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도저히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기에 애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헛기침을 해 보기도 하고 침을 삼켜보기도 했지만 부끄러움이 가시질 않았다.
“아, 그래?”
그는 교활한 악마처럼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 꼬리를 올렸다.
“됐어. 이제 진짜 갈 거야.”
엘레나는 팔을 치우고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순순히 놔주는 걸 보니 원하는 답을 들었다는 거겠지.
“앉아.”
일어나기가 무섭게 데카루스는 의자를 탁탁 치며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에이든.”
그가 내뱉은 이름 석 자에 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만 같았다.
엘레나는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무슨 소리야. 에이든이라니?”
“에이든이라는 자에 대해 알아봤어.”
“정말…? 정말이야? 에이든, 살아있는 거야?”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기분이었다.
얼굴에 화색이 돈 엘레나는 빠르게 벤치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그래. 살아있어.”
“하… 어디에 있어? 설마 나처럼 팔려 갔다든가….”
“아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더군.”
그녀의 표정은 혼자 원맨쇼를 하는 것처럼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러곤 한시가 급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그를 재촉했다.
“어서 말해줘. 에이든이 대체 어떻게…!”
“그건 나중에 알려주도록 하지.”
“데카루스!!!”
그의 대답에 엘레나의 표정은 빠르게 굳었다.
힘없이 떨어진 손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시선을 피해 장미꽃을 바라보던 데카루스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틀 전, 대공저.
적막한 공기가 가득한 집무실.
책상 위 서류에 파묻힌 데카루스는 한숨을 내쉬며 일에 매진하고 있다.
그때 무렵 고요한 분위기를 깨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이삭. 어쩐 일로.”
이삭 에이브런.
그의 측근이자 전우로서 오랜 우정을 쌓아온 인물이다.
특히 그의 무술 실력은 제국에서 인정할 정도로 뛰어나 황제의 특명으로 기사단장에 임명될 정도였다.
하지만 영원한 우정과 충성을 다짐한 그였기에 황제의 권유를 거부했고, 이것은 다음 날 대서특필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그런 인사치레는 그만두고.”
깍듯이 예를 차리던 이삭은 이내 고개를 들어 장난스레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곤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서류를 번쩍 꺼내 들었다.
“에이든이라는 자, 대체 누구야?”
“왜. 무얼 찾았길래.”
여전히 무덤덤한 반응에 이삭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신상 정보가 담긴 서류를 던졌다.
탁-.
“에이든. 신원 미상.”
“…….”
“……”
“…끝이야?”
긴긴 침묵에 이상함을 느낀 데카루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응, 정말 아무 정보도 없어. 비밀정보원까지 동원해 봤지만 자료가 하나도 없어.”
“…….”
그러자 그는 눈매를 길게 늘어뜨리며 의자에 기댔다.
“그럴 리가 없어. 그게 말이 되는….”
“아니, 말이 안 되지. 그래서 더 재밌다는 거야.”
“무슨 소리야.”
그가 짙은 눈썹을 찌푸리자 이삭은 마치 특종이라도 잡은 기자처럼 입 꼬리를 늘였다.
“9살에 보육원에 첫 입소. 원장의 말에 따르면 부모로 추정되는 사람이 한 명 와서 그를 맡겼다고 했어. 근데 그자의 신상도 알 수가 없어. 마치 누군가 일부러 지운 것처럼.”
말이 안 됐다.
모든 걸 기록하도록 공국법으로 정해놨고 매번 감사를 하는데.
그런데 아무런 정보가 없다….
“그래서 추측해 보건데… 황실 쪽 사람 짓이 아닌가 싶어. 이렇게 기록을 싹 지울 수 있는 자라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데카루스는 눈을 크게 뜨고 이삭을 바라보았다.
“황실…?”
상당히 놀란 듯한 그의 반응에 이삭은 건수 하나 챙겼다는 듯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에이든이란 자, 조심해. 네가 그리 아끼는 황녀님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니.”
고개를 떨군 채 상념에 잠겼던 데카루스는 이내 입을 열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당신이 날 사랑하게 되면 그때 알려주지.”
