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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30화 (30/117)

30화.

얄궂게 눈가를 콕콕 찔러대는 햇살이 잠을 깨웠다. 이불을 덮어쓰려 했지만 무언가에 걸려 당길 수가 없었다.

“으음….”

가슴에 큰 돌덩이가 얹어진 느낌에 팔을 휘저었다.

때마침 손끝으로 느껴지는 터럭은 강아지 털처럼 부드러웠다.

“이 집에 강아지가 있었나….”

아직도 비몽사몽간인 엘레나는 부드러운 강아지 털을 쓰다듬으며 슬며시 눈을 떴다.

“뭐야.”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데카루스의 얼굴에 적잖이 당황한 그녀는 얼음처럼 굳었다.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길고 새카만 속눈썹이 바비 인형처럼 예뻤다.

게다가 잠을 자고 있어도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엘레나는 눈을 비비며 더 자세히 그를 바라보았다.

“뭐, 잘생기긴 잘생겼네….”

손가락을 뻗어 그의 날렵한 콧대를 따라 천천히 선을 그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만져본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탁-

그 순간 그의 손이 얼굴을 훑던 손가락을 빠르게 낚아챘다.

당황한 엘레나는 황급히 뿌리치려 했지만 그의 악력은 이길 수가 없었다.

“뭐, 뭐야. 안 잤어?”

하지만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몰래 그를 만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평생 놀림감이 될 것이다.

게슴츠레 뜬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루비처럼 빛났다.

방금 깬 듯한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거기 말고.”

순식간에 그의 손은 그녀를 이끌어 셔츠 속 단단한 가슴으로 향했다.

“여긴 어때.”

손끝으로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사내의 몸에 마음속에선 이상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적잖이 놀란 엘레나는 손을 홱 들어 올렸다.

“아…!”

그와 동시에 데카루스는 가녀린 팔목을 잽싸게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거대한 사내의 몸 위에 안착한 엘레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 하는…!”

그는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얄궂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이런 걸 더 즐기잖아.”

허리에 휘감긴 손이 몸을 더 단단히 고정했다.

벗어나려 했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와 닿은 몸은 단단한 족쇄에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상한 소리라.”

그의 입술은 조막만 한 귓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부드럽게 스치는 살결에 엘레나는 움찔하며 눈을 꼭 감았다.

“아….”

낮게 퍼진 외마디 신음에 그는 짓궂게 웃으며 도톰한 입술을 어루만졌다.

“이런 소리를 말하는 건가.”

그는 능구렁이 같은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볼을 쓸어내렸다.

위험을 감지한 엘레나는 고개를 홱 돌려 그를 피했다.

그는 작은 반항이 귀엽다는 듯 여린 몸을 더 단단히 조였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입술 사이로는 뜨거운 호흡만이 감돌았다.

“난 이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야.”

“놔…!”

능글맞은 말투에 당황한 엘레나는 붙잡힌 손을 뿌리치며 그에게서 벗어났다.

보조개가 예쁘게 팬 그의 얼굴은 사람을 홀리는 여우처럼 매혹적이었다.

“아쉽네.”

그는 먹이를 앞에 둔 짐승처럼 입맛을 다셨다.

그러곤 한 손을 들어 천천히 구겨진 셔츠 단추를 풀어나갔다.

“뭐, 뭐, 뭐 하는 거야.”

엘레나는 이미 맛이 간 듯한 그의 표정에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반쯤 풀린 단추에 사내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관능적인 그림에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듯했다.

그러자 그는 조소를 지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난 그저 셔츠를 갈아입을 생각이었는데. 당신은 다른 걸 원하나 보네.”

볼을 스친 손가락이 앙증맞은 입술에 닿았다.

몸은 본능적으로 그의 손길을 피했다. 손가락은 목을 타고 쇄골로 흘러내려 갔다.

“더 놀아주고 싶었는데.”

그는 고개를 쭉 내밀고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툭 튀어나온 쇄골에 닿은 손끝이 그녀를 간질였다.

“아쉽지만 나중에.”

그는 넋이 나간 그녀의 코끝을 톡 치곤 살며시 웃어 보였다.

그새 정신이 든 엘레나는 온기가 남은 코를 만지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

침대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엘레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남편이 하는 일에 관심이 생긴 건가?”

그는 새 셔츠를 입으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만약 남자 서큐버스가 있었다면 아마 그것은 데카루스였을까.

그의 고혹적인 표정은 마치 기방의 기녀 같았다.

“빨리 옷이나 갈아입어.”

엘레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았다.

귓가엔 빳빳한 셔츠가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가 감돌았다.

“황궁에 가. 노아를 만나야 하거든.”

“노아?”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엘레나는 다시 등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응, 내 동생.”

“아….”

그가 전날 밤 갑자기 돌아왔다던 그 사촌 동생을 말하는 것이었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깔끔한 모습을 한 데카루스는 그녀의 앞에 다가왔다.

“사고 치지 말고.”

쪽-

그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그녀의 이마에 살며시 입맞춤했다.

놀란 엘레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손으로 이마를 비볐다.

“다녀올게.”

엘레나는 그가 사라진 문 앞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수에 젖은 듯한 그녀의 푸른 눈빛은 바다처럼 맑았다.

