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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8화 (18/117)

18화.

긴 꿈을 꿨다.

오랜 세월 그녀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죗값을 치르는 꿈.

그들은 미안하다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하지만 기쁘지도, 통쾌하지도 않았다.

이미 할퀴어진 마음엔 상처만 남아있을 뿐.

더 이상 그들을 벌하거나 욕하고 싶지 않았다.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눈 아파….”

어젯밤에 그렇게 펑펑 울고 나서 눈이 퉁퉁 부은 채 깨어났다.

10시까지 자서 다행이지 이 모습으로 그를 마주쳤다간 창피할 게 분명했다.

“왜 울어가지고….”

왜 하필 그때 눈물이 터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옛날 생각에 갑자기 울컥해서 울어버렸다.

“에휴….”

꼬르륵-

아침을 알리는 배꼽시계가 우렁찼다.

엘레나는 배를 쥐어 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브런치라도 만들어 먹어야지.”

저택의 아침 식사 시간은 9시까지이기 때문에 지금은 너무 늦었다.

그래서 몰래 주방에 들어가 뭐라도 만들어 먹을 참이다.

엘레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쭉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렇게 화장대 앞에서 거울을 보려던 찰나.

“미친.”

눈꼽은 물론 사자 갈기처럼 삐죽빼죽 솟아오른 머리, 게다가 퉁퉁 부은 눈까지.

얼굴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이러고 어떻게 나가!”

꼬르륵-

“나가야겠네….”

엘레나는 설렁줄을 당겨 시종을 불렀다.

제발 다른 시종이 아닌 제인이 오길 바라며.

똑똑-

“들어와.”

“아가씨, 부르셨어요?”

“제인!”

기쁜 마음에 그녀에게 달려가 폭삭 안겼다.

제인은 무게중심을 놓친 듯 휘청거리다가 이내 바로 섰다.

“근데 아가씨 얼굴이….”

“하하… 내 꼴이 우습지?”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뭐 그래도 다른 시녀라면 몰라도 제인에겐 뭐든 보여줄 수 있었다.

“세상에, 어서 세숫물을 받아올게요.”

“응….”

제인은 곧장 밖으로 나가더니 빠르게 무언가를 잔뜩 들고 왔다.

“자, 일단 얼굴부터 씻어요. 세상에, 이게 뭐예요. 아가씨. 간밤에 무슨…!”

“아니,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휴….”

눈을 감자 제인은 부드러운 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아주었다.

다른 시녀들이 해준다고 할 때는 한사코 거절하지만 제인이라면 좋았다.

부드러운 손길에 살짝 잠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자, 이제 머리 좀 빗을게요. 이게 웬일이야.”

제인은 보석이 박힌 큰 빗을 들곤 그녀의 머리를 빗었다.

반곱슬에 머리칼이 얇기까지 해서 머리카락이 잘 엉킨다.

그래서 항상 빗을 때 꽤 애를 먹곤 했지.

하지만 제인의 손은 마법의 손인 게 분명하다.

“제인이 빗겨주니까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어!”

“다 오랜 경력 덕분이죠.”

그녀의 말에 배시시 웃는 엘레나는 따듯한 햇살 같았다.

“자, 아가씨. 다 되었어요. 이제 옷만 입으면 끝이에요.”

“응, 고마워!”

“근데 어딜 가시게요?”

“몰래 식당에… 나 너무 배고파.”

엘레나는 길거리에 버려진 고양이처럼 안쓰러운 얼굴을 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게다가 이 와중에도 배 속에선 천둥이 쳤다.

그러자 제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 남은 음식이 없을 텐데. 흠… 아! 빵이 남았는데 그거라도 드실래요?”

“응, 너무 좋아. 나 지금 아무거나 다 먹을 수 있어.”

빵 한 조각이라도 상관없었다.

상한 거 빼고 먹을 수만 있다면 뭐든 괜찮았다.

그렇게 단장을 마친 엘레나는 시녀들의 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 시녀 방은 처음 가봐.”

“별거 없어요. 그저 대공님 덕에 1인 1실을 쓸 수 있다는 정도?”

이곳의 복지는 나름 좋다.

기업으로 치면 대기업 정도.

1인 1실에 구내식당도 좋은 편이고.

매일같이 신선한 식재료에 도서관도 무료로 쓸 수 있고.

그리고 휴식시간도 보장되고 생일엔 선물까지 주니 일할 맛이 날 것 같다.

“궁금하다. 시녀 일은 안 힘들어?”

“힘들 때도 있죠. 하지만 즐거울 때도 있어요. 뭐, 모든 일이 다 그렇죠.”

계단을 타고 내려가 시녀들의 방이 밀집된 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다들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것이다.

“왜… 왜 날 이렇게 쳐다보지?”

그러자 제인은 웃으며 귓속에 대고 말했다.

“다들 아가씨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부끄러워서 그래요.”

“나를? 왜?”

“아가씨가 오시고 나서 저택 분위기가 바뀌었거든요.”

“분위기?”

“네, 원래 되게 음침하고 어두웠는데 왠지 모르게 밝아진 기분이에요.”

“아….”

엘레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수긍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녀 때문에 저택 분위기가 바뀌었는지 납득이 안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하께서도요.”

“응?”

그를 칭하는 단어에 자동으로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아무래도 그에 관한 것에는 모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대공님도 많이 바뀌셨어요. 원래 얼굴에 표정이 없는 분이셨는데 조금 밝아진 것 같은 기분?”

