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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23화 (23/117)

23화.

놀란 엘레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술을 가렸다.

동그랗게 뜬 눈이 진한 시선과 마주했다.

한차례 적막이 흐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날 내보내 줘.”

“…….”

짙은 눈썹이 위아래로 짧게 움직였다.

데카루스는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나도 여기 말고 바깥에 나가고 싶다고.”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듯한 행동에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할 일 많아. 돌아가.”

“못 나가게 하는 이유가 대체 뭔데?”

“나가, 엘레나. 두 번 말했어.”

그는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마치 지금 나가지 않으면 큰 벌이라도 줄 것처럼 말이다.

“싫어. 당신이 내보내 줄 때까진 안 나가.”

“엘레나.”

그는 답답한 듯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녀 역시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금은보화를 숨겨두었길래 저리 꽁꽁 숨기는 걸까.

“당신 나 사랑하는 거 맞아?”

엘레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답답함을 토로했다.

드라마 같은 데서도 보면 사랑하면 뭐든 다 해주던데.

아무래도 이 인간은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것 같다.

“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비딱하게 틀며 되물었다.

“사랑하냐고, 나를.”

엘레나는 인상을 팍 쓰고 따지듯이 말했다.

그러자 그는 깊게 들이켠 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매번 말했잖아.”

그는 가냘픈 턱을 조심스레 쥐어 잡았다.

덕분에 가까워진 얼굴 사이론 서로의 호흡이 오고 갔다.

간지러운 느낌에 반사적으로 살며시 눈이 감겼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래, 여러 번 말했지.

그렇다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엘레나는 감았던 눈을 뜨며 그의 두 손을 맞잡았다.

“그럼 나가게 해줘.”

적막했던 공기엔 어느 겨울날처럼 한기가 돌았다.

이윽고 그의 표정은 빠르게 굳어 수평선을 그었다.

“이만 돌아가.”

그는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허무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왜, 대체 왜.

그 이유라도 묻고 싶었다.

여전히 책상에 걸터앉은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싸한 공기 아래로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미동조차 없는 그녀는 허수아비처럼 꼿꼿이 자리를 지켰다.

“내 말에 대답해, 카루스.”

그의 입술에 감도는 숨결은 짐이 실린 듯 무거웠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데카루스는 펜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위험해.”

위험?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밖에 나가는 게 위험하다고?

집시처럼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위험하다니.

그녀는 조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내 생각엔 당신이 있는 이 집이 더 위험한 듯싶은데.”

그의 눈썹이 살짝 떨리는 걸 보았다면 착각이었을까.

타격을 받았는지 쌤통이다 싶었다.

“할 일 많아. 이만 나가.”

사막처럼 건조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무신경한 그를 확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재수 없어.”

엘레나는 뒤를 돌아 빠르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하….”

그녀가 사라진 방 안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싼 데카루스가 홀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깊게 들이켠 숨은 입술을 타고 낮게 새어 나왔다.

“엘레나….”

* * *

쾅-

전차의 폭발음처럼 거대한 소음이 저택 내부를 휘어 감쌌다.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난 듯한 엘레나의 입술이 뾰족 튀어나왔다.

“재수 없는 새끼. 재수 없는 새끼…. 저주받아 죽어라….”

그녀의 눈은 곧장 사람을 한 명 죽일 것처럼 독기가 가득했다.

당장 누군가 어깨라도 치고 간다면 그 사람의 목숨은 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은 잘 늘어나는 젤리 같았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분위기를 풍기며 복도를 배회하고 있을 무렵 한 손에 간식 바구니를 쥔 제인과 마주쳤다.

“아가씨…?”

그래, 제인이 당황스러울 만했다.

아침까진 멀쩡했던 아가씨가 갑자기 이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복도를 나돌아다닌다니.

엘레나는 퀭한 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인….”

“아가씨 무슨 일 있으셨어요?”

당황한 듯한 제인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니, 아무 일도….”

엘레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괴상하게 웃어 보였다.

“아가씨….”

“재수 없는 새끼….”

그 말을 들은 제인은 그녀를 잠시 멈춰 세웠다.

그러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었다.

“재수 없는…. 아, 혹 대공님과 싸우신 건가요?”

제인도 그를 재수 없는 놈이라고 인지하고 있다니.

퍽 웃겼다.

“아니. 일방적으로 내가 얻어맞은 것 같은데….”

그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돈이 있나, 권력이 있나.

그렇다고 말발이 센가.

“조련하긴 뭘 조련해….”

짜증 나서 하도 머리를 친 탓에 두피가 아파 왔다.

그를 믿는 게 아니었다.

아까 조련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자신만만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엘레나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네…? 무엇을요?”

“탈출할 거야.”

동태 같던 그녀의 눈빛이 순간 형형하게 빛났다.

