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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28화 (28/117)

28화.

황궁, 크리스탈궁.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크리스탈궁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여러 개의 창문이 붙은 꼴이 보석처럼 아름다워 크리스탈이라 불리우는 이곳은 헤실리아 황비의 소유로 다른 황비들의 궁보다 꽤 큰 편이다.

그래서 궁의 크기만 봐도 그녀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에 한 줌의 관심조차 없던 데카루스는 그대로 궁 안으로 직진했다.

금빛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데카루스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예를 차리며 고개를 숙였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황비 전하께 내가 왔다고 일러.”

그의 짙은 목소리는 높낮이 없이 수평선을 그었다.

이윽고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황비 전하, 스큘러스 대공께서 오셨습니다.”

하도 크게 외쳐대는 바람에 귀가 아팠지만, 그는 표정을 굳히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방 안에서는 힘없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 전해.”

끼익-

아이보리색 벽지로 도배된 방 안에는 화려하게 도금된 조형물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또 갈색빛이 도는 벽돌로 쌓인 벽난로 위에는 거대한 코끼리 상아가 그 위엄을 풍기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방에서부터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우아한 그녀와 잘 어울렸다.

“헤실리아 황비 전하를 뵙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데카루스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차렸다.

아이보리색 천으로 장식된 침대 위엔 세차게 숨을 몰아쉬는 황비가 힘없이 누워있었다.

아무래도 어딘가 안 좋아 보이는 황비의 모습에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왔구나, 아가.”

색색거리던 그녀는 갈걍갈걍한 팔목을 들어 간신히 그에게 손짓했다.

“예는 그만 차리고 이리로 오렴.”

데카루스는 고개를 들고 일어나 천천히 그녀의 옆에 다가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황비의 얼굴은 며칠을 못 먹은 사람처럼 야위었다.

“큰어머니.”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마치 구름 사이로 간신히 얼굴을 내비친 햇살 같았다.

황비는 마른 목에 침을 한번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노아…노아가 돌아왔어. 너도 그걸 듣고 온 게지….”

“예.”

데카루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말이 안 되는 일들이 많더구나, 카루스….”

배를 부여잡고 마른기침을 하던 황비는 폐가 아픈지 가슴을 쥐었다.

얼굴 근육을 움직여 억지로 짓는 웃음은 꼭 살려고 발악하는 시든 꽃 같았다.

“안 되겠습니다, 큰어머니. 이만….”

“그렇게 찾으려고 애를 써도 보이지 않던 아이가….”

그녀는 최대한 숨을 모아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

“13년 만에 제 발로 찾아왔어.”

힘겹게 숨 쉬던 황비의 눈가엔 물 먹은 짙은 구름이 밀려왔다.

한 번, 두 번.

그녀가 눈꺼풀을 움직일 때마다 송골송골 맺힌 비가 피부를 타고 내렸다.

야윈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은 잎사귀에 맺힌 이슬처럼 툭툭 거칠게 떨어졌다.

데카루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대체 무슨….”

“제롬이 그러더군. 피부가 하얗고 빼빼 마른 소년이 황궁 앞에 서 있었다고.”

“…….”

“처음엔 머리가 검은색이라 몰라봤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자세히 보니… 노아였다더군. 어릴 적 노아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그럴 리가….”

종잇장처럼 구겨진 그의 얼굴은 꽤나 볼만했다.

지금까지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기에 이제야 나타난 것일까.

그 또한 사라진 노아를 찾으려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제 얼굴을 비친 적이 없었다.

“얼마나 못 먹었으면 건강하던 아이가 그렇게 말라왔을까…. 지금까지 무얼 하다 왔냐고 해도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더구나….”

“큰어머니…!”

가파르게 호흡하던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을 만한 상황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황비는 곧 죽을 것처럼 상태가 심각했다.

“당장 의원을 불러.”

벽에 가까이 서 있던 병사들은 그의 말에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의원이 오려면 5분 정도는 더 걸릴 테다.

데카루스는 그녀의 손에 이마를 대고 맹세했다.

“노아는 제가 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큰어머니….”

그녀는 애써 웃어 보여 그를 안심시키려 하는 듯했다.

헐떡거리던 황비는 마주 잡은 손을 꼭 붙잡고 입을 열었다.

“그래… 고맙구나, 카루스.”

황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의원이 노아는 지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아쉽게도 오늘은 돌아가야겠어.”

“예, 괜찮습니다. 그저 큰어머니의 건강을 되찾기만 한다면….”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그가 기특한 듯 손을 더 뻗어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그 조그맣던 아이가.”

미소 지은 그녀의 모습은 모든 걸 품을 수 있는 물방울 같았다.

데카루스는 입 꼬리를 어렵게 말아 올리며 그녀를 향해 웃었다.

