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그가 나가고 다시 조용해진 방 안은 너무나도 적적했다.
생각해 보면 이곳에서 말할 사람이라곤 그와 제인밖에 없었다.
“근데 지금은 제인이 없으니까….”
침대에서 일어나 광합성이나 할 겸 창문 앞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안 돼….”
창밖에는 결혼식 준비로 분주한 시종들이 왔다 갔다 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복도가 조용하더라니.
전부 짐을 나르느라 바빴던 것이다.
저택 안까지 들어온 세 대의 짐 마차에는 꽃과 조형물 그리고 음식 재료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결혼… 결혼… 결혼……!”
갑자기 현실로 다가온 결혼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엘레나는 창가 옆에 있는 티테이블에 앉아 머리를 쥐어 싸맸다.
결혼하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아가씨에서 대공부인이 될 테고.
또 이 성에서 어느 정도의 권력이 생기겠지.
그럼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늘어나는 게 아닐까.
“땅을 사서 몰래 떠날까.”
결혼을 하면 그에게 광산이라도 달라고 해서 돈을 모으는 거야.
이 드넓은 아르데오 공국을 빠져나가기 위해선 돈이 가장 중요했다.
아니, 어디서든 먹고 살려면 돈이 가장 중요했다.
“품위 유지비를 전부 사비로 돌린다면 자그마한 집 한 채 사는 덴 문제없을 거야. 평생 먹고살 수도 있고.”
또 바다 건너 조그만 나라에 정착해 현대식 커피 하우스를 차려서 귀족들을 불러 모은다면 수입도 꽤 날 테니까.
“나 천잰가 봐.”
완벽한 계획에 기분이 좋아진 엘레나는 거울 앞에 서서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곤 화장대에 꽂혀있는 빗을 꺼내어 머리를 빗었다.
그녀가 머리를 빗는다는 건 그만큼 기분이 좋다는 뜻이다.
거울 앞에서 한참 예쁜 척을 하고 있을 무렵 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와.”
“아가씨?”
평소에 듣기 힘든 그녀의 높은 목소리에 제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인!”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는 엄마를 찾은 어린아이처럼 팔을 벌리며 헐레벌떡 뛰어갔다.
그새 제인에게 폭삭 안긴 엘레나는 몸이 부서져라 팔을 조였다.
“으. 아파요, 아가씨.”
“미안, 미안. 너무 좋아서.”
환히 웃는 그녀의 미소는 마치 풋사과처럼 싱그러웠다.
제인도 역시 헤실거리는 그녀를 보곤 밝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엘레나의 입꼬리는 추욱 처졌다.
길 잃은 고양이처럼 동그랗게 눈을 뜬 그녀는 울먹거리며 제인에게 말했다.
“제인…. 나 이틀 뒤에 결혼해, 이건 말이 안 되잖아. 그치? 내가 결혼이라니….”
“아가씨….”
제인은 슬퍼하는 그녀를 품에 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대공님과 아가씨는 행복하실 거예요. 또 힘들 땐 언제든지 저를 찾으세요. 전 항상 아가씨 편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시무룩해진 엘레나는 입술을 쭉 내밀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난 그와 행복해질 생각 없어.”
“아가씨….”
“제인도 내 편이 아니야.”
“전 항상 아가씨의 편인걸요.”
“치….”
골이 난 듯한 표정에 제인은 미소를 지으며 엘레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만졌다.
“그런데 웬일로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평소엔 잘 빗지도 않던 머리까지 빗으시고.”
제인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우며 말했다.
“왜냐면 아주 좋은 계획이 생각났거든.”
“계획이요…?”
“응, 난 꼭 탈출할 거야.”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빛은 불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그러자 제인은 의자에 불타오르는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 지었다.
“그래요, 하지만 일단 우린 해야 할 게 있답니다.”
“뭔데?”
“예법 공부요!”
예법 공부라는 말에 엘레나의 표정은 일순간 굳어졌다.
이 세상에서 공부보다 더 무서운 말이 어디에 있으랴.
“그렇다면 아가씨, 예법 공부를 하러 가 보실까요?”
* * *
대공저, 회의실.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회의실 내부, 회색 벽돌로 둘러싸인 벽엔 역대 가주들의 사진이 나란히 붙어있다.
오래된 듯 보이는 벽난로엔 먼지가 뽀얗게 껴 있었고 그 옆으론 불쏘시개가 우산처럼 가지런히 놓여있다.
원목으로 된 둥그런 원탁엔 제복을 차려입은 각 행정관들이 데카루스의 눈치를 보며 제 할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맨 끝에 앉은 데카루스는 누가 봐도 머리가 아픈 듯 눈을 감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평민들의 세금을 줄이셔야 합니다, 전하. 공국민들의 원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차라리 귀족세를 받으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귀족들의 금고는 날로 들어차고 있는데 서민들은 배를 곯다니요.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허! 귀족세라뇨. 우리 공국의 수입 절반 이상이 귀족들에게서 나옵니다. 상류 귀족층이 다른 공국으로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우리 공국의 근간이 망가집니다! 그렇게라도 된다면 책임지실 겁니까?”
“아니, 지금 어디서 막말을!”
쾅-
손끝에서 퍼진 마찰음이 회의실 내부를 거대하게 울렸다.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그는 깊게 들이켠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귀족의 세금을 올려. 어차피 지금도 그들이 내는 세금은 적지 않나. 그리고 윌리엄, 난 당신이 내 나라에서 떵떵거리며 잘사는 꼴은 못 보겠어서 말야.”
“저…전하…!”
나이가 들어 머리가 하얗게 센 행정관이 원망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괘념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까닥거리며 옆에 있는 행정관을 가리켰다.
