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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25화 (25/117)

25화.

“후우… 죽다 살았네.”

수가 평소에도 저렇게 후각이 예민했나.

하마터면 대공저에 산다는 걸 들킬 뻔했다.

만약 걸렸다면 이 모든 일들을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눈앞이 까매졌다.

“아…!”

그때 눈부신 태양 빛이 진하게 내리쬐었다.

엘레나는 오른손으로 눈을 가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수다를 떨었구나.

붉게 물든 하늘은 마치 단풍잎을 수놓은 듯 아름다웠다.

태양이 사라지고 달이 떠오르는 시간.

그녀는 한참 동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불꽃놀이…!”

그녀는 황급히 왼쪽 손목을 바라보았다.

“시계가 없지, 참!”

전생에서 시계를 자주 차는 버릇이 있어 저도 모르게 왼쪽 손목을 본 모양이다.

그녀는 한 번 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보이는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시곗바늘은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안 돼. 늦겠다!”

엘레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광장 쪽으로 빠르게 향했다.

공국에서 주최하는 이번 불꽃놀이는 자금을 꽤 들인 행사라고 알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 다신 못 볼 화려한 불꽃놀이를 조금이라도 눈에 담고 돌아가고 싶었다.

“제발, 빨리…!”

소문은 소문대로 퍼졌기에 분명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불꽃놀이를 보는 최적의 장소라면 잘 알고 있다.

바로 시계탑.

평범한 사람들은 그곳에 올라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오직 에이든과 그녀만이 아는 비밀의 장소였다.

* * *

“에이든!”

“엘레나, 여기 너무 높아. 나 무서운데….”

“빨리! 내 손 잡고 올라와.”

10살 정도 되었던 땐가.

그때도 마침 불꽃놀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계탑 위로 올라간 적이 있다.

시계탑은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베르 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관리자는 밤이 되면 퇴근을 했고 우리는 그때를 틈타 가느다란 철사로 잠긴 문을 열어 쥐새끼처럼 몰래 시계탑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 와. 여기 앉아.”

“응, 엘레나.”

앙증맞게 귀여운 에이든도 작은 소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뭐, 유난히 키가 작던 그는 사춘기가 되자마자 훌쩍 커버렸지만 말이다.

작고 조그만 게 겁은 많았다.

매번 그를 놀리는 맛이 있었는데 변성기가 지나자마자 걸쭉한 목소리를 내는 사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놀리는 맛이 없어졌지.

“노을이 너무 예쁘다. 꼭 단풍잎을 갖다 붙여놓은 것 같아.”

“바보. 하늘에 단풍잎을 어떻게 붙이냐? 생각하는 거 하곤.”

“아니야, 엘레나. 하늘 좀 봐. 너무 아름답잖아.”

“그래, 짜식. 예쁘다, 예뻐.”

에이든은 그녀와 달리 모든 것을 볼 때 꼭 시인처럼 묘사했다.

그래서 그때마다 오글거린다며 놀리기도 했는데 괜스레 삐쳤으려나.

아, 그때 그의 싱거운 장난에 잠시 놀라기도 했다.

“근데 그것보다 더 예쁜 게 있어.”

“응? 뭔데?”

어린 에이든은 그녀의 고개를 잡고 지그시 눈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잠시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뭔지 궁금했기에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뭐?”

“너 바보라고.”

“아이 씨!”

* * *

참 웃긴 것은 그때 에이든의 어깨를 마구 때린 탓에 한동안 어깨를 쓰지 못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참 미안하긴 했지만 너무 귀엽고 소중한 추억이라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좋았는데….”

옛 생각이 나 갑자기 울컥하는 바람에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아이 씨… 또 왜 이래. 울지 마.”

이제 눈물을 닦아줄 사람도 없으니 홀로 스스로를 챙겨야 했다.

하지만 이미 흘러나온 눈물은 여우비가 오듯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하는 수 없이 더러워진 원피스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아….”