“뭐? 그놈이? 그 인간은 밝았던 적 없어. 또라이였던 적은 많아도.”

엘레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렸다.

그러자 제인은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대공님께서 아가씨를 얼마나 챙기시는데요. 요새 시녀들 사이에서 유행이에요.”

“뭐가?”

“대공님과 아가씨요. 아까 식사 시간에도 그 얘길 하던걸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 얼굴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를 들면, 대공님이 아가씨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든가.”

“뭐?”

“아니면 아가씨를 소중히 껴안는다든가 하는 이야기요.”

“하…!”

제인은 신이 난 듯 손가락을 올려가며 말했다.

대체 어디서 뭘 본 건진 몰라도 그건 다 거짓부렁이다.

그가 사랑스럽게 바라본다고?

소중히 껴안는다고?

참나, 지나가던 개도 웃겠다.

“걔네 눈이 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어머, 그럴 리가요.”

제인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우아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제인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책도 돌던걸요?”

“책?”

“네, 대공님과 아가씨를 상상하며 쓴….”

“팬픽?”

“네…? 팬… 뭐요?”

순간 머리가 아파 휘청거리며 쓰러질 뻔했다.

이거 완전 덕질아닌가.

좋아하는 연예인들 묶어서 글 쓰는 거.

“진짜 미치겠네. 그 책 어딨어? 나 좀 보게!”

“아, 나중에 구해다 드릴게요. 지금은 워낙 예약자가 많아서요.”

“하….”

심지어 예약자까지 있다니.

귀신도 곡할 노릇이다.

대체 무슨 내용을 적었는지 줄거리라도 듣고 싶었다.

“아, 다 왔어요. 제 방이에요.”

끼익-

오랜 대화 끝에 도착한 제인의 방은 정갈했다.

화이트와 우드톤으로 이루어진 가구들이 촌스럽지 않게 예뻤다.

“신기하다. 시녀방이라니.”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다른 방에 들어와 본 것이다.

그것도 2주는 다 된 것 같은데 말이다.

“신기하긴요. 별거 없는걸요. 자, 아가씨. 여기 빵이요.”

제인은 바구니에서 빵 한 덩이를 꺼내 들었다.

바싹 잘 구워진 빵은 짙은 갈색 빛을 내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구운 거라 아직 촉촉해요. 드세요.”

“응, 고마워.”

한입 베어 먹자마자 솜털 같은 빵의 질감이 혀를 보드랍게 감쌌다.

게다가 고급 재료를 써서 그런지 역시 더 맛있었다.

“아, 잠시 드시고 계세요. 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응.”

제인이 나가고 방 안을 더 자세히 둘러보았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방은 햇빛도 잘 들어왔다.

“응? 이게 뭐지?”

햇살에 비쳐 빛나는 은색 하트 목걸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원래 남의 물건은 만지면 안 되지만 어쩐지 그냥 끌렸다.

“예쁘다…. 어?”

목걸이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자 하트 옆구리에 웬 이음새가 있었다.

“열 수 있는 건가?”

그녀의 호기심은 아무도 막지 못했다.

엄지손톱으로 뚜껑을 열자 어디서 많이 본 문자가 적혀있었다.

“엘레나….”

제국에서 엘레나란 이름은 흔하지 않다.

1000명 중 1명 있을까 말까 한 희귀한 이름이다.

“근데 왜….”

“아가씨, 저 왔….”

때마침 방으로 돌아온 제인은 그녀를 보곤 잠시 말을 멈췄다.

문이 열리는 동시에 눈이 마주친 그들은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가씨, 그건 제 목걸이….”

“아, 아. 미안. 미안해, 제인.”

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엘레나는 허둥지둥 목걸이를 내려놓았다.

민망함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아무리 궁금해도 남의 물건엔 손을 대면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해, 제인. 네 걸….”

“아니에요, 아가씨.”

제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웃으며 그녀 옆에 다가왔다.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무어라 말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던 순간, 제인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엘레나라는 분은 제가 굉장히 아꼈던 사람이에요.”

“아….”

역시 그러면 그렇지.

저번에 지하실에서 그림을 본 이후로 모든 게 다 의심스러워졌다.

그래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다.

“지금은 제 곁에 없지만 언젠가 꼭 돌아올 거라 믿어요.”

제인은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무릎에 놓인 엘레나의 손을 쥐며 천천히 쓸어내렸다.

“아가씨만큼이나 너무 소중하답니다.”

또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어제의 후유증 때문에 더욱이 그렇다.

하지만 지금 제인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 눈물을 꾹 참았다.

“응….”

도저히 말을 이을 여력이 없어 고맙다는 말도 못했다.

이를 악물고 무릎을 쿡쿡 찔러가며 간신히 눈물을 삼켰다.

“아, 나 이만 가 볼게. 잘 먹었어. 고마워.”

아무래도 여기 있다간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러기 전에 빨리 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 엘레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 아가씨…!”

제인이 그녀를 애타게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문고리를 열고 나가버렸으니까.

쾅-.

“하….”

방에서 나오자마자 문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어제부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남몰래 훔친 눈물을 들킬까 의미 없이 주변을 서성였다.

시녀가 지나갈 때면 눈에 힘을 주고 밝게 인사했다.

“이대론 안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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