“사랑? 내가? 당신을?”
어이가 없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사랑할 생각이 전혀 없고.
머릿속엔 그저 이 크나큰 저택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그래. 가볼게.”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자리를 떴다.
“뭐야….”
조금 허무하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에이든의 이름을 들어서 좋았다.
분명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좋은 것이겠지.
“할 일도 없는데 책이나 보러 갈까.”
이 저택은 도서관을 따로 갖추고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저택은 본관, 별관, 도서관 그리고 연회관으로 총 네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무슨 대학교도 아니고….”
정원에서 왼쪽으로 꺾어 앞으로 쭉 걸어가면 오래된 목조 건물이 나오는데 그곳이 도서관이다.
제인이 말해주었는데 이 건물은 500년 정도 되었고, 선조 때부터 책을 좋아하여 매년 큰 비용을 들여 보수 관리한다고 한다.
또 나무로 된 외관 때문에 본관보다 보수비가 더 드는 건물이라고 한다.
끼익-.
“안녕하세요….”
어두컴컴한 분위기는 마치 폐가처럼 으스스했다.
두리번거리며 내부를 관찰하자 저 멀리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아, 안녕.”
시선이 닿은 곳엔 체크무늬 빵모자에 갈색 테의 안경을 쓴 남자가 있었다.
이름표에는 벤자민이라는 예쁜 이름이 적혀있었다.
“어쩐 일로 오셨나요? 혹, 책을 읽으시러….”
그의 표정이 사뭇 밝아진 것 같았다.
하긴 장안의 화제인 그녀가 도서관에 방문했으니 좋지 않을 리가 있으랴.
“응, 뭐. 뭐…. 추천해줄 수 있어?”
“네! 음… 그렇다면 오늘은 에스텔 제국에 대한 역사를 좀 공부하시는 게 어떠시겠어요.”
그는 법전만큼이나 두꺼운 책을 건넸다.
꼭 그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먼지가 자욱이 껴 있었다.
“뭐… 그래. 재미는 없어 보이지만. 벤자민, 네가 추천해준 거니까. 고마워.”
그녀는 상큼한 미소를 뿜으며 양손에 두꺼운 책을 끼곤 2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2층이 좋아.”
나선형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자 책상 없이 책장만 가득한 공간이 펼쳐졌다.
꼭 만화에서 본 것처럼 아늑한 공간이 펼쳐져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여…기! 읏챠!”
큰 방석을 끌어 털썩 앉은 그녀의 머리카락은 오래된 창문으로 들어온 누런빛에 반짝이며 빛났다.
책장에 기대어 앉은 그녀는 소설에 나오는 사색에 잠긴 소녀처럼 어여뻤다.
“자, 그럼 재미없는 책 좀 읽어볼까?”
「에스텔 제국의 종파와 현실」
에스텔 제국은 대표적으로 총 세 개의 종파로 이루어져 있다.
황제파와 황후파 그리고 귀족파.
그 힘은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을 만큼 대등하며 수년간 이어져 온 종파이다.
“이 나라는 참 복잡하게 살아. 무슨 파를 이렇게 나누고 그런담. 아마 정당 같은 건가.”
본래 황제파와 황후파는 서로 하나였지만 황후의 권력이 세지면서 그 세력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첫 번째로, 황제의 건강 악화 이후 황후가 섭정권을 갖자 많은 황제파들이 황후파로 편입했다.
두 번째로, 황태녀 사망 후 황제와 황후의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소문과 황후의 염문설로 귀족파의 규모가 증가했다.
이 세 세력은 서로를 견제하며 곧장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뭐 황제와 황후의 관계가 소홀해졌다고 당파가 나뉘네.”
황제파는 현 황제인 그란디오스 폰 에스티나를 추종하는 당파로써 그 세력은 셋 중 가장 거대하다.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황제파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앞세우며 전쟁 없는 세계를 꿈꾸고 있다….