하늘은 검은 베일로 감싼 듯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대신 아름답게 반짝이는 달님과 별님이 스스로를 태우며 환한 빛을 내주었다.

댕-

댕-

댕-

9시를 알리는 시계탑의 종소리가 귀 아프게 울렸다.

그녀는 곧장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꼭 감았다.

에이든이 해주던 대로 말이다.

“시작이다.”

마을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하얀 빛줄기가 솟았다.

펑-

광활한 하늘에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꽃들이 피었다.

마치 분수가 물을 흩뿌리듯 예쁜 불꽃이 별처럼 떨어졌다.

“예쁘다….”

엘레나는 넋을 놓고 불꽃을 구경했다.

카메라가 있었으면 찍어서 저장해 두었을 텐데.

이곳은 아직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으니 뭐 어쩔 수 없겠지.

“나 혼자만 보려니 아쉽네.”

그냥 문득 누군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장면들이니까.

“그러게.”

순간 폭죽 소리를 뚫고 온 낯익은 음성에 고개를 홱 돌렸다.

큰 키에 쩍 벌어진 어깨.

로브를 썼지만 그가 누군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집 나간 강아지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고민했는데.”

“데…카루스….”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나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어라 변명을 해야 했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불꽃이 터져 올랐다.

펑-

“카루스… 이, 이건….”

흑단 같은 머리가 불꽃에 비쳐 빨갛게 번졌다.

달빛에 물든 붉은 눈동자는 사냥감을 잡은 짐승처럼 또렷했다.

초 단위로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은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한참을 찾아다녔어.”

이생의 마지막 장면이 불꽃놀이라니.

그래, 불꽃놀이를 보며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결말이다.

“당신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펑-

떨리는 두 눈빛이 그와 마주했다.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따듯한 손가락이 차가운 바람에 얼어붙은 볼을 녹여주는 것만 같았다.

“놀랐잖아.”

“…….”

“당신이 또 없어진 줄만 알았어.”

가까워진 시선엔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바람이 훑고 간 머리칼을 적당히 정리해주었다.

익숙한 손길이 닿는 곳곳마다 오한이 들었다.

“난 당신에게 그 무엇도 허락해준 기억이 없는데 말야.”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나, 난 그저….”

그는 팔을 뻗어 그녀를 휘감았다.

밤바람이 사뿐히 밟고 지나간 몸이 조금씩 따듯해졌다.

“누구를 문책해야 할까.”

목 깊숙이 잠긴 그의 목소리가 천천히 녹아들었다.

악마의 속삭임은 짙은 다크 초콜릿처럼 달콤했다.

“누가 내 소중한 강아지를 풀어줬을까, 응?”

꽉 잡힌 허리가 수갑을 찬 듯 조여 왔다.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진 입술에선 서로의 호흡이 오고 갔다.

펑-

꽃잎처럼 흩어지는 커다란 불꽃이 두 눈에 담겼다.

눈사람처럼 굳어버린 엘레나는 눈알만 열심히 굴릴 뿐이었다.

그러자 그는 피식 웃으며 손으로 머리를 마구 비볐다.

“앞을 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빛이었다.

얼굴 가까이 닿을 것 같은 형형색색 유성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달의 여신이 인간들을 축복하기 위해 예쁜 달 가루를 뿌리는 것 같았다.

“예쁘다….”

“그것보다 더 예쁜 것이 있는데.”

그가 허리를 꽉 껴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귓가를 울리는 끈적한 목소리가 간지럽게 고막을 스쳤다.

“…….”

엘레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펑-

꽃잎처럼 작은 입술이 그와 맞닿았다.

고개는 그의 손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얕은 눈꺼풀은 떨리는 눈동자를 천천히 가려주었다.

밝은 불꽃에 비친 그들의 얼굴은 무지개처럼 빛났다.

펑-

그의 혀가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끈적이는 타액이 입가에 번졌다.

“당신을 갖고 싶어.”

마주친 시선에 그의 진심이 녹아들었다.

살짝 떨어진 입술엔 찬기가 돌았다.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으면 좋겠어.”

