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29화 (29/117)

29화.

거대한 검은 천으로 드리워진 새카만 밤.

별빛은 찬란하게 반짝여 길 잃은 자의 가로등이 되어 주었다.

푸른 은하수 아래 비처럼 내리는 별빛들은 찬란히 반짝였다.

“여기 하늘은 한국보다 예쁘단 말야.”

매일 밤하늘을 보는 게 그녀의 낙이었다.

맑은 공기 탓일까.

캄캄한 서울의 하늘과 다르게 제 몸을 태워 빛을 내는 작은 별들이 무수했다.

“에이든도 같이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자유로웠던 과거엔 풀밭에 누워 그와 맑은 밤하늘을 보며 수다를 떨곤 했다.

풀벌레들의 노랫소리와 하늘을 수놓던 반딧불이는 여전히 잊지 못하는 추억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도 그때가 생각난다.

고요하던 어느 날 밤, 에이든과 함께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던 시절.

강가에 핀 버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와 여름밤의 시원한 공기.

눈을 감아도 환할 것 같이 반짝이는 별들.

이 모든 게 완벽했다.

‘엘레나, 우리 평생 이렇게 살 수 있겠지?’

‘말이 되는 소릴 해. 평생을 어떻게 사냐?’

‘아니, 말이 그런 거지. 누가 평생 산대? 말귀 못 알아듣는 건 아주….’

‘뭐? 너 내 욕 했냐?’

우리는 풀밭을 구르며 서로를 잡아먹으려 안달이었다.

뭐, 때리진 않았지만 질세라 으르렁거렸지.

‘야, 내려와라.’

‘싫어. 네가 사과할 때까지 안 내려가.’

‘하, 참나, 이게 사과할 거리야? 나처럼 바다 같은 마음씨를 가져야…! 아! 왜 때려!’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리지. 그냥 때리겠어?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아…!’

그때 에이든은 힘으로 몸을 돌려 상황을 역전시켰다.

예전엔 조그맣던 게 언제 또 남자가 되었다고 이렇게 힘을 쓰는지.

‘뭐 하자는 거야. 내려와.’

‘네가 먼저 그랬으니까 나도 해 보려고. 느낌이 어떤가.’

‘난 이렇게 안 했어. 놔, 이거.’

그와의 거리는 너무 가까워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팔목은 잡은 적이 없는데 치사하게 팔목을 잡다니.

‘그러니까 까불지 말라고. 다 이 오빠가…!’

‘오빠는 무슨. 그런 말 하지 좀 마. 여자들이 싫어해.’

‘여자?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살다가 늙어 죽을 거야? 난 잘생긴 남자 좀 만나보고 싶다.’

‘그걸 왜 멀리서 찾아.’

그는 매번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다른 여자 눈엔 몰라도 내 눈엔 영 별론데 말이다.

‘넌 내 취향 아니야.’

‘내가 취향이 아닐 수가 있어? 다른 여자들은 나만 보면 달려들던데.’

‘하… 참나.’

에이든은 자기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뭐, 눈 크고 코 높고 피부 하얗고 머리도 금발에 눈도 금안….

미소년의 정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그렇게 한참을 그의 밑에 누워있던 순간, 에이든은 이상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넌 결혼 못 해. 내가 평생 안 놔줄 거니까.’

마음을 읽어낼 순 없었지만 왠지 눈빛엔 진심이 어려있는 것 같았지.

‘평생 안 놔주긴, 개뿔. 너 장가보내는 게 내 목푠데.’

살림까지 쫙 차려놓고 알콩달콩 사는 모습까지 볼 거다.

또 언제 어디서 죽을지, 아니면 빙의할지 모르니까.

그가 혼자 쓸쓸하게 있는 모습은 도저히 못 보겠다.

턱을 괴고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던 엘레나의 시선은 어느새 시계로 향했다.

“하아… 근데 이놈은 언제 오나.”

언제부터인가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운 정이라도 든 건지 뭔지 요샌 그가 없으면 조금 심심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고… 허리야….”

제인의 스파르타 예절 수업을 받아서 그런지 허리가 부서질 것 같아 침대에 몸을 뉘었다.

큰 통창 유리로 비치는 별빛을 바라보며 넋 놓고 있을 때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카루스?”

그녀는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처럼 얼른 뒤를 돌았다.

“엘레나.”

그러자 데카루스는 어쩐 일이냐는 듯 그녀를 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어째 오늘은 어딘가 달라 보이는 기색이었다.

“당신, 어디 갔다 왔어? 오늘은 좀 달라 보이네.”

“황궁.”

그는 문을 닫자마자 침대와 멀리 떨어진 옷장 쪽으로 향했다.

뾰족한 행거 위엔 하루 종일 그와 함께한 겉옷이 걸렸다.

이윽고 그는 깊게 들이켠 숨을 내쉬며 침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털썩-

그의 체중에 판판하던 침대는 위아래로 꿀렁거렸다.

하지만 그가 누운 곳은 다름 아닌 그녀의 품이었다.

“뭐야, 당신 오늘 왜 이래.”

엘레나는 당황스러운 듯 공중으로 팔을 쭉 편 채 다리로 그를 툭툭 쳤다.