“에이, 나랑 상관없는 사람들인데 뭐. 됐고, 다른 책!”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엘레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로 앞 책장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음. ‘인간의 종말’. 이건 싫고….
사다리 위에서 여러 종류의 책들을 속속들이 살펴보던 순간 새빨간 책등이 눈에 띄었다.
“제목이 없어…?”
빨간 책을 꺼내 든 엘레나는 호기심에 표지를 먼저 훑어봤다.
하지만 책 표지에는 한눈에 봐도 민망한 제목이 금색으로 적혀 있었다.
「황자님은 너무 커요」
“이래서 숨겨놨구나….”
민망한 듯 뒷머리를 매만지던 그녀는 슬쩍 좌우를 보며 오고 가는 사람이 없나 살폈다.
“흠흠, 나도 어른인데 이런 건 봐 줘야지.”
「그의 뜨거운 무언가가 나를 세게 짓눌렀다.」
“아파요… 황자님…!”
「입가에 터지는 파열음이 온 방 안을 가득 울렸다.」
“크흠… 책이 이래야 재밌지.”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어느새 바깥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엘레나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한번 켠 뒤 아직 못다 읽은 페이지 모서리를 접어 표시해 두었다.
“그럼 다음에 또…!”
음서를 몰래 숨겨놓기 위해 사다리에 올라탄 그녀는 마치 책벌레처럼 기어 높이 올라갔다.
두꺼운 책을 양손 높이 들어 끼워 넣을 때쯤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또, 뭐?”
“꺄악!”
쿵-
바닥을 기는 중저음에 놀란 그녀는 중심을 잃고 흔들거리던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아마 그대로 추락했다면 중상을 입었겠지만,
“카루스….”
눈을 뜬 순간 사내의 두터운 팔이 그녀를 안고 있었다.
“하늘에서 천사를 보낸 걸까.”
“…….”
“아니면 내가 천사를 주운 걸까.”
“뭐, 뭔 소리 하는 거야, 비켜.”
당황한 엘레나는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그의 팔을 세게 쳐내곤 바닥으로 내려왔다.
“아…!”
순간 책 모서리를 밟아버린 그녀의 입술에선 얕은 신음이 흘렀다.
바닥엔 빨간 책들이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리에 바닥을 본 데카루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뭔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여주는 황자님, 대물인 공작님이 너무해….”
“너… 너…!”
망했다.
하필이면 걸려도 이런 책들을 걸리다니.
그는 괘념치 않고 책 제목을 주욱 읊었다.
그 덕에 새하얬던 그녀의 얼굴이 불그죽죽하게 변했다.
“아파요, 공작님….”
엘레나는 토끼처럼 껑충 뛰며 양손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두 뼘이나 나는 키 차이 덕에 가당치도 않았다.
“야!!!”
“엘레나.”
순간 단단한 팔이 가는 허리를 끌어당겼다.
자석처럼 빠르게 끌려간 엘레나는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이거 놔…!”
“말하지 그랬어.”
아무리 고개를 바닥으로 숙여도 소용없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 더욱 가까이 움직였다.
살갗에 맞닿은 뜨거운 입김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하고 싶다고.”
“뭐, 뭐?”
엘레나는 펄쩍 뛰며 비명을 질렀다.
이 인간은 지금 진짜 미친 게 분명하다.
하긴 뭘 해!
“궁금하니까 책 읽은 거 아니었어?”
그는 여우처럼 꼬리를 살랑거리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엘레나는 기함하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무, 무슨 소리야. 난 당신이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참나.”
“정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집요하게 물어오는 질문에 엘레나는 어쩔 수 없이 소리를 빽 질렀다.
“어! 몰라!!!”
“그럼 알려줄까.”
“…뭐?”
이 인간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들자, 사람을 홀릴 듯한 관능적인 눈빛이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당황한 엘레나는 숨을 깊게 한번 들이쉬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때마침 창가로 새어 들어온 바람은 검은 머리칼을 살짝 흩날렸고, 노을에 비친 붉은 눈동자는 잘 세공된 루비처럼 아름다웠다.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악마와도 같았다.
“알려주겠다고,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