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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32화 (32/117)

32화.

결혼식 당일.

반건조 오징어처럼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엘레나는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아침 새벽부터 몸을 죽어라 흔드는 바람에 정신이 깨긴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아침도 아니고 컴컴한 새벽부터 사람을 깨우다니, 이건 반칙이다.

어제 데카루스가 하도 건드리는 탓에 안 그래도 제대로 잠을 못 잤는데 제인마저 힘들게 한다.

“아가씨, 일어나셔야죠.”

화난 고양이처럼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그녀는 입을 쭉 내밀었다.

“싫어….”

제인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린 그녀는 침대에 붙어 도통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 결혼하기 싫어…. 제인, 나 좀 살려줘….”

그녀는 베개를 푹 뒤집어쓰곤 얼굴을 가리며 애원했다.

얼마나 결혼이 하기 싫었는지 죽고 싶다고 시위를 했다.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것도 모자라,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썼다.

하지만 그것에 굴할 제인이 아니었다.

“아가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결혼도 오늘이 딱 적기랍니다?”

“뭐? 제인, 결혼이 아무 때나 할 수 있으면 하는 애들 장난이야? 난 싫다고….”

제인은 크게 한숨을 쉬곤 어쩔 수 없다는 듯 침대에 딱 붙어있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대공님은 벌써 나가셔서 준비 중이시랍니다. 아가씨도 지금부터 준비하셔야 본식 시간에 맞추죠.”

“걔는 뭔데 이런 날까지 성실하고 난리야!”

“아가씨!”

제인이 몸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녀의 몸은 기다란 고양이처럼 쭈욱 늘어났다.

바람에 날리는 수건처럼 펄럭대던 엘레나는 결국 그녀에게 끌려가 결혼식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제국식 결혼 준비법에 따르면 신부는 몸을 단정하고 깨끗이 한다는 의미로 목욕을 한다고 한다.

“뭔 놈의 목욕이야.”

이곳에 온 첫날처럼 목욕물엔 장미 향이 나는 세욕제와 마유가 풀어져 있었다.

엘레나는 희끄무레한 물의 온도를 살펴보기 위해 손가락을 살짝 넣었다.

일렁이는 물은 파도처럼 잔잔했다.

“어쩌냐. 내 마음은 이 물 같지가 않은데.”

걱정이 앞서는 건 사실이었다.

결혼을 앞둔 여자들의 마음이 모두 이런 것일까.

사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괜찮다고, 이까짓 저택 따위 돈만 모아서 탈출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또 결혼을 하면 펼쳐질 새로운 세상이 두려웠다.

아이를 가지자고 하는 건 아닌지, 정말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여러 복합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한꺼번에 몰아쳤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엘레나는 새하얀 욕조에 팔을 걸치고 확 트인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울창한 숲속에선 왠지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 꿈은 저기에 있는데 내 몸은 왜 여기에 있을까.”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탄스러웠다.

엘레나는 애꿎은 물을 첨벙대며 화풀이를 했다.

그새 물이 눈에 튀어 고생깨나 했다는 건 그녀만의 비밀이다.

“에잇!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조를 빠져나갔다.

적당히 들어가고 나온 허여멀건 여체는 따사로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제인, 나 다했어.”

옷매무새를 갖춰 입고 제인을 부르자 미닫이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가씨, 이리 오세요. 머리 손질과 화장해 주실 분들이 오셨어요.”

“으응….”

축 늘어진 엘레나는 시체처럼 흔들거리며 걸었다.

아무래도 맥 빠지는 이 기분을 참을 수가 없어 몸으로라도 발산해야 했다.

“아! 가! 씨! 곧 대공 부인이 되실 분이 정숙하게 걸으셔야죠!”

“너무해….”

제인은 예절 선생답게 올곧았다.

허리를 굽히면 다가와 허리를 꼿꼿이 펴주었고 팔자로 걸으면 엄지에 힘을 주어 걸으라고 야단했다.

“에휴….”

자리로 돌아가니 방이 시장 바닥처럼 어지러웠다.

드레스가 걸린 거치대는 물론이거니와 100여 가지가 넘는 액세서리들 그리고 화장대 앞을 꽉 채운 화장품까지.

장사하러 온 줄 알았다.

“여기 시장 아니지…?”

“쉿, 아가씨. 그런 말은 이분들께 실례예요!”

제인이 가리킨 곳에는 진하게 화장한 살집 있는 여자와 지나치게 높은 머리를 한 빼빼 마른 여자가 있었다.

엘레나는 순간 고깔 모양 과자가 생각나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안녕하십니까, 영애. 오늘 아가씨의 헤어와 드레스 총괄을 맡은 델라.”

“델리입니다.”

“반가워요. 델리, 델라. 혹시… 두 분께서는 쌍둥이신가요?”

몸집은 달라도 오목조목한 얼굴이 닮은 게 꼭 쌍둥이 같았다.

그러자 델리, 델라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입을 가리곤 깔깔거리며 웃었다.

“맞습니다, 아가씨. 눈썰미가 참 좋으시네요. 제가 더 낫죠?”

“아니요. 이 델라가 훨씬 예쁘답니다, 아가씨. 그렇지요?”

티격태격 싸우는 그녀들의 모습은 꼭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았다.

