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그는 온몸이 뻐근한 듯 긴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한 번 켰다.
그러곤 양손을 겹쳐 머리 뒤편에 갖다 대었다.
꼭 곧 잠들 것 같은 포즈를 하곤 말을 이어 나갔다.
“이 길을 쭉 따라서 나가면 아가씨가 원하던 작은 구멍이 나와. 여기 벽이 꽤나 두꺼워서 나가는 데 오래 걸리긴 해. 근데 나갈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거, 맞지?”
엘레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밤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기억해. 난 데카루스의 친구기도 하다는 걸.”
활짝 웃던 그의 표정에서 순간 싸늘함이 느껴졌다면 착각일까.
그 말은 완전히 놓아준다는 뜻이 아니란 거겠지.
마치 산책 나가는 강아지처럼 잠시 나갔다 오라는 뜻인 거야.
“너… 이름이 뭐야?”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삭. 이삭 에이브런.”
“이삭….”
앙증맞은 입술이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미소 지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이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그럼 아가씨,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그는 허리를 숙인 채 손을 두어 번 말며 예를 차렸다.
곧바로 뒤를 돌아 제 갈 길을 가는 그의 얼굴에는 왠지 모르게 미소가 핀 것 같았다.
엘레나는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기다리곤 이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럼 가볼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던가.
뭘 해도 실패했던 저택 탈출이 이렇게나 쉽게 풀리다니.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엘레나는 예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마치 백설 공주가 된 듯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숲속의 동물들도 그녀를 응원해주는 듯 맑은 소리를 내주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녹음이 우거진 숲을 지나자 조금씩 그가 말한 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벽이다!”
푸릇한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벽이 제 위용을 뽐냈다.
회색빛이 감도는 벽은 시릴 만큼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콘크리트 벽 못지않게 단단해 보이는 벽 위에는 아무도 나갈 수 없도록 거친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저기에 찔리면, 으….”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기분에 팔짱을 끼고 몸을 떨었다.
그렇게 속도를 내어 더욱 빨리 걷자 아까 그가 말한 조그마한 구멍이 보였다.
“뭐야, 저거 사람은 지나갈 수 있는 거야?”
아무리 봐도 진짜 ‘개’구멍같이 생긴 구멍은 사람이 지나가기엔 너무나도 좁아 보였다.
“그래도 있는 게 어디야.”
엘레나는 치마를 걷어 올리며 구멍 속을 바라보았다.
커플들의 말소리, 귀족 영애들의 구두 소리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기대에 잔뜩 부푼 엘레나는 엉금엉금 거북이처럼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돌부리에 스친 무릎에선 통증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드디어 몇 주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엘레나는 환희에 찼다.
“여긴….”
아르데오 공국의 중심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블랑슈 가였다.
이 거리는 이름처럼 새하얀 저택들이 많아 블랑슈라고 지어졌다고 한다.
또 공국의 행정 중심지답게 물가가 가장 비싼 동네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역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확실히 지체 높으신 귀족 영애와 영식들이 많이 보였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옷차림은 그들과 완전히 대조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기죽을 리 없었다.
“차라리 이게 더 편해.”
발걸음이 가벼웠다.
먹구름으로 덮여있던 온 세상이 맑아진 느낌이랄까.
그녀는 곧장 중심가로 향했다.
멋들어지게 물을 뿜는 분수대를 기점으로 상점과 식당이 즐비했다.
엘레나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 듯 거리로 향했다.
그러곤 이전에 들렀던 식당과 상점을 방문했다.
그곳의 주인들은 엘레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또 왜 오랜만에 왔냐며 장난스레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들과의 대화가 기뻤다.
늘 긴장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던 저택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 어디선가 목청껏 외치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저녁 9시! 저녁 9시에 불꽃놀이를 진행합니다! 장소는 이곳 분수대 앞입니다!”
“불꽃놀이?”
하늘을 형형색색 수놓는 불꽃놀이는 엘레나가 이 도시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이따 꼭 봐야지.”
지금은 해야 할 것이 있으니까.
바로 에이든을 찾는 일.
분명 수소문을 하면 에이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에이든….”
그는 사교성이 좋아서 주변엔 항상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또 그의 성격은 햇살처럼 맑아서 사람들이 잘 따르기도 했다.
“그러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그 역시 그녀를 찾고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엘레나는 다시 거리로 향했다.
「Restaurant Clair」
집시 시절 가장 자주 들렀던 식당, Restaurant Clair.
해양 국가인 아르데오의 명성에 걸맞게 랍스타와 문어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다.
3대째 운영하는 아주 역사 있는 장소라 문화관광국에서 상을 수여받은 전례가 있다.
또 그녀 역시 예전부터 자주 들렀던 곳이라 아주 친숙한 곳이다.
딸랑-
“수!”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에 푸른 눈.
여리지만 힘은 무지막지하게 센 오랜 친구, 수.
거대 생물을 다뤄서 그런지 호탕한 성격에 항상 쾌활한 친구다.
앞치마를 입고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의 팔목에는 여전히 크고 작은 상처가 많이 보였다.
“어머, 엘레나 아니야?”