“네? 무슨….”

“이 넓은 저택에 개구멍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

“네?”

“제인, 나 어디 갔는지 물어보면 모르겠다고 해.”

“아가씨! 아가씨!!!”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하지만 엘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뛰쳐나갔다.

“하아… 하아….”

오랜만에 뜀박질을 한 탓일까.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중간에 걸음을 멈추었다.

“운동 부족이야….”

한참을 헐떡거리던 엘레나는 갈림길 앞에 섰다.

연구를 하는 박사님처럼 턱에 손을 대곤 한참을 고민했다.

“흠….”

정문으로 통하는 길 대신 도서관 쪽의 샛길을 택했다.

아무래도 도서관 쪽은 어두운 숲길도 있고 인적도 드무니 조그마한 쥐구멍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음, 풀냄새.”

오랜만에 느껴보는 풀 내음에 온 신경이 반응했다.

예전에는 풀 내음, 꽃 내음을 마음껏 즐기며 떠돌아다녔는데 지금은 저택에서 콕 박혀있으니 그런 것조차 쉽게 할 수 없었다.

“다 그 사이코 때문에 그렇지. 나처럼 멀쩡한 인간을 그렇게 잡아두면 쓰나.”

그녀는 훈장님 같은 말투로 혼잣말하며 오솔길을 걸었다.

절로 나오는 콧노래에 새들도 장단을 맞춰주는 것 같았다.

“차라리 새로 환생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새로 태어났다면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을 텐데.

아무리 인간들의 위협을 받아도 말이야.

“새장 안의 파란 새 같아.”

엘레나는 한숨을 푹 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위에는 무리 지은 작은 새들이 수평선을 그리며 활공했다.

“부럽다, 너희들은….”

“누굴 보며 말하는 거야?”

“새…가 아니라….”

순간 적막을 깨는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고개를 쭉 내밀었다.

“다, 당신… 뭐야…?”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엘레나는 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한껏 눈을 찌푸린 사내는 손을 들어 날아다니는 새를 찾는 시늉을 했다.

“아, 저기 저 새들 말하는 거야?”

“당신 뭐냐니까?”

엘레나는 낯선 이를 본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뾰족 세우며 경계했다.

“뭐냐 물으신다면 뭐라고 답해드려야 할까요, 아가씨?”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예를 차렸다.

아가씨라고 부르는 걸 보면 분명 이 저택에서 근무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상한 건, 한 달 동안 이곳에 있었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라는 것이다.

제인처럼 연한 갈색 머리에 진한 밤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는 미소년처럼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의 얼굴에는 칼에 베인 듯 짙은 상처가 남아있었다.

“누구야, 당신.”

엘레나는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낯선 남자를 향해 겨눴다.

“아가씨는 경계심이 많구나?”

그는 천천히 다가와 그녀가 쥔 나뭇가지를 톡톡 건드렸다.

이 남자, 도대체 누군데 이렇게 여유로운 거지.

스파이? 행정관 중 한 명?

딱 봐도 시종은 아닌데.

“데카루스의 친구.”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순간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얼음처럼 굳었던 몸은 금세 녹아내려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가 툭 하고 떨어졌다.

“하…!”

그가 데카루스의 친구라니.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을 뭘 이렇게 뜸을 들였는지.

여유 있게 미소 짓던 그는 그녀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유심히 표정을 살펴보았다.

“아까보다 낫네.”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웃으니 더 낫다고, 아가씨. 데카루스가 왜 그렇게 싸고도는지 알겠어.”

헛소리만 하는 그와는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어 보였다.

“그의 친구라면 내 편이 아니겠네, 잘 가.”

그녀는 쿨하게 뒤를 돌며 그를 보내주었다.

필요치 않다면 미련 없이 버리는 것.

떠돌이 생활 철칙 중 하나이다.

“나가고 싶지?”

마음을 꿰뚫어 본 걸까.

점쟁이 같은 그의 말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어떻게 알았어?”

그러자 그는 가까이 다가와 눈을 맞추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엔 분홍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엉겼다.

“아가씨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미소를 짓곤 나무 앞에 털썩 기대어 앉았다.

우거진 녹음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그의 연한 머리칼을 은은하게 밝혔다.

“도와줄까?”

반쯤 풀린 눈으로 눈웃음치는 그의 모습은 꼬리가 백 개 달린 구미호 같았다.

드라마에서 구미호를 믿으면 꼭 변을 당하던데.

“하지만 당신… 데카루스의….”

“그래, 친구지. 하지만 난 아가씨의 친구도 되고 싶은걸?”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꼭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았다.

외형은 아주 건장한 성인 남자인데 말이다.

“그럼… 날 어디로 데려가 줄 건데?”

“아가씨가 원하는 바깥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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