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무래도 기분 전환 좀 해야 할 듯싶어 저택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화창한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따듯한 햇살은 그녀를 반기듯 환하게 인사해주었다.
“그래, 이렇게 광합성도 좀 해줘야지.”
엘레나는 눈을 감고 쏟아지는 햇빛을 쐬었다.
부서지는 태양이 그녀의 피부를 밝게 비추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분수를 구경하던 그녀는 장미꽃이 만개한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
분수대에서 정원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산책하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인 장소이다.
엘레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입구 쪽으로 향했다.
“어…?”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장미꽃으로 둘러싸인 비석이 보였다.
저번에 제인이 말해주었던 그의 어머니가 잠든 장소였다.
엘레나는 천천히 걸어가 비석에 손을 댔다.
피부에 맞닿은 찬기가 찡하게 울렸다.
“달의 여신, 디아나….”
신의 이름을 붙인 걸 보면 여간 애지중지하는 딸이었나 보다.
그녀는 손끝으로 비석에 쌓인 먼지를 조심히 닦아냈다.
그러곤 여린 손을 맞잡고 디아나를 위한 기도를 했다.
“부디 평안하시길….”
살결을 스치는 바람에 꽃 내음이 향긋하게 풍겨왔다.
콧노래를 부르며 나들이를 즐기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사뿐사뿐 걸으며 산책하던 엘레나는 다리가 아팠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이고, 다리야. 응?”
벤치를 찾으려 고개를 돌리던 순간 그녀의 레이더망에 무언가 걸렸다.
엘레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망원경처럼 손을 둥글게 말아 목표물을 관찰했다.
몸집이 작고 머리털이 난 게 분명 사람이긴 한데.
“웬 꼬마?”
이 넓은 저택에 시종들만 사는 줄 알았는데 저 아이도 시종인 걸까.
엘레나는 의구심을 품으며 벤치에 앉아있는 작은 꼬마에게 다가갔다.
“안녕? 넌 누구니?”
아이가 놀라지 않게 최대한 꾀꼬리 같은 목소릴 내었다.
마치 유치원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사근사근 미소도 지었다.
하지만 아이의 반응은 생각만큼 영 시원치 않았다.
“아줌만 누구야?”
“…뭐?”
순간 머리가 핑 돌아 쓰러질 뻔했다.
아니, 전생에서도 못 들어본 아줌마 소리를 지금 듣다니.
억울했지만 다시 입 꼬리를 활짝 올리며 억지 눈웃음을 지었다.
“아줌마 아닌데. 누나, 해야지.”
꼬마는 일순간 세모눈을 뜨고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관찰용 벌레가 된 듯했으나 그 시선이 퍽 나쁘지 않았다.
“그래, 누나라고 해줄게.”
선심 썼다는 듯한 말투에 간신히 끌어 올린 입 꼬리가 내려앉을 뻔했다.
그래, 대인배는 이런 걸로 화나지 않아.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 있는 거야.
“그래…. 고마워.”
“뭘, 이런 거 가지고.”
“그나저나, 너.”
엘레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듯 허리를 숙여 아이를 바라보았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에 루비를 박은 듯한 붉은 눈까지.
갑자기 재수 없는 그 얼굴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설마, 이 인간 애 아빠야?
“너, 아빠가 누구야?”
“그런 거 없는데.”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맑은 눈빛엔 진실만이 가득했다.
“엄마, 아빠 같은 거 없어. 나 고아야.”
소년은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손에 쥔 사탕을 입에 넣었다.
일순간 당황한 엘레나는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자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연대표라도 읊듯 본인 소개를 해주었다.
“바테일 전쟁 때 이곳 에스텔로 들어왔어. 대공님께서 날 발견하고 대공저에서 머물 수 있게 해주셨고. 덕분에 6년 동안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중. 나이는 11살, 이름은 레이. 성별은 알다시피 남자. 가끔 여자라고 많이 오해하지만. 뭐 이 레이님의 잘난 외모 덕 아니겠어.”
이 뻔뻔하고 안하무인격인 태도까지 아주 그를 빼다 박아놓은 것만 같았다.
당황한 엘레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데카루스 그 인간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야? 이렇게 닮았는데?”
꼬마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근데 그 인간이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는 기분 나쁜 듯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러곤 한 수 가르쳐줄 것처럼 팔짱을 끼더니 벤치 위에 올라 연설을 시작했다.
“대공님은 날 구해주신 영웅이라고. 내겐 신 같은 존재야. 난 나중에 대공님처럼 멋진 사람이 될 거야. 천하를 호령하는 카리스마, 나처럼 빼어난 미모, 게다가 올곧은 인품까지. 정말 완벽한 인간 아니야?”
“아…. 그래.”
떨떠름한 반응에 꼬마는 심술이 난 듯 입을 쭉 내밀었다.
“근데 누난 누군데 여기 있어? 보니까 시녀는 아닌 것 같고. 흠….”
레이는 한참 동안 눈알을 굴리더니 이내 손가락을 맞부딪치며 소리 내었다.
“아, 설마 저번에 온 그 아가씨?”
“뭐, 아마 그런 것 같은데.”
이곳에 아가씨라곤 저 혼자뿐이니 아마 맞는 것 같았다.
레이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썩 나쁘지 않네.”
“뭐가?”
“대공님 여자친구로 나쁘지 않다고. 인정해줄게.”
순간 엘레나는 혼란스러웠다.
일단 이게 아이와 어른의 정상적인 대화인지부터 의심이 갔다.
게다가 꼬마에게 인정까지 받다니.
기뻐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아, 그래. 뭐, 고마워….”
