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침부터 시끄럽게 재잘대는 참새들의 울음소리가 눈을 깨웠다.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이 따듯했다.
5월이라 그런 걸까.
예전보다 더 뜨거워진 햇살에 얼굴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으음….”
왜인지 아래가 얼얼한 게 거슬렸다.
욱신욱신한 게 어디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쓰라린 밑 때문에 몸을 뒤척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대체 어제 뭘 했길래 이렇게 온몸이 이렇게 아픈 걸까.
아니….
생각났다.
“미친.”
도저히 떠지지 않던 눈이 확 뜨였다.
어제 그와 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어마어마한 장면들과 소리가 비디오를 틀어 놓은 것처럼 생생했다.
“미쳤어, 엘레나. 미쳤어.”
그녀는 양손으로 머리를 잡으며 얼굴을 구겼다.
밤에 약간 쌀쌀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안 입었으니까…!”
엘레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도대체 뭔 정신으로…!”
전생에서도 원나잇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마음도 없는 남자랑 잠자리를 하다니.
머리를 쥐어뜯어 탈모가 생겨도 모자랄 심정이었다.
“다 저 여우 같은 놈 때문에…!”
벌이 그 민망하고 요사스러운 행위라고는 하지 않았잖아!
엘레나는 고개를 홱 돌려 천연덕스럽게 자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잘 때는 어찌나 조용한지 이대로 평생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아들내민지 인물 참 훤하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잠든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까만 머리칼.
칼로 깎아 놓은 듯한 오뚝한 콧대에 인형처럼 긴 속눈썹이 꼭 밀랍 인형 같았다.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제정신이라면 옷부터 입는 게 최우선일 터.
주위를 살펴보니 잠옷 원피스가 저 멀리 날아가 널브러져 있었다.
어쩐지 추워서 밤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더라니.
“조심….”
엘레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한쪽 발을 스리슬쩍 내밀며 몸을 굴렸다.
마치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히 움직이는 작은 여우처럼 말이다.
이불 아래 감춰진 새하얀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햇빛에 비쳐 투명하게 빛나는 여체는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그렇게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살금살금 걸어 잠옷이 있는 곳으로 다가갈 무렵,
“어디 가, 그 몸으로.”
바닥을 낮게 기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에 놀란 엘레나는 곧바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보, 보지 마!”
그녀는 쭈그려 앉아 몸을 가리곤 뒤를 돌아보았다.
반쯤 풀린 그의 눈에선 아직 잠이 가시지 않은 듯 졸음이 묻어났다.
“이미 다 본 사이에 뭘 그리 부끄러워해.”
“보지 말라면 보지 마, 이 변태 색마야.”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돌아봤다.
사람이 말 좀 하면 냉큼 들어야지.
저 재수 없는 놈은 끝까지 말을 안 듣는다.
그러자 데카루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변태 색마?”
“그래. 변태 색마.”
“당신이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뭐?”
엘레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아니 먼저 덮친 건 본인이면서 대체 누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내 셔츠를 다 벗긴 건 당신 아닌가?”
머릿속에선 빨간 비상벨이 울렸다.
어제 침대에서 있었던 일들이 뇌 속에서 2배속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헐.”
아, 망했다.
정말 내가 먼저 벗겼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그건, 뭐…!”
거짓말을 하려니 목구멍에서 말이 안 나왔다.
입에 침이라도 발라야지.
“큼큼…!”
그러자 그는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건 그냥 실수…!”
“실수?”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갔지만 당당하게 외쳤다.
“그래, 실수. 한 번쯤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런 것치곤 격하던데.”
그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팔을 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신화에나 나오는 에로스처럼 뇌쇄적이었다.
“난 당신이 셔츠를 찢는 줄 알았어.”
끈적한 그의 목소리가 방 안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엘레나는 어림도 없다는 듯 그의 말을 무시했다.
“시끄럽고. 눈이나 감아. 나 옷 입어야 해.”
새하얀 잠옷은 이리저리 구겨져 엉망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니 어쩔 수 없이 입어야겠지.
아무래도 이따가 시녀를 시켜 새 잠옷을 달라고 해야겠다.
“그래, 눈 감고 숫자를 셀 테니 다 입으면 말해. 1, 2, 3….”
그녀는 얼른 속옷과 잠옷을 주워 입었다.
무슨 옷 빨리 입기 기네스 대회도 아니고 이렇게 급하게 입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그가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었는지 정말로 눈을 꼭 감고 숫자를 세고 있었다.
“20, 21….”
“다 입었어.”
허리 끝에 찰랑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제 몸보다 큰 하늘하늘한 잠옷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마치 숲의 요정 같았다.
그러자 데카루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살짝 미소 지었다.
“이리 와.”
엘레나는 생뚱맞게 주위를 둘러보곤 뒤늦게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그러자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당신.”