“많이 힘들었지, 네 어미와 아비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또 엘레나, 노아까지 전부 잃고… 불쌍한 내 새끼….”

“…….”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데카루스를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된단다, 카루스. 이제 혼자가 아니잖니. 이제 참지 않아도 돼. 슬픔도, 기쁨도. 난 그저 네가 자유롭길 바란단다.”

데카루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짙어진 그의 표정엔 어떠한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아마 그 누구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테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 큰어머니.”

데카루스는 그대로 일어나 자리를 떴다.

그가 남긴 걸음걸음마다 사무친 외로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그렇게 그를 떠나보낸 자리에는 미적지근한 온기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 *

대공저, 데카루스의 방.

넓은 방 안에선 머리 위에 책을 잔뜩 올린 엘레나와 그녀를 감시하는 제인이 자세 연습을 하고 있다.

“자- 아가씨. 그렇게 걷는 겁니다. 책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뒷짐을 진 제인은 가느다란 막대기를 들고 엘레나의 등허리에 세웠다.

행여나 높이 쌓인 책이 떨어질까 엘레나는 등을 꼿꼿이 세워 조심스레 걸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제인? 이건….”

엘레나는 울먹거리는 얼굴로 제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애교 작전 따위 먹힐 리가 없었다.

제인은 호랑이 선생님처럼 단호했다.

“하셔야 귀족들의 눈 밖에 나지 않습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현재 걸음 상태는 엉망입니다.”

“제인 진짜 너무해.”

“자, 자. 어서 걸으세요. 아가씨. 오늘 열 바퀴는 더 돌아야 끝납니다.”

그렇게 공포의 예법 연습이 끝난 뒤, 엘레나는 간신히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모델이라도 된 듯 하루 종일 걸어댄 탓에 허리가 뻐근한 느낌이었다.

지금 티테이블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실 때가 아니었다.

“아파, 제인. 허리가 늙은 것 같아.”

엘레나는 얼굴을 잔뜩 구기며 주먹을 쥐곤 등허리를 콩콩 쳐댔다.

“아가씨, 그럼 전 벌써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을 겁니다.”

제인은 괘념치 않은 듯, 손을 입에 올려 예쁘게 웃었다.

이럴 땐 제인이 너무 얄밉긴 하지만 그녀의 햇살 같은 미소를 보면 그 마음은 스르륵 녹아들게 된다.

“제인도 고생이 많았겠다…. 이런 걸 다 어떻게 배웠어.”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이 많은 터라 자연스레 몸에 익혔답니다. 물론 예법 선생님께 배운 것도 있고요.”

“하…. 내 팔자야. 내가 뭐라고 이런 걸 배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온몸이 맞은 것처럼 아파 죽겠는데 제인은 인형처럼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곧 많은 귀빈 분들을 만나실 텐데… 이 정도는 배우셔야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아가씨.”

“알았어….”

엘레나는 빨랫줄에 매달린 오징어처럼 몸을 주욱 늘이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제인은 시무룩한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양손을 맞잡으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저도 무시당한 적이 있어서 그래요, 아가씨.”

순간 제인의 얼굴엔 까만 그림자가 드리웠다.

“제인….”

걱정스러운 투로 묻자 이내 제인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조금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누가? 누가 제인을 무시해?”

“아주 예전 일이라 괜찮아요.”

“아니야, 말해. 내가 아주 묵사발을 내버릴 테니까.”

주먹을 쥔 엘레나는 건달처럼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꺾으며 뼈 소리를 내었다.

그를 본 제인은 눈가에 초승달을 그리며 살며시 웃었다.

“흠… 아주 오래전 일이긴 한데…. 저는 어릴 적부터 황실에서 일을 했기에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어요. 한데 실수하는 일이 잦아서 시녀장님께 매번 혼이 나곤 했답니다. 뭐 바로 쫓겨나긴 했지만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엘레나는 그녀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네, 집에서도 저를 인정해 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대공님 덕에 이렇게 살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갑자기 안주를 뜯고 싶어지는 건 기분 탓일까.

후작 영애인 제인은 가족이 있었지만 아들, 아들 하는 집안 분위기상 그렇게 좋은 대접을 받고 자라진 못했다고 한다.

또 제인은 그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어린 나이에 자의로 황실에 들어가 일했지만 그곳의 시녀들에게도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제인… 내가 앞으로 더, 더, 더 잘해줄게.”

자리에서 일어난 엘레나는 팔을 벌리곤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등을 토닥이는 손짓엔 따스한 온기가 물들어 있었다.

“고마워요, 아가씨.”

가족이란 게 이런 것일까.

제인의 마음속에선 몽글몽글한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이런 따듯함을 절대 놓치지 않으리.

또 이번엔 절대 그녀를 잃지 않으리라, 여러 번을 곱씹으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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