갑자기 변하면 사람이 죽는다더니.

이 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가만히 있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가 천천히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얇은 잠옷 사이로 느껴지는 그의 숨이 간지러웠다.

“비켜줄래, 좀.”

아무래도 이런 자세는 좀 불편했다.

다리가 찌릿찌릿한 게 곧 쥐가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 뒤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데카루스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 보았다.

“당신에게서 좋은 향이 나.”

그의 눈빛은 반쯤 맛이 간 것처럼 풀려있었다.

위험을 감지한 엘레나는 품에 안긴 그를 무릎으로 밀어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당신, 좀 자는 게….”

그 순간 허리를 감싼 팔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생각할 새도 없이 그에 품에 안긴 엘레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하자는 거야, 놔.”

완전히 풀린 붉은 눈빛이 그녀와 마주했다.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분홍빛 머리카락이 그의 손을 타고 스르륵 흘렀다.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식은땀이 절로 났다.

“어딜 가려고.”

예민한 귓바퀴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천천히 움직이는 붉은 꽃잎이 귓가를 촉촉이 적셨다.

왠지 뜨거워지는 듯한 공기에 엘레나는 고개를 살며시 돌리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 무슨 일 있었어?”

그는 뱀처럼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그의 왼쪽 가슴에서 울렸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기대어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티를 내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

한평생 위로라곤 해 본 적 없던 엘레나는 당황스러웠다.

이럴 땐 어떻게 위로를 해주어야 할까.

머리 쓰다듬기?

괜찮다고 말해주기?

등 토닥여주기?

한참을 고민하던 엘레나는 손을 들어 그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위로해주는 거야.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그러자 그는 얕게 웃으며 그녀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내게 동생이 있어.”

그가 가족 얘기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모님에 관한 얘기는 들어본 적 있지만 형제에 관한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엘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촌지간이긴 하지만 내겐 소중한 동생이야. 어렸을 때부터 날 지켜준.”

당황스러웠다.

그가 누굴 지키면 지켰지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는 건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아홉 살이었을 때 사라졌어, 갑자기. 쥐도 새도 모르게. 분명 그날이 내 생일이라 함께 연회에 가기로 했었거든.”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근데 이제 와서 돌아왔대. 또 아무 말도 없이.”

엘레나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눈빛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예전에 사라진 동생이 갑자기 돌아왔다고?”

죽은 줄만 알았던 동생이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뉴스에서나 보던 것인데.

그는 가녀린 어깨에 얼굴을 깊게 파묻곤 말을 이어 나갔다.

“응.”

“그래서 오늘 황궁에 다녀온 거야?”

“그래.”

그의 목소리는 지친 듯 바닥을 낮게 쓸었다.

이제 더 이상의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겉으론 티 내지 않아도 속으론 끙끙 앓고 있을 것 같기에.

“씻고 와. 아무래도 이만 자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니.”

그가 고개를 돌리자 검은 머리칼이 볼을 살며시 간질였다.

쇄골에 닿은 여린 살이 목을 타고 조금씩 올라왔다.

“이대로 조금만 더.”

그렇게 한참 동안 그의 품에 안긴 엘레나는 널찍한 등을 천천히 토닥여주었다.

그를 어루만지는 작은 손엔 슬픔이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가족을 잃는다는 건 이토록 아픈 것일까.

머리론 알 것 같지만 마음으론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가족이란 그저 부정적인 감정의 집합체일 뿐이니까.

“그래….”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품고 있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그날 밤은 시간이 멈춘 듯 길게만 느껴졌다.

어깨 위에 놓인 그의 얼굴은 그녀의 품에 스르르 파묻혔다.

“뭐야, 자는 거야?”

엘레나는 그 상태로 몇 시간을 돌부처처럼 앉아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욕구는 그녀를 막지 못했다.

서로를 의지하며 높이 쌓인 바위처럼 그녀도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그렇게 새벽을 밝히는 태양은 이내 고개를 내밀며 밤을 비추던 달을 서서히 삼켰다.

* * *

그 시각, 크리스탈 궁.

창문 밖으로 은은하게 비치는 둥근 달빛이 시커먼 그림자를 만들었다.

진초록색 벽으로 칠해진 방 안, 제 몸보다 큰 침대 위에 한 사내가 앉아있다.

사내는 방금 막 잠에서 깬 듯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수면 등에 비친 그의 몸에는 칼에 베인 듯한 상처들이 가득했다.

“황궁….”

오랜만에 느끼는 황궁의 공기는 낯설게 느껴졌다.

평생을 황궁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기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안젤로니아….”

침대 맡 탁상 위에 놓인 화병에는 안젤로니아 꽃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황궁 중 오직 크리스탈 궁에서만 피는 꽃인 안젤로니아.

상태를 보니 아마 시녀가 매일같이 새것을 가져다 놓은 모양이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꽃향기에 그는 얼굴을 구기며 낮게 읊조렸다.

“내가 이곳에 돌아올 줄이야.”

그의 눈앞에는 그녀와 맘껏 뛰놀던 푸른 숲 대신 금실로 수놓인 진초록색 벽지와 천장이 펼쳐졌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대를 꺾으며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엘레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