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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21화 (21/117)

21화.

그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반쯤 풀린 눈은 심장이 아릴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의 얇고 긴 속눈썹은 바비 인형처럼 자연스레 올라가있었다.

“자, 장난치지 마.”

엘레나는 고개를 휙 돌려 그를 피했다.

볼에 살짝 맞닿은 입술이 립밤을 바른 것처럼 촉촉하게 느껴졌다.

점점 달아오르는 얼굴에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에 어디도 피할 곳이 없었다.

“진심인데.”

축축하게 젖은 그의 목소리는 사람을 홀리는 구미호처럼 요망했다.

어느새 귓가에 파묻힌 그의 입술이 여린 살을 천천히 훑었다.

입가에 닿은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살며시 벌리며 지분댔다.

온몸은 찌릿찌릿한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호흡이 거칠어.”

“그만해.”

무언가에 동요한 듯한 눈빛은 바람에 넘실대는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엘레나는 일순간 옭아매던 단단한 팔을 밀어내며 그에게서 빠져나갔다.

“갈 거야.”

가녀린 목소리는 어린 양처럼 얕게 떨렸다.

아마 당황한 것이겠지.

그는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럴수록 더 괴롭혀주고 싶은데.”

통보하듯 도서관을 빠져나온 그녀의 볼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갰다.

더운지 괜스레 양손으로 부채질을 하던 엘레나는 혹여 시종들이 볼까 고개를 푹 숙였다.

“하… 미쳤어, 미쳤어….”

엘레나는 민망했는지 벌게진 볼을 짓누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미쳤어, 미쳤어. 엘레나.”

엘레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툭툭 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온몸이 열기로 가득했다.

왜 하필 그때, 거기서, 그 인간을 마주쳐서!

“하….”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매일 팽팽 노는 게 분명하다.

아까는 급하게 떠나더니 왜 또 도서관에서 마주치냐고!

엘레나는 붉어진 얼굴을 쥐어 잡고 헐레벌떡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 인생….”

간신히 방에 도착한 엘레나는 침대에 뻗어 숨을 골랐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온통 얼굴이 빨개진 기억밖에 없었다.

지금도 살갗이 따끈따끈한 걸 보니 여전히 붉은 것이겠지.

“에휴….”

그렇게 푹 한숨을 쉬고 있을 무렵 익숙한 노크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똑똑-

“들어와.”

“아가씨!”

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연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올린 제인이었다.

그녀는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제인!”

엘레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새하얀 손 위에는 마카롱과 찻주전자가 담긴 트레이가 올려져 있었다.

“와, 이게 다 뭐야?”

“딸기 마카롱과 서에스티아 왕국에서 들여온 실버티랍니다.”

엘레나는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 창가에 위치한 티테이블에 앉았다.

그러곤 마카롱을 집어 단숨에 입에 넣어버렸다.

“너므 마이어….(너무 맛있어….)”

입 안에 도는 새콤달콤한 딸기와 딸기 향이 나는 필링까지.

정말 마카롱은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디저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인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오물거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드세요. 근데 아가씨, 얼굴이….”

“얼굴? 아….”

아직까지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얼굴이 티가 났나 보다.

당황한 엘레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제인은 무언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아, 아니. 그냥 데카루스가….”

아까의 장면이 생각나 말끝을 살짝 흐리자 제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미소 지었다.

“여전히 둘 사이가 좋으십니다.”

“여전히…?”

그녀의 말에 제인은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아, 아니. 그냥 두 분이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요.”

“잘 지내긴 무슨! 그 인간이랑 단 한 번도 잘 지낸 적 없어!”

엘레나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그와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참고 사는 거다.

“내가 다 참고 사는 거지….”

제인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 꼬리를 올렸다.

“알았어요. 아가씨, 그럼 푹 쉬세요. 이만 나가볼게요.”

“응, 내일 봐.”

엘레나는 조금 아쉬운지 그녀가 방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시선을 놓지 않았다.

쾅-.

그녀가 나가자마자 헛헛해진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엘레나는 노을 진 창가를 바라보며 다시 마카롱을 들었다.

우울한 마음을 달콤한 디저트로라도 채워 넣어야지 하는 심산이었다.

우아하게 찻잔을 들며 창가를 바라보자 때마침 정원을 지나는 데카루스가 보였다.

“쟨 또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노을 탓인지 햇살에 비친 붉은 얼굴에 아까 그와의 장면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눈알을 굴리던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짜증 나….”

* * *

도서관에서 나온 데카루스의 얼굴에 노을빛이 붉게 비쳤다.

혹 그게 아니라면 그녀를 품에 안은 이유일 것이다.

“왜 이리 뜨거운지.”

그는 혹여 시종이라도 만날까 얼굴을 푹 숙인 채 걸음을 빨리 했다.

그의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정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도서관에서 일직선으로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정원의 후문이 나온다.

그는 장미가 예쁘게 핀 아치형 입구로 들어갔다.

“엘레나….”

아까 그녀와 정원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당황한 그녀의 모습이 꽤 귀여웠는지 입 꼬리에 미소를 띠며 피식 웃었다.

“귀엽긴.”

그렇게 발걸음이 닿은 곳엔 어머니를 품은 비석이 있었다.

누군가 손을 댔는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머니….”