수는 그녀를 보더니 멀리서부터 뛰어와 펄쩍, 하고 안겼다.
엘레나는 반동에 의해 중심을 못 잡고 살짝 휘청거렸다.
그녀는 얼굴을 맞대며 인사를 하더니 몸을 터질 것처럼 껴안으며 기쁨을 표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엘레나. 왜 요새 들르지 않았어?”
그녀는 엘레나의 볼에 소리 나게 입맞춤을 하더니 반가운 듯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아, 그게 요새…. 바빠서!”
아무래도 대공저에 볼모로 잡혀있다고 할 순 없었다.
수에게까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뭐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까.
“근데.”
수는 눈에 불을 켜고 주위를 기웃거렸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모습이 꼭 귀여운 고양이 같았다.
“같이 다니던 네 쫄병은?”
“쫄병?”
순간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엘레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응, 에이든 말야. 매일 네 뒤꽁무니 쫓아다녔잖아.”
“뭐?”
에이든이 쫄래쫄래 따라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쫄병이라니.
순간 터져 나온 웃음은 멈출 새 없이 계속되었다.
엘레나는 깔깔 웃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아, 진짜 너무해. 에이든이 쫄병 같았어?”
“누가 봐도 네 쫄병이잖아. 아니야?”
아무래도 수는 진심인 것 같았다.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엘레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자자. 웃는 건 나중에 하고 일단 앉아. 오래간만에 얘기 좀 하자.”
수는 테이블 밑에 있던 등받이 없는 동그란 나무 의자를 꺼냈다.
그러곤 멋들어지게 손을 뻗어 자리로 안내했다.
“아, 고마워.”
“그래서 에이든은? 어디 갔는데? 아직까지 잠이라도 자는 거야?”
“후….”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엘레나는 깊게 들이켠 숨을 내쉬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진지해.”
수는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당혹스러운 듯 고개를 기울였다.
“사라졌어.”
그 순간 식당 내부엔 한차례 적막이 감돌았다.
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거북이처럼 목을 뺐다.
“뭐?”
“사라졌어. 에이든.”
그녀는 심각한 상황인 걸 인지했는지 식당 팻말을 영업 중에서 영업 종료로 바꿔 달았다.
그러곤 바로 앞에 앉아 양손을 맞붙잡고 물었다.
“사라져? 에이든이? 왜?”
엘레나는 그동안 있었던 모든 자초지종을 빠짐없이 설명했다.
물론 지금 대공저에서 살고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불법 노예상에게 잡혀 탈출했다고 에둘러 말했다.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수는 의아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가?”
“아니, 나 지금 이해가 안 가. 에이든도 며칠 전에 널 찾으러 왔는데? 너희 만난 거 아니었어?”
“뭐…?”
순간 누가 머리를 망치로 친 것처럼 멍해졌다.
에이든이 먼저 찾아왔다니.
이 무슨 엇갈린 운명인가.
“무슨 소리야. 에이든이 찾아오다니.”
“에이든도 불법 범선 얘길 하면서 널 찾으러 왔어. 너희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뭐…?”
그래도 일단은 안심이 먼저 됐다.
그가 목숨은 부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잠깐, 잠깐만. 나 너무 혼란스러워서.”
수는 한숨을 쉬더니 이내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주었다.
“에이든도 꽤 널 오래 찾으러 다닌 것 같았어. 애가 얼이 빠져있던데?”
“하… 언제? 언제 왔었어?”
“며칠 안 됐어. 3일 정도?”
3일만 더 일찍 나왔어도 그를 만날 수 있는 거였는데.
엘레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떨궜다.
“에이든이 오면 다시 말해줄게.”
“하지만….”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줄였다.
에이든이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그녀는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았다.
수는 잠시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가자미눈을 하곤 입을 뗐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 아니! 고마워! 수, 정말 너밖에 없어.”
말을 조금 더듬긴 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수는 조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 같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너한테 다른 냄새가 난다?”
수는 고개를 푹 박고 산책하는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댔다.
“뭐? 무슨….”
“귀족 냄새. 이거 향수 냄새 아니야?”
그녀는 어류를 다루는 일을 했기에 냄새에 예민했다.
그걸 생각하지도 못하고 막 안아대다니.
아마 데카루스의 세욕제에서 나는 향인 게 분명하다.
그가 그녀를 매일같이 안고 자는 바람에 향이 밴 것이다.
수는 다시금 그녀의 목 주위에 대고 한 손으로 부채질하며 향을 맡았다.
그러더니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갸웃거렸다.
“흐응…. 너, 귀족 영식과 만나는 거 아니야? 이거 남자 향수 냄샌데?”
“아, 아. 그게. 아까 귀족 영식이랑 잠깐 부딪쳤어. 그, 그래서! 그새 옮았나 봐.”
지금 상황에서 내뱉을 수 있는 변명이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당황한 얼굴은 순간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대체 누굴 만나고…!”
“뭐? 아니, 아니야! 아! 나 이만 가봐야 해, 수. 고맙고 또 올게!”
“엘레나!! 레나!!!”
딸랑-.
등 뒤에선 그녀를 붙잡는 외침이 메아리쳤다.
하지만 엘레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