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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31화 (31/117)

31화.

“…뭐?”

노아는 얼어버린 눈사람처럼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나 어릴 적 친했던 형과 동생이 결혼한다니 믿기지 않는 것일까.

“엘레나. 내일 나와 혼인하는 사람.”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입가에 잔주름을 만들며 웃어 보였다.

“형이… 엘레나와 결혼을 한다고…?”

그는 끊긴 비디오처럼 부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그게 무슨….”

삽시간에 굳어버린 그의 표정에선 한기가 느껴졌다.

데카루스는 당황한 노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꼭 잡으며 차분히 말했다.

“지금은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나중에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야, 노아.”

“하…. 하하…하….”

그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젖히며 미친 사람처럼 실없이 웃어댔다. 그러곤 이내 고장 난 인형처럼 멈춰 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노아는 떨리는 고개를 바로잡고 데카루스와 시선을 맞추었다.

“…장난하는 거지?”

순식간에 뒤틀린 그의 표정은 한겨울에 핀 얼음꽃처럼 차가웠다.

“형,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노아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

“엘레나는 황태녀야. 제국을 이끌어야 할 황태녀. 아직 황위에도 오르지 않았다고. 근데 결혼?”

“노아, 그건….”

“게다가 왜 아직까지 대공저에서 머물고 있는 건데? 설마 형 황제의 정실을 노리는 거야? 대공이란 사람이?”

“노아.”

데카루스는 깊게 들이켠 숨을 푹 내쉬곤 곧장 이야기를 이어 갔다.

“네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어.”

“뭔데, 그게 대체.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봐.”

흥분한 노아의 눈빛은 바퀴 빠진 마차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엘레나는 너처럼 납치되거나 버려진 게 아니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분명 그때 황궁에서는…!”

“황궁에서 버렸어.”

“…뭐?”

눈동자의 떨림이 멈추자 노아는 종잇장처럼 얼굴을 구겼다.

그러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돌리며 입을 뗐다.

“황궁에서 왜 엘레나를 버려. 말이 되는 소릴…!”

“아직 정확하지 않아. 하지만 그 증거들이 있어. 황궁에서 엘레나를 버린 증거.”

“이거… 믿어도 되는 사실이야?”

“그래, 내가 네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데카루스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하… 이게 대체 무슨….”

그의 눈동자는 갈 길 잃고 허공에 맴돌았다.

그러자 이내 어지러운 듯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렸다.

“노아.”

데카루스는 그의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하며 부축했다.

“아니, 형. 나 괜찮아…. 그래서, 그래서 여전히 대공저에 머무르고 있는 거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래, 맞아.”

노아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갈게. 꼭. 엘레나를 만나야겠어.”

노아는 기백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데카루스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근데 엘레나가 널 기억할 수 있을진 모르겠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는 한 번에 많은 충격을 받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엘레나는 일곱 살 이전의 기억이 아예 없어. 심지어 나조차도 못 알아보더군.”

“뭐…?”

“그래서 아마 너도 알아보지 못할 거야.”

노아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얼떨떨한 듯했다. 힘없이 고개를 떨군 모습에 데카루스는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노아, 너 괜찮아?”

“응, 괜찮아. 걱정하지 마.”

노아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눈빛은 원석처럼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형. 아깐 미안했어. 내가 흥분해서….”

“됐어. 그런 거 가지고.”

데카루스는 조금 야윈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안심시켰다.

노아는 한참 동안을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마른기침을 하며 그를 향해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 이제 좀 쉴게. 힘들다. 형, 와줘서 고마워.”

“그래. 몸이 안 좋으면….”

“아니, 절대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가 봐. 내일 꼭 갈게.”

어디가 많이 아픈 듯 억지로 애써 웃으려는 모습이 가여워 보였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그의 모습에 지금이라도 자리를 비켜주는 게 예의인 듯했다.

“그래.”

데카루스는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곤 방을 빠져나갔다.

쾅-

그가 나가고 한참이 지난 뒤 노아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오랫동안 앉아 짓눌린 가운엔 자국이 남아있었다.

노아는 비소를 흘리며 테이블에 놓여있는 브랜디를 들었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그는 술로 가득 찬 술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술잔 위로 넘실대는 술이 위태로운 그의 상태를 방증해주는 듯했다.

쨍그랑-

그는 들고 있던 술잔을 있는 힘껏 내던졌다.

산산조각이 난 유리 조각들은 처량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형 뜻대로 가만히 놔두진 않아….”

* * *

“오월의 신부네….”

몇 분째 푹푹 한숨만 쉬던 엘레나는 애꿎은 각설탕을 티스푼으로 쪼갰다.

탁-

그래, 각설탕이 쪼개질 리가 없었다.

힘없이 날아간 각설탕은 마치 그녀 자신의 모습처럼 비참해 보였다.

“각설탕처럼 내 인생도….”

창밖으로 본 본관 로비와 분수대 주변은 온통 결혼식 꽃장식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뉴월 바람에 흩날리는 하늘하늘한 레이스 천은 도리스 양식의 기둥에 묶여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식장 곳곳은 와일드룩, 줄리아, 블랙티 등 다양한 장미로 장식되어 더욱 화려하고 우아해 보였다.