시공간은 사진을 찍은 것처럼 멈추었다.

예쁜 밤하늘도, 폭죽 소리도, 정각을 알리는 시계탑의 종소리도.

오직 그와 그녀만의 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눈을 수놓은 불꽃만을 빤히 바라볼 뿐.

그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감정 없는 표정만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

대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 * *

두 사람은 집에 돌아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갔다.

다신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며.

엘레나가 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 때마다 그는 그저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간 순간, 분위기는 역전되었다.

“그래서, 누굴 문책할까?”

단추를 풀며 겉옷을 벗는 그의 뒷모습에선 싸늘한 공기가 퍼졌다.

이삭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지만 그의 이름을 뱉을 순 없었다.

“나… 내가 잘못한 거야.”

엘레나는 가엾은 어린 양처럼 덜덜 떨었다.

그는 고개를 슬쩍 돌리며 이마를 찌푸렸다.

“그래서, 당신을 문책하라?”

“그래….”

그녀는 풀이 죽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데카루스는 얕게 코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턱을 올려 잡았다.

“당신에게 어떤 벌을 주어야 좋을까….”

이 인간이 말하는 문책은 분명 잔인한 형벌일 테지.

때리려나.

보육원에서 많이 맞아봐서 맷집은 센데.

설마 죽이지는 않을 테고.

사지 찢기? 감금? 징벌 의자?

그는 구겨진 셔츠 단추를 풀며 다가왔다.

“죽이지만 마….”

그가 한 발자국 다가갈 때마다 그녀는 한 발자국 뒤로 움직였다.

아무래도 죽을 것 같은 생각에 몸엔 한기가 돌았다.

“뭐?”

그는 잘못 들었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고개를 숙인 엘레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죽이지만 말라고….”

“내가 당신을 죽여?”

그의 말에 엘레나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데카루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며 코웃음 쳤다.

“아, 죽여주게 잘하는 건 있는데.”

저 미친놈이 거들먹거리며 말한다는 것은 정말로 자신 있다는 소리였다.

엘레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뭔데….”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손발이 덜덜 떨리고 온몸에 피가 굳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겠어?”

그는 보조개가 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다 죽은 마당에 제게 의견을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랴.

그녀는 다시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거나 다 좋아. 죽이지만 마. 나 오래 살고 싶거든.”

눈을 꼭 감은 그녀의 얼굴에 따듯한 손길이 닿았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다?”

“그래….”

“정말. 그 무엇도 상관없어?”

“응, 죽지만 않는다면….”

그는 먹이를 탐하는 짐승처럼 천천히 다가왔다.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입 안에 침이 말랐다. 그렇게 더 이상 갈 곳 없는 엘레나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의 팔 안에 갇혀버린 그녀는 토끼처럼 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떤 벌이야?”

눈가에 닿은 손이 코와 입을 스쳐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곧게 들린 고개는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내가 당신에게 내리는 최고의 벌.”

그는 날카로운 코끝을 천천히 비볐다.

움직일 때마다 스치는 입술 사이로 얕은 호흡이 오갔다.

“기분이 이상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반쯤 풀린 눈 안에 박힌 붉은 보석이 찬란히 빛났다.

데카루스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쓸며 말했다.

“벌써 이상하면 안 되지.”

털썩-

“이제부터 시작인데.”

물결치는 분홍빛 머리카락이 구겨진 침대 시트 위에 흐트러졌다.

하나둘 풀려가는 단추에 그녀의 호흡은 점차 거칠어졌다.

맞닿은 입술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거칠게 서로를 탐했다.

“이건, 벌이 아니잖아…. 이건….”

“쉿, 엘레나.”

원피스에 스친 손이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그가 점점 깊게 들어올수록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를 취하던 입술은 목을 거쳐 쇄골로 향했다.

사탕을 먹듯 살을 파고드는 이가 붉은 자국을 남겼다.

“카루스….”

짧게 끊어지는 호흡 소리에 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 그 이름을 지겹도록 부르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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