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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22화 (22/117)

22화.

오전 8시 30분.

아침 식사를 하는 시간이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아침 식사란 건 거의 해 보지 않았기에 그녀에겐 어색하기만 했다.

요새 워낙 잘 먹은 탓에 얼굴엔 살짝 살이 오른 듯 보였다.

앞에서 얼쩡거리는 그는 여느 때처럼 깔끔한 차림새였다.

저 제복은 지겹지도 않은지 매일같이 입는다.

누가 보면 앙드레김인 줄 알 테다.

근데 이렇게 보니 잘생기긴 엄청나게 잘생겼다.

뱀파이어처럼 흠집 없는 새하얀 얼굴에 붉은 눈이라니.

이렇게 보니 속이 시커먼 악마처럼 보인다.

원래 로망이 흑발 적안이었는데 저 재수 없는 놈 때문에 다 깨졌다.

“간밤에 잠은 잘 잤고.”

정적을 깨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어.”

그녀는 버섯 소스를 곁들인 어린 양 뒷다리 스테이크를 자르며 입을 열었다.

“눈이 퀭한 것 같은데. 어제 보던 책 생각이라도 했나 봐?”

데카루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선 저 얼굴을 그냥 때려버리고 싶었다.

“시끄러워. 밥이나 먹지?”

어제 일만 생각하면 아주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폭주했다.

그래서 밤새 꿈속에서도 데카루스, 저놈을 어떻게 골려줘야 되는 걸까 하고 생각하느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는 내내 그의 얼굴이 사방천지에 나와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아님 어젯밤 당신이 원하는 걸 해주지 않아서 골이 난 걸까.”

대체 아침부터 왜 이렇게 촐랑거리는 걸까.

마음 같아선 확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제발 식사나 하시죠, 대공 전하.”

“당신이 그렇게 불러주니 좋아. 한 번 더 불러줘.”

골이 아파 양손을 들어 머리를 잠시 지그시 눌렀다.

분명 이 자리가 혈 자리라고 했으니까.

“왜, 계속 생각나? 그래서 머리가 아픈 거야?”

앞에 있는 미친 인간이 계속 신경을 긁는다.

아무래도 곧 폭발할 것만 같았다.

“당신 때문에 그런다, 왜!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해.”

엘레나는 화를 내며 거칠게 스푼과 포크를 집었다.

소리를 내며 샐러드를 집던 찰나 그가 쐐기를 박아버렸다.

“그럼 오늘 밤에 할까?”

“뭐?”

순간 그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미동도 없이 빤히 눈만 껌뻑였다.

“당신이 나 때문에 그렇다며.”

“하….”

그의 정신 나간 소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 인간, 치료가 시급하다.

“당신 취향이 ‘대물 공작’ 아닌가?”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빵에 버터를 발랐다.

엘레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속으로 이너 피스를 외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곤 이를 악물며 또박또박 말했다.

“…득츠르그(닥치라고).”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진 않는데 말이야.”

새침하게 식사를 하는 데카루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잘린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의 태평함에 할 말이 없었다.

엘레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놓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잘생겼으면 잘 생겼다고 말해도 돼.”

“미친….”

속으로만 읊던 말이 입 밖으로 삐져 나왔다.

이건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앞에 있는 인간이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요새 당신이 나와 친밀해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아.”

그는 식사를 하다 말고 다시 헛소리를 내뱉었다.

대체 언제쯤이면 멈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친밀이라니.

그와 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단지 그의 뛰어난 상상력 덕택이겠지.

“이것 봐. 처음엔 나와 말도 잘 안 섞었잖아.”

“…….”

어이없는 그의 말에 포크와 나이프를 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반쯤 접힌 눈으로 귀엽다는 듯 마주 보는 그의 눈이 싫었다.

게다가 콧방귀나 뀌면서 웃다니.

괘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 결혼식이 다가오는 건 알고 있지? 앞으로 3일 뒤. 드레스는 다 맞췄다고 들었어.”

“후… 그래.”

그녀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결혼이 다가온다는 생각에 착잡해진 모양이다.

“아, 그리고 제인에게 궁중 예법을 가르치라고 일렀으니 배우도록 해.”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구겼다.

“결혼식만 하는데 뭘 궁중 예법까지 배워.”

“나중에, 아주 나중에 폐하께 인사드릴 날이 올 거야.”

“뭐… 그래….”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결혼을 하면 그녀 또한 권력이 생길 테니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도는 더 많아진다.

대답은 그렇게 해도 절대, 절대 황제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 * *

그렇게 길고도 짧은 식사가 끝을 맺었다.

“아… 체하는 줄 알았네.”

아침 일찍부터 재수 없는 얼굴을 봐야 한다니.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아침이었다.

초여름이 다 되어 그런지 볕이 따가웠다.

저택 내부를 걷던 엘레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더럽게 좋네.”

커다란 아기천사가 장식된 분수에서 차오르는 물이 상쾌하게 터져나갔다.

얼굴까지 튀어 오르는 차가운 물은 그녀의 더위를 잠시 식혀주었다.

엘레나는 저택 가운데 있는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 팔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또 뭘 하나.”

너무 세게 기지개를 켠 탓일까.

뼈에서 뚝 소리가 난 엘레나는 허리를 콩콩 치며 입으로 소리를 냈다.

“늙었나 봐.”

이곳에서 하는 일이라곤 딱히 없었다.

제인과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도서관에 가서 몰래 음서를 읽거나, 아님 이렇게 광합성을 하며 산책하기 정도?

아무리 큰 저택이라 할지라도 그녀에겐 아주 작은 장난감 세상일 뿐이었다.