“왜, 왜. 왜 부르는 거야.”
엘레나는 무언가 두려운 듯 가슴팍에 주먹을 올리곤 꼼짝없이 서 있었다.
“그럼 내가 갈까?”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가 이불을 걷자 다부진 근육이 붙은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니!”
엘레나는 반동으로 튀어 나간 공처럼 재빨리 양손으로 눈을 가리며 외쳤다.
저 미친놈이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하다.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덴 아주 선수다.
“오지도 말라, 보지도 말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내, 내가 갈 테니까 가만히 있어.”
“분부대로.”
그는 작게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레나는 거대한 고양이 앞을 지나가는 작은 쥐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하도 느리게 걷는 탓에 지쳐버린 데카루스는 고개를 뒤로 젖히곤 눈을 감았다.
“1… 2… 3….”
“숫자는 왜 세는데?”
“당신이 하도 느리게 와서. 얼마나 걸리나 보려고.”
여전히 눈을 감고 숫자를 세는 그의 목소리 탓에 노이로제가 걸릴 판이었다.
“가만히 있어.”
그는 알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지긋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천히 다가가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엘레나는 무릎을 갖다 대며 조심스레 침대 위로 올랐다.
푹신하게 가라앉는 침대 시트 탓에 잠시 휘청거렸지만 중심을 잘 잡아 넘어지진 않았다.
이윽고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눈치를 보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지루한 듯 턱을 괴곤 하품을 했다.
“이러다가 밤이 되겠어.”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
“꼭 고양이를 키우는 것 같아.”
자꾸 헛소리만 하는 그의 입에 입마개를 붙여놓고 싶었다.
“시끄러워.”
엘레나는 다리를 벌벌 떨며 한쪽 무릎을 하나 더 갖다 올렸다.
완벽하게 침대 위에 오른 그녀는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됐지?”
그러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언짢은 듯 고개를 삐딱하게 숙였다.
“서커스단이라도 들어갈 작정이야?”
사실 완벽하지 않았다.
침대 끝에 다리를 걸쳐 올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그 덕에 온몸이 덜덜 떨려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아니? 나 원래 이렇게 있는 걸 좋아해.”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조소를 지었다.
“부인께서 서커스단에 입단하는 건 못 보겠어서 말야.”
순간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겼다.
마치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던 엘레나는 곧장 낚아 올려졌다.
“아…!”
온전한 정신으로 느끼는 사내의 몸은 크고 단단했다.
팔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에 숨이 턱 하고 멎을 것만 같았다.
“귀는 또 왜 빨개져.”
“그게…!”
귀를 막으려는 순간 그에게 양손이 결박당했다.
부드러운 입술은 귓가를 사근거리며 그녀를 간질였다.
축축이 젖은 듯한 입김이 고막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왜, 좋아?”
허리춤에 맞닿은 팔이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흑단 같은 머리칼이 그녀의 볼을 간질였다.
“한 번 더 할까.”
“뭐? 미쳤…!”
“쉿, 아직 아침이야.”
그의 검지손가락이 살포시 벌어진 입에 맞닿았다.
입술을 맴돌던 손가락이 입 안을 파고들었다.
“당신 품이 너무 따뜻해.”
“읏…!”
저절로 들린 고개가 그의 볼과 맞닿았다.
귓가에 닿은 입술에선 뜨거운 호흡이 새어 나왔다.
“그, 그만해. 이제 됐어.”
민망했던 탓일까.
그녀는 두 손으로 새빨개진 볼을 가리며 그의 품 안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자유도 잠시.
그는 우리에서 달아난 토끼를 잡는 것처럼 긴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다.
“너…!”
등에 맞닿은 심장이 빠르게 쿵쾅댔다.
그에 맞춰 그녀의 심장도 점점 속도를 높였다.
“난 아직 안 끝났어.”
어깨 위로 그의 얼굴이 살며시 떨어졌다.
잠옷과 맞닿은 맨살에서 진한 머스크향이 났다.
“아…!”
목 주위를 탐하는 입술에서 그의 욕망이 드러났다. 이윽고 날카로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단단한 이가 여린 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카루스…!”
입술이 닿을 때마다 몸이 움찔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재빨리 손을 들어 목을 가리자 그는 양손에 깍지를 끼웠다.
“하아….”
수갑처럼 죄는 손은 움직일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고개를 숙이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뿐.
“숨소리조차 야하면 어떡해.”
“그만…!”
그의 손이 허리를 스쳐 가슴팍에 닿았다.
뱀처럼 곡선을 그리는 손가락에 이를 악물었다.
“그만해!”
엘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를 밀쳐냈다.
토마토처럼 빨갛게 익은 그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짧은 호흡을 뱉던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러게 하지 말라니까….”
그는 몸을 추스르는 그녀를 보며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그는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
“다음엔 안 봐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