양손을 맞댄 그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리운 어머니에 대한 슬픔과 애정이 담긴 기도리라.

“왜….”

어머니는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아마 열한 살쯤이었을 것이다.

건강하신 어머니가 쥐도 새도 모르게 돌아가신 것은.

‘모든 게 전부 내 잘못이야….’

작은 데카루스는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매일 밤 울었다.

더 이상 잠들기 전 동화를 읽어주시던 따스한 목소리, 눈을 감겨주던 부드러운 손길을 느낄 수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

그는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검은 죄책감이 붉은 심장을 조금씩 갉아 먹었다.

그 이후 데카루스는 미친 듯이 검술, 창술, 궁술 등 각종 훈련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하나뿐인 아버지마저 잃고 싶지 않았기에.

하지만 그 역시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독한 술을 들이켜며 국무는커녕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혼이 나간 채 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아버지….’

하지만 달이 휘영청 밝던 어느 날,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어머니의 초상화 바로 앞에서.

주변엔 술병이 즐비했고 피우다 남은 담뱃재가 바닥에 그을려 있었다.

작은 데카루스의 세상은 그렇게 빠르게 무너졌다.

‘대공 전하, 건국일을 맞아 지하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사면하는 것은 어떠신지요.’

‘그대의 입은 도통 쓸모가 없는 것 같군.’

‘예…? 그게 무슨… 아…! 아!! 전하… 아아악!!!’

어린 나이에 대공이 된 그는 멋대로 자랐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은 듣지 않았고,

‘여…여기 서에스티아에서 드리는 광산 소유권입니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가졌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공허함은 채울 수가 없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잃어만 가는 기분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그러던 어느 날 데카루스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에 대해 알게 된다.

그날은 비가 사무치게 오는 날이었다.

모든 것을 앗아갈 정도로 큰 폭풍이 몰아치던 밤.

지하 서재에 들어간 그는 한 일기장을 발견하게 된다.

「제국력 408년 10월 10일.

신탁이 내려왔다.

베로니카의 아이가 그녀를 파멸할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다.

이 신탁이 제발 거짓이길.」

「제국력 408년 10월 15일.

베로니카가 이상하다.

신탁을 들은 이후로 미친 사람처럼 신경이 날카롭다.

시녀의 말론 베개 밑에 칼이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

「제국력 408년 10월 19일.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다.

어엿한 황후가 된 내 소중한 친구, 베로니카.

부디 이 에스텔을 잘 이끌어 주길.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데카루스.

이 일기장을 보면 아마 난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단다.

하지만 부디 노여워하지 마렴.

삶은 곧 죽음이니.

이 모든 것이 순리란다.

이 몸뚱어리는 원래부터 신의 것이었으니.

하늘의 부름에 따라 그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

그러니 아들아.

부디… 부디 슬퍼하지 마렴.」

‘어머니…….’

그날, 데카루스의 세상은 무너졌다.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알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확실한 증거도, 증인도, 아무것도 그를 대변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황후라니.

‘하… 하하…. 하하하….’

데카루스는 마지막으로 울었다.

어렸던 소년의 두 손을 잡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장 난 인형처럼 망가진 그는 다짐했다.

‘부숴버릴 거야….’

황후를 죽이기로.

그의 모든 것을 빼앗은 그녀를 죽이기로 그날 다짐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옛 생각에 빠져있던 데카루스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뉘엿뉘엿 저물던 해는 자취를 감추고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었다.

길가에는 가로등 지기가 환하게 불을 켜고 있었다.

“엘레나….”

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랐다.

그녀를 만나러 갈 생각에 즐거운 듯 보였다.

끼익-

방 안에 도착한 데카루스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오늘 야외 활동을 많이 한 엘레나가 분명 자고 있을 거라 확신했기에.

“역시….”

그녀는 아기천사처럼 곤히 자고 있었다.

매번 이불을 걷어차는 잠버릇은 여전했다.

“귀엽게.”

데카루스는 천천히 다가가 솜털 같은 이불을 똑바로 덮어주었다.

“으음…. 마카롱… 맛있어….”

꿈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마카롱을 먹나 보다. 입술을 오물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키스한 뒤 옷장 앞으로 갔다.

매번 똑같은 셔츠를 입고 벗는 일은 조금 귀찮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이 일을 거른 적은 없다.

‘카루스, 네가 장성해서 제복을 입은 모습을 꼭 보고 싶구나.’

어머니는 햇살같이 따듯한 분이셨다.

그가 넘어졌을 때 우실 정도로 마음이 여린 분이기도 하셨지만 말이다.

“카루스….”

그 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미동도 없는 걸 보니 잠꼬대인 듯싶다.

그는 셔츠를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시녀들에게 물을 받아놓으라고 했으니 욕실로 가야 했다.

“데카루스….”

다시 한번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번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기다란 속눈썹에 작지만 오뚝한 코, 그리고 앙증맞은 입술.

그는 차례대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아깐 그렇게 부끄러워하더니.”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볼에 갖다 대었다.

난로처럼 따듯한 볼이 꼭 복숭아 같았다.

데카루스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붉은 입술에 입맞춤했다.

“엘레나.”

창가를 타고 들어온 달빛이 그녀를 밝게 비추었다.

그는 새하얀 손을 잡고 나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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