“밖에 나가고 싶어….”

아무리 이곳에 온갖 것들이 다 있다고 해도 바깥세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이들의 뛰어노는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그저 보통의 것들을 즐긴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역시 평범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던가.

이곳은 자유로운 감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로운 것들이 필요했다.

그에게 졸라볼까.

이제 그를 조련하는 법을 알 것 같기도 하고.

엘레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놈의 저택은 왜 이렇게 넓어서.”

분수대에서 저택 정문까지는 꽤 가까웠다.

그의 집무실은 2층 복도 맨 끝에 있었고 그곳까지 가기 위해선 최소한 열 개 이상의 문을 지나야 했다.

엘레나는 기다란 밤색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열심히 계단을 올랐다.

덕분에 복도엔 쿵쿵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그의 집무실 앞에 다다랐을 때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이 이상으론 못 지나가십니다.”

위병들은 재빠르게 날카로운 검을 꺼내며 그녀를 견제했다. 꼭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버릴 것처럼.

“뭐 하자는 거야?”

“대공님께서 집무 중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녀가 아무리 밖에서 들어온 사람이라도 이곳에서 그들을 통제할 권력은 충분했다.

이렇게 하대받는 건 여기 와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데카루스에게 할 말이 있어. 비켜.”

“죄송합니다.”

“하…!”

그들의 반응에 기분이 상한 엘레나는 한숨을 푹 쉬며 기사들을 똑바로 노려봤다.

‘감히 너희가 안 비켜’라는 눈빛을 하며 고개를 두어 번 꺾었다.

그렇게 그대로 문을 향해 직진하자 위병들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아…! 이게 무슨…!”

묵직한 건틀렛으로 짓누르는 손아귀의 힘은 매우 강력했다. 이대로 가다간 어깨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표정을 구기며 그들을 뿌리치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써야 했다.

뭐, 들어갈 방법은 많다.

그 방법이 좀 과격하긴 하지만.

예를 들면,

“꺄악!!! 살려줘!!!”

호랑이를 직접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하기.

엘레나는 눈을 꼭 감고 복식호흡으로 배 깊은 곳에서부터 소리를 만들어 냅다 질렀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복도 끝까지 울려 퍼졌다.

심지어 메아리까지 울려 퍼질 정도면 말을 다한 것이다.

쾅-!!!

빙고.

한껏 구겨진 얼굴을 보니 그가 얼마나 다급했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겉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도 못한 데카루스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방 밖으로 나왔다.

“엘레…!”

얼굴을 찌푸린 그와 눈이 마주치자 엘레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한 손을 들어 인사했다.

“하하… 안녕.”

순간 마주친 그의 얼굴은 직선을 그리며 천천히 굳었다.

마치 괴상한 벌레를 본 듯한 표정을 한 데카루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이게 무슨….”

“못 들어가게 하잖아. 얘네가.”

엘레나는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엄마한테 이르는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고자질했다.

“하….”

데카루스는 한 손을 얼굴에 갖다 대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곤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경비병을 보며 무섭게 말했다.

“앞으로 엘레나의 출입은 반드시 허용한다.”

기사들은 고개를 곧추세우며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없었던 그들의 태도에 엘레나는 기분이 나쁜 듯 코웃음을 쳤다.

“예, 전하.”

이윽고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방 안으로 이끌었다.

“이리 와.”

쾅-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의 몸은 그의 팔 안에 갇혔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은 그의 분노를 방증했다.

“뭐 하자는 거야.”

높낮이 없던 데카루스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어.”

죄책감 없는 초롱초롱한 눈빛에 그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말고. 누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라고 했지?”

이를 악문 그의 모습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이렇게까지 화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어… 그러니까….”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 갔다.

무어라고 해야 할지 예상 답안은 짜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만 나가.”

그는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그녀를 흘겨보았다.

할 말이 있는데 기사들이 안 비켜주니까 소리를 지른 거다.

그의 신경을 거스르긴 했지만 위아래로 훑어보는 건 기분 나빴다.

“그래, 미안해. 미안한데 그런 표정은 짓지 말지? 재수 없어.”

억울했다.

한 번 소리 지른 게 그렇게 잘못한 일인가.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

“재수 없다고, 당신.”

그녀는 누명을 써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반짝반짝 빛나 청옥을 올려놓은 것 같았다.

“하…!”

그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똑바로 시선을 맞춘 뒤 무거운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다신 이런 장난 하지 마. 그땐 정말 가만 안 둬.”

그는 여린 어깨를 꽉 붙잡고 경고하듯 말했다.

그의 고압적인 태도에 기분이 나빴다.

자기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일까.

“난 당신 소유물이 아니야, 데카루스. 이래라 저래…!”

순간 여린 살에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그에 완전히 파묻힌 그녀의 입술은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고개를 기울이며 키스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어린 짐승을 잡아먹는 사자처럼 거칠었다.

“여기 이 저택의 모든 것들이 다 내 것이야.”

“아…!”

단단한 사내의 몸을 밀쳐내 보려 애썼지만 가당치도 않았다.

딱딱한 이가 빨갛게 드러난 예민한 살을 천천히 깨물었다.

“당신의 그 조악한 입술조차도.”

“카루스…!”

두 사람의 거칠어진 호흡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하아….”

데카루스는 그녀를 들어 올려 책상 위에 앉혔다.

맞닿은 입술 사이엔 뜨거운 호흡이 천천히 오갔다.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대답해.”

“…….”

대답이 없자 그가 어깨를 꽉 죄며 입을 열었다.

“읏…!”

“아니면 한 번 더 그 입술을 막아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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