“아, 벤자민. 이번 일은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지.”
“예, 전하.”
두 행정관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아마 그중 한 명은 오늘 밤 자신의 세치 혀를 후회할 테다.
그때 데카루스와 마주 앉은 행정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대공 전하… 드릴 말씀이….”
키가 작아 책상 위로 간신히 보이는 사내가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그는 감히 이 말을 전해야 할지 아님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해 보였다.
“뭔가.”
진한 에스프레소 같은 목소리가 고요해진 회의장에 울렸다.
“그…그게….”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뭐라고 했지?”
머뭇거리는 사내 탓에 다시 두통이 온 듯한 데카루스는 한 손으로 이마를 쥐어 잡았다.
그러자 키가 작은 행정관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대, 대공 전하! 이번 결혼식은 너무 성급한 결정입니다!”
순간 모든 시선들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를 제외한 열한 명의 행정관들은 저자가 드디어 미쳤구나 하는 눈빛을 내보냈다.
대공이 엘레나 아가씨를 아끼는 것은 지나가는 하루살이조차도 잘 아는 사실인데 말이다.
“밖에서 데리고 온 계집과 일 년도 아니고 한 달 만에 결혼이라뇨, 전하. 이건 누가 봐도 성급한 결정…!”
분명한 실언이다.
저자는 오늘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우습게도 행정관들의 고개는 모두 75도를 그리고 있었다.
곧 일어날 참사에 대비한 듯 서로 눈알만 열심히 굴리고 있을 테다.
데카루스의 표정은 순식간에 시베리아의 강추위처럼 얼어붙었다.
그러곤 언짢은 듯 눈을 시퍼렇게 뜨고 그에게 물었다.
“계집이라고 했나, 데미안.”
“그…그것이… 전 그저 대공 전하의 안위를 생각해서…!”
쾅-!
그의 손짓에 책상이 부서질 듯 파열음을 내며 흔들렸다.
한 발짝, 두 발짝.
메트로놈처럼 정확히 박자를 맞춘 구둣발 소리에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아연실색했다.
스릉-
허리춤에 꽂혀있던 칼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제 모습을 드러냈다.
“목숨이 질긴가 보군, 안 그래?”
데카루스는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종이 한 장 들어갈 공간조차 없는 긴 대검과 가느다란 목 사이에는 긴장감만이 감돌 뿐이었다.
“아, 아닙니다. 전하!! 제가 감히 실언을…!”
멍청한 행정관은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행여나 목이 날아갈까 몸을 벌벌 떨었다.
“그래? 그럼 무엇이 성급한지, 자네의 그 쓸모없는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나 들어볼까.”
분명 그가 주는 마지막 기회, 아니 마지막 숨이었다.
“그…그것이…. 귀족도 아닌 평민. 아니, 노예와의 결혼이라니. 분명 대공가의 수치입니다.”
탁-!
흉물스러운 머리가 그의 손짓과 함께 가볍게 떨어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행정관의 목에선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와 그의 하얀 셔츠를 적셨다.
순간 그의 표정은 종잇장처럼 잔뜩 구겨졌다.
세치 혀 행정관이 죽어서가 아니다.
그저 그가 아끼는 하얀 셔츠가 피에 물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데카루스는 나뒹구는 머리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럼 다음 안건을 들어보도록 하지.”
자리로 되돌아간 데카루스는 삐딱하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하지만 이미 아수라장이 된 회의장의 분위기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여전히 75도 각도로 고개를 숙인 행정관들은 입술을 뜯으며 혹 제 차례라도 올까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싸한 분위기가 짙게 내리깔린 회의장엔 그저 차가운 적막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 분위기를 참지 못하는 자가 있었으니.
회의장 창문으로 들어오는 환한 빛이 그의 연한 머리칼을 비추었다.
다리를 덜덜 떨던 그는 이내 못 참겠다는 듯 책상을 비집고 일어나 입을 열었다.
탁-
“자, 자. 흔한 일이니 다들 가볍게 넘어가자고요. 안 그렇습니까, 대공 전하?”
이삭은 고개를 돌려 데카루스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쪽 입 꼬릴 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시끄러우니 다음 안건이나 말해.”
얼굴을 잔뜩 찌푸린 데카루스는 귀찮다는 듯 턱을 괴며 대답했다.
이삭은 심통 난 고양이 같은 그의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혀를 살짝 깨물며 미소 지었다.
“분부대로 하죠, 대공 전하. 자, 얼굴 푸시고. 결혼식은 그대로 진행할 겁니다. 여러분들 중에 불만 있으신 분 계신가요?”
이삭의 질문에 행정관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방금 목이 댕강 날아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자, 없으면 다음!”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이삭은 개구쟁이처럼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러자 얼굴에 피가 잔뜩 묻은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예… 그…. 이번 건은 안건은 아닙니다.”
분명 안건을 말하라고 준 기회일 터인데.
데카루스는 한껏 눈을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매서운 시선을 느꼈는지 머리가 책상에 붙을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방금 급히 들어온 소식입니다. 8황자 전하께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그는 데카루스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뭐? 노아가?”
“예, 전하.”
회의 내내 턱을 괴고 있던 데카루스는 이내 허리를 곧게 세워 폈다.
높낮이 없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행정관에게 꽂힌 그의 붉은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테오, 만약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정, 정말이옵니다, 대공 전하. 정말 8황자님께서…!”
탁-
그가 일어서자마자 원탁에 앉은 행정관들의 몸이 움찔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문책하려 일어선 것이 아니었다.
데카루스는 급히 피 묻은 셔츠 단추를 풀며 발걸음을 떼었다.
“회의는 여기서 마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