“아무튼 복 받은 줄 알아. 우리 대공님 같은 남자가 세상에 어딨….”
“둘이 뭐 하는 거지?”
일순간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검은 제복에 멀대같이 큰 키를 가진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걸어왔다.
“대공님!!!”
레이는 그가 보이자마자 날개라도 단 듯 빠르게 달려갔다.
그와 레이의 투 샷이 정말 아빠와 아들처럼 다정해 보였다.
“엘레나.”
그는 꼭 화보에라도 나올 것처럼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바람을 타고 흐르는 검은 머리와 촉촉이 젖은 듯한 붉은 눈이 뇌쇄적이었다.
뭐 레이를 다리에 주렁주렁 달고 오는 장면은 약간 미스였지만 말이다.
“왜 왔어.”
엘레나는 심술 난 고양이처럼 뾰로통하게 반응했다.
하는 일도 많으면서 왜 자꾸 눈앞에 알짱거리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이 보이길래.”
레이는 그가 무섭지도 않은지 계속 엉겨 붙었다.
마치 고목나무에 붙어있는 매미처럼 떨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그래, 그럼 잘 있어.”
아무래도 이 시끄러운 상황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엘레나는 레이를 한번 쓰다듬곤 자리를 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의 손길에 다시 뒤돌아서고 말았다.
“왜 또.”
이 인간은 사람을 귀찮게 하는 데 재주가 있다.
엘레나는 눈을 뾰족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앉아.”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말대로 옆에 앉았다.
레이는 가운데 앉아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한 번씩 쳐다봤다.
“정말 당신 아들 아니야?”
“뭐?”
데카루스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진실의 미간을 보아하니 아들이 아닌 건 확실한가 보다.
“아니, 닮았길래. 숨겨둔 아들인가 해서.”
“허.”
“뭐, 아님 말고.”
될 대로 돼라 식 답변에 그도 퍽 기분이 상했나 보다.
쌤통이었다.
“레이, 저택으로 돌아가 있어.”
“아니, 왜 애를 맘대로 오라 가라…!”
그와 단둘이 있는 건 끔찍이 싫었기에 레이를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발칙한 꼬마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럼 누나, 데이트 잘해. 안녕.”
“레이…!”
애타게 그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건 덜렁 남은 레이의 빈자리였다.
어쩔 수 없이 그와 단둘이 남게 된 상황이 개탄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을 무렵 그가 먼저 입을 뗐다.
“에스텔 사람이 아니야, 레이는.”
“응, 아까 레이가 말해줬어. 당신이 거둬줬다며.”
“그래.”
의외의 모습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그가 부모 없는 아이를 데리고 오다니.
“왜 그런 거야?”
엘레나는 조금 의구심이 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택에서 본 그는 항상 감정 없고, 남 일엔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기에.
또 아이를 데려온다는 것은 막대한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다.
특히 대공으로서 아이를 맡았다는 건 무언가 엄청난 결심이 있어서겠지.
“날 보는 것 같아서.”
그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상념에 빠진 듯한 그의 모습은 꽁꽁 언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였다.
엘레나는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그 역시 어렸을 때 부모를 둘 다 잃었다고 했었지.
레이에게는 같은 슬픔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걸까.
“뭐, 의외네. 당신.”
그는 약간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반문하듯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잘못한 건가 싶어 눈알을 굴리던 순간, 그에게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는 사실에 대번 얼굴이 벌게졌다.
“아, 아니. 그, 당신이 멋지고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냥!”
“…….”
“가, 갈게.”
엘레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돌아섰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그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머릿속에선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사이렌을 울렸다.
탁-
“어딜 가.”
이 남자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지 다시 한번 손을 맞붙잡았다.
“갈 거야.”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꼭 감았다.
마음속에선 제발 손을 놔달라고 염불을 외고 있었다.
“아니.”
“…….”
“돌아서.”
그래, 그는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말이 통했더라면 지금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겠지.
“놔. 진짜 좋은 말로 할 때 놔….”
객기였다.
이렇게 된 거 추태라도 부려보고자 얼토당토않은 대사를 내뱉었다.
“당신 얼굴 보고 싶어.”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있던 몸은 순간 그의 손에 이끌려 휘청거렸다.
“아…!”
이대로 넘어져 머리가 박살 나겠구나 하는 순간이었다.
땅에 닿을 거라 생각했던 몸은 웬 딱딱한 쿠션에 안착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건,
“당신이 이렇게 저돌적일 줄이야.”
데카루스였다.
“…….”
그는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무릎 위에 눕다시피 앉아있었다.
덕분에 한껏 열이 오른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날 유혹하는 건 아닐 테고.”
“비, 비켜.”
엘레나는 그를 밀치며 날쌘 다람쥐처럼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단단한 그의 팔이 그녀를 단번에 끌어당겼다.
“말하기 전엔 못 놔줘.”
얼떨결에 다시 한번 그의 무릎에 앉은 엘레나는 눈을 크게 뜨고 껌뻑거렸다.
대체 뭘 말하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인간은 앞뒤 맥락을 다 잘라서 말하는 게 특기인 것 같다.
“무슨 소리야.”
“당신 얼굴이 붉어진 이유.”
여우처럼 살랑거리는 그의 눈가엔 살짝 주름이 졌다.
그는 항상 문제를 던지고 답을 유도한다.
이미 뻔히 알고 있으면서.
“그런 적 없어, 놔.”
“거짓말. 지금도 이렇게 붉은데.”
민망한 자세 덕에 얼굴은 더욱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다.
대답을 회피할수록 그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 이판사판이다.
“그, 그냥! 그냥, 당신이 꼭. 다른 사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