또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귀족 영애처럼 우아하게 말했다.

“두 분 다 아름다우시답니다.”

“어머, 상냥하기도 하셔라.”

두 자매는 손을 맞붙잡고 그녀에게 사랑에 빠진 것처럼 교태를 흘렸다.

그 모습에 당황한 제인은 손뼉을 치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자자, 시간이 촉박하니 얼른 시작해주셔야 합니다.”

화장과 머리를 받는 건 꽤나 지루했다.

에전에 한번 샵에서 헤어 메이크업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더 지루했다.

이곳은 헤어 도구나 화장품이 아직 크게 발달하지 못해서 그런지 모든 게 다 느렸다.

왜 제인이 새벽에 깨웠는지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자, 아가씨 눈을 감으세요. 어머! 그렇게 눈을 뜨시면 안 되십니다!”

“아가씨! 머리를 꼿꼿하게 펴주세요. 네- 그렇게요.”

엘레나는 꼭두각시가 된 것처럼 그들의 주문에 따라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갑작스레 몰려오는 피로감은 그녀들 때문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서너 시간이 지났을까.

잠이 들려는 찰나 델리, 델라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어머나,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세요!”

그녀들은 아이돌을 보는 소녀팬들처럼 귀청이 찢어지도록 꺄악거렸다.

천장을 찌를 듯한 높은 목소리에 귀를 막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닌 걸 알기에 꾸욱 참았다.

“예쁘면 얼마나 예쁘다고….”

구시렁거리던 엘레나는 뒤를 돌아 거울을 보았다. 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왜? 너무 예뻐서!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세요…!”

제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어린 어깨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거울에 비친 그녀는 여느 귀족 영애보다도, 아니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미녀들을 압살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녀린 여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순백의 드레스는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혀 찬란하게 빛났다.

가슴과 등이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는 누드톤 원단으로 더 부드러워 보였고, 전체적으로 화려한 레이스 겉감을 덧대어 요정스러운 느낌이 났다.

“이게 나야…?”

살짝 땋아 로우번으로 묶은 머리는 드레스에 맞게 단정했고 앞으로 흘러나온 잔머리는 얼굴을 살짝 가려 여리여리한 분위기를 풍겼다.

“네, 아가씨. 너무 예쁘십니다. 정말로요.”

“제인, 나 너무 예쁜데?”

확실히 다른 사람 같았다.

원래도 새하얀 얼굴에 분을 발라서인지 마치 인형처럼 뽀얬다.

그리고 꽃을 갈아 만든 블러셔로 물든 볼은 분홍빛으로 생기가 돌았다.

“이런 건 셀카를 찍어야 하는데….”

누가 카메라 발명 같은 거 안 해주나?

이 한 번뿐인 기회를 이렇게 놓쳐버리다니.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라도 남겨놓고 싶었다.

“네? 셀…카요?”

“아니! 그냥 너무 예쁘다고, 오늘.”

활짝 웃으며 화답하는 그녀의 미소는 싱그럽게 빛났다.

이리저리 거울을 보던 엘레나는 뒤에 서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델리, 델라. 수고했어요. 덕분에 오늘 결혼식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머, 아가씨. 친절하기도 하셔라. 행복한 신혼 되시길 바라요.”

델리, 델라는 특유의 제스처와 말투로 그녀에게 예를 차린 뒤 문밖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엘레나는 이내 걱정스러운 투로 제인에게 말했다.

“나 잘할 수 있을까, 제인.”

“그럼요, 아가씨. 제가 멀리서라도 지켜보고 있을게요.”

제인이 후작 영애라고 해도 이 저택의 시녀로 속해있기 때문에 결혼식엔 참여하지 못한다.

살짝 서글픈 기분이 감돌았지만 이제 와서 바꿀 순 없는 노릇이니까.

“나 잠시 정원에 좀 다녀올게. 머리가 아파서.”

“네, 그러세요. 아가씨.”

졸면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은 탓에 아무래도 정신을 좀 차릴 필요가 있었다.

또 그와 식장을 함께 걸을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기도 하고 말이다.

* * *

답답한 마음을 식힐 겸 빨간 장미가 한창인 정원으로 향했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탓에 걷기조차 힘들었지만 그것에 질 엘레나가 아니었다.

“결혼이라니….”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한 여성들의 마음이 이렇구나.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의 결혼이라니.

한숨을 푹푹 내쉬던 엘레나는 화려하게 핀 장미를 바라보았다.

“너도 나처럼 화려하게 폈지만 자유롭진 않구나.”

정원에 핀 장미는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아름답고 예쁘게 핀 장미는 겉으론 아름다워도 정원에 묶여 자유로이 세상을 즐길 수 없으니 말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미꽃잎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새빨간 꽃잎은 부드러우면서도 연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꽃잎을 매만지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나.”

바람을 타고 흘러온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낮고 차분한 사내의 목소리.

데카루스의 것이 아니었다.

순간 목이 메어 숨을 쉬는 법조차 잊고 말았다.

가팔라진 호흡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가시에 찔린 손가락에선 새빨간 피가 흘렀다.

시간은 멈춰 세상에 그와 그녀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가슴에 양손을 얹은 엘레나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에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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