“뭐야, 진짜….”

* * *

에메랄드 궁.

여느 때처럼 고요한 에메랄드 궁은 삼엄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당당히 뚫고 거친 구둣발 소리를 내며 돌진하는 이가 있었으니.

“비켜.”

방 앞을 막아선 기사들은 감히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데카루스는 철옹성 같은 그들의 견제에 어이가 없다는 듯 조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멍청한 건지 아님 멍청한 척을 하는 건지.”

싸해진 그의 표정에 궁 안은 한기가 도는 것 같았다.

당황한 기사들은 서로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봤다.

“예…예…?”

“데카루스 드 스큘러스.”

“아! 아. 죄, 죄송합니다!!!”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가로막던 창을 허겁지겁 거두는 꼴이 우스웠다.

마음 같아선 칼로 단숨에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노아를 만나기 전 피를 묻히는 건 원치 않았다.

“운 좋게 생각해.”

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 보곤 직접 방문을 열었다.

끼익-

가벼웠던 문은 마치 철문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장성한 노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아직도 어린아이 같을지.

또 만나면 어떤 말을 가장 먼저 해줘야 할지.

여러 생각이 들었다.

“형…?”

문을 연 순간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백금발의 장성한 사내가 보였다.

울먹거리는 눈빛을 보아하니 분명 그가 알던 노아가 맞다.

사내는 천천히 일어서 고개를 떨며 그에게 다가갔다.

“형…형 맞아?”

“노아….”

“형!”

잠옷 차림의 노아는 빠르게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밝게 빛나는 머리를 비비는 꼴이 꼭 귀여운 햄스터 같았다.

데카루스는 떨떠름한 듯 그를 안지 못하고 그저 밀랍 인형처럼 서 있었다.

“너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조금은 화가 난 듯한 데카루스의 목소리에 노아는 의아한 듯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형….”

“말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당장 말해.”

그는 노아의 팔을 세게 잡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흥분한 듯한 그의 얼굴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아…!”

노아는 꽉 쥐어 잡힌 팔이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뿌리쳤다.

“형, 왜 이렇게 변했어…? 형이 낯설어.”

노아는 입가를 찡그리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데카루스는 깊게 들이켠 숨을 내쉬며 그를 침대로 안내했다.

“아니, 아니야.”

“형에게 해줄 얘기가 많아.”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짓던 노아는 이내 밝게 웃어 보였다.

“그래, 천천히 얘기해.”

“다 얘기하면 형 오늘 집에 못 갈 텐데.”

노아는 침대 위에 앉아 그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었다.

그동안 못다 한 인사라도 하는 듯 그의 품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아홉 살 땐가. 내가 사라졌잖아.”

“응, 그렇지.”

“근데 그때 이후로 기억이 없어.”

“…뭐?”

노아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일단 기억을 잃었다는 것 자체가 납득이 안 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데카루스는 종잇장처럼 얼굴을 구겼다.

그러자 노아는 괜찮다는 듯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너무나도 평온한 듯한 노아의 모습은 조금 이상했다.

“눈을 뜨고 일어나 보니 어두컴컴한 배에 내가 실려있었어. 선원의 말을 잠깐 들었는데 불법으로 노예들을 태운 배더라.”

“불법 노예상이라면….”

분명 그가 몇 주 전 습격한 범선이다.

데카루스는 노아의 손을 꼭 잡고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난 널 본 적이 없어. 대체 어떻게….”

“어머니께 들었어. 형이 습격한 범선이라며. 뭐, 사람이 워낙 많았잖아. 그리고 검은 머리였고. 당연히 못 볼 수도 있어.”

노아는 괜찮다는 듯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데카루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대체 정예병들은 뭘 했길래…!”

“쉿, 형. 우리 좋은 얘기만 하자. 나 이제야 돌아왔잖아.”

여전히 밝은 미소를 짓는 노아는 그의 입을 막아서며 이야기를 돌렸다.

너무나도 태평한 그의 모습이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데카루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엘레나는 기억나지? 엘레나도 내가 그곳 경매장에서 데려왔어.”

“엘레나가… 살아있어?”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늘 미소만 띠던 얼굴은 순식간에 먹구름 낀 하늘처럼 어두워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풍선처럼 떨리는 눈빛이 애처로웠다.

그래, 노아는 모를 수밖에 없다.

그가 사라지기 전 엘레나 역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으니까.

“그래. 지금 대공저에서 머물고 있어.”

노아는 가슴을 부여잡고 크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금세 신이 난 듯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그의 모습에 데카루스는 미소를 지었다.

“하, 다행이다. 형이 엘레나를 살렸구나…. 고마워, 정말.”

연신 감사 인사를 하던 노아는 그의 품에 폭 안겼다.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눈부신 태양처럼 반짝거렸다.

그때 데카루스는 무언가 생각난 듯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아, 내일 나 혼인해. 널 꼭 초대하고 싶었어.”

“뭐? 그런 일이 있으면 빨리 말해줬어야지. 어느 집안 영애야?”

화들짝 놀란 노아는 그의 두 손을 맞잡고 형형한 눈빛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 역시 노아의 눈을 부드럽게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엘레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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