘 하고 계셨어요! 한참을 찾았습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시종들이 입으로 무언가를 막 말하는데 꼭 혼자만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나, 아가씨. 드레스는 왜 또 이렇게…!”
시종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걸까.
가슴이 울렁거려 구역질이 올라왔다.
머리는 돌덩이에 맞은 것처럼 찡하게 울렸다.
“아….”
털썩-
“아, 아가씨!!!”
휘청거리던 몸은 무거운 추가 떨어지듯 바닥에 고꾸라졌다.
주위에 있던 시종들은 놀라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부축했다.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