“내가 내일 저길 걷는구나….”

엘레나는 등허리를 푹 숙인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결혼의 ‘결’ 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아니, 기역 자조차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자유.

자유를 갈망하며 살아왔다.

그녀 인생에는 항상 족쇄가 걸려있었기에.

그런데 이 망할 결혼이라는 족쇄가 또 발목을 죄려 한다.

“그냥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순간 엘레나의 눈은 반짝하고 빛났다.

그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참을 서 있더니 다시금 의자에 앉았다.

“어차피 걸릴 게 뻔하지 뭐. 시계탑까지 쫓아오는데.”

그녀는 머리가 아픈 듯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결혼만 하면 아주 그냥…! 떠나고 말 테다….”

허공에 대고 크게 외치던 엘레나의 눈에 단정히 걸려있는 드레스가 보였다.

차르르 흘러내리는 웨딩드레스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잔뜩 박혀있어 반짝반짝 빛났다.

“드레스는 또 끝내주게 예쁘네… 내가 만든 거라 그런가?”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드레스 앞에 다가가 조심스레 원단을 만져보았다.

“아마 내일 햇빛을 받으면 더 예쁘겠지.”

한참을 드레스 앞에 서 있던 엘레나는 뒤를 돌아 창문을 바라보았다.

캔버스처럼 널찍한 푸른 하늘엔 붉은 물감이 옅게 뿌려져 있었다.

일직선으로 뻗은 새들의 비행은 노을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끼익-

멍하니 창을 바라보던 순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데카루스 아니면 제인일 테지.

일말의 기대를 품고 뒤를 돌아본 순간, 역시 제복을 갖춰 입은 데카루스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오늘따라 조금 달라 보이는 분위기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노을에 반짝이는 붉은 눈은 새삼스레 예뻐 보였다.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언뜻 심장이 쿵 했다.

“빤히 쳐다보는 덴 이유가 있을 텐데.”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운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시계 소리에 맞춰 울려 퍼지는 그의 구두 굽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아니, 그냥. 뭐… 그럴 수도 있지.”

당황한 엘레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민망한 얼굴을 숨겼다.

“정말 그냥?”

이미 가까워진 그들의 사이는 멀어질 수 없었다.

그의 품에 안기자 목덜미에선 진한 머스크 향이 풍겨왔다.

“응, 그냥.”

어깨 위로 떨궈진 머리는 천천히 그녀를 간질였다.

“왜 이래. 새삼스럽게.”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따듯한 입김이 예민한 살에 맞닿았다.

“그냥. 내일이 당신과의 결혼이잖아.”

목 끝을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관능적인 목소리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당신은 좋겠네. 나랑 결혼해서.”

“응, 좋아.”

여린 목덜미에 마주 닿은 입술이 촉촉하게 도장을 찍었다.

“당신이라서.”

“참나.”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린 엘레나의 얼굴은 이미 벌게져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스킨십은 더욱더 진해졌다.

“당신도 좋아?”

“좋겠어?”

그녀의 말에 심술이 난 듯한 데카루스는 여린 살을 살짝 깨물었다.

“좋을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

“이렇게 잘생긴 신랑인데, 안 좋을 리가.”

그의 당당함에 살짝 벌어진 입가로 비소가 삐져 나왔다.

아무래도 이 인간은 자아 만족을 뛰어넘은 자아 팽창인 게 틀림없다.

“됐어, 옷이나 갈아입어.”

그는 콧바람을 내쉬며 살짝 웃더니 이내 그녀를 풀어주었다.

엘레나는 그를 한번 흘겨보곤 다시 티테이블에 돌아가 앉았다.

“내일 노아가 오기로 했어.”

“뭐? 그가?”

그녀는 당황스러운 듯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카루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뾰족한 행거 위에 겉옷을 걸었다.

“궁금하다. 어떤 사람인지.”

“당신도 이미 알고 있어.”

“뭘?”

“보면 알지도.”

아무래도 이 인간은 못 알아듣게 말하기 선수인 것 같다.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있어야지.

엘레나는 표정을 한껏 구긴 채 그를 바라보았다.

“내일 많이 바쁠 거야. 그러니 일찍 자도록 해. 잠 못 잤다고 또 칭얼대지 말고.”

그는 그녀가 앉아있는 티테이블 쪽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이리 와.”

그는 의자를 살짝 뒤로 뺀 뒤 있는 힘껏 그녀를 껴안아 침대 쪽으로 향했다.

털썩-

그러곤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레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몸을 편안하게 감싸는 이불이 포근한 꽃잎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난 씻어야 해. 먼저 자고 있어.”

“응.”

“눈 감아.”

짙은 그의 목소리에 따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따듯한 손길이 눈꺼풀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혹시 그의 손엔 마법 가루가 뿌려져 있는 걸까.

엄마가 불러주는 자장가처럼 천천히 졸음이 몰려왔다.

그녀가 잠든 걸 확인한 데카루스는 천천히 손을 떼었다.

그는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볼록한 이마에 입술을 살짝 맞춘 뒤 나지막이 속삭였다.

“편히 주무시길. 사랑스러운 황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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