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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7화 (17/117)

17화.

하프를 연주하듯 부드러운 손길.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따듯한 온기.

이게 꿈이라면 깨어나고 싶지 않아.

누굴까.

누구길래 이렇게 소중하게 어루만져주는 걸까.

설마.

“에이든….”

그의 이름을 내뱉자 움직이던 손이 일순간 멈추었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에 살그머니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 이래서 역시 여자의 직감은 정확하다고 하는 걸까.

“데카… 루스….”

“그래.”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물의 님프 나이아스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홍옥을 담은 듯한 붉은 눈동자는 물기가 서린 것처럼 촉촉했다.

그는 손을 뻗어 복숭아처럼 톡 튀어나온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마치 아기를 다루듯 포근하고 따스한 손길이었다.

“보고 싶었어.”

“…….”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몸이 익숙했다.

강아지는 무서운 사람을 보면 짖지도 못하고 벌벌 떤다고 하던데.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분명 아까 전만 해도 그에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몸이 쉬이 움직이질 않았다.

“만지지 마….”

엘레나는 제멋대로 떨리는 목소릴 간신히 쥐어짜 내뱉었다.

그러자 데카루스는 피식 코웃음 치며 턱을 괴고 그녀를 응시했다.

나른한 눈빛은 블랙홀처럼 사람을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예쁘다.”

그는 갓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처럼 그녀를 소중하게 대했다.

하지만 그런 손길 따위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냥 그의 존재가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랐다.

“하루 종일 당신 생각이 났어.”

“…….”

이불 속으로 파고든 긴 팔이 가녀린 여체를 껴안았다.

엘레나는 단말마의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그의 품에 갇혀 버둥거렸다.

“이게 뭐 하는…!”

“당신이 또 사라질까 봐.”

그는 눈을 감고 연분홍빛 머리카락 위에 살며시 얼굴을 비볐다.

복숭아를 머금은 듯한 향이 코끝에 남았다.

“내 품에서 떠날까 봐.”

그의 말은 얼추 이해가 됐지만 공감되진 않았다.

오히려 반항심만 더 부추길 뿐.

“당신도 알고 있잖아.”

“…….”

“내 목줄은 당신이 쥐고 있는 거.”

엘레나는 체념한 듯 말을 이었다.

목줄이라고 하니 정말 강아지라도 된 것 같아 퍽 웃겼다.

비참한 기분이 심장 속에 파고들어 가시질 않는다.

이제 정말로 그의 명령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자는 건가 싶어 몸을 꿈틀거렸지만 그럴 때마다 입을 맞춰대는 탓에 그냥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오늘 뭐 했어.”

“당신이…. 알 필요 없잖아.”

날이 선 대답에 데카루스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아까 제인과 함께 있었다던데.”

다 알면서도 물어보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일까.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피로가 몰려왔다.

더 이상은 그와 말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나 잘래.”

“조금만 더.”

그는 그녀를 조심스레 돌려세웠다.

마주친 눈빛 사이로 묘한 분위기가 오고 갔다.

아무래도 그는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러다가 정말 날이라도 새울 것만 같았다.

“제인이랑 재밌었어?”

그는 천천히 그녀를 훑어 내렸다.

눈, 코 그리고 입술에 닿은 시선에 얼굴에 구멍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응.”

“뭐 했길래 그렇게 재밌었어.”

살짝 닿은 코끝이 인사라도 하듯 그녀를 간질였다.

움찔거리며 몸을 내빼자 그는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냥, 산책.”

종이 한 장도 간신히 들어갈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뜨거운 호흡이 감돌았다.

입을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맞닿는 입술에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잘했어.”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입술을 포개었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살이 조심스레 맞닿았다.

하지만 엘레나는 그를 마주 보지도, 만지지도 않았다.

그저 공허한 눈빛을 한 채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사랑해.”

그 무엇보다 무거운 말이었다.

장난스럽지도, 어리숙하지도 않은 진중한 단어였다.

묵직한 돌덩이가 얼어붙은 심장을 천천히 짓눌렀다.

“잘래.”

낯간지럽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말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특히 다른 사람도 아닌 그에게서 듣는 건 더더욱 싫었다.

엘레나는 그를 등지며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옥죄는 단단한 팔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놔.”

그는 대답 대신 목덜미에 짧게 키스했다.

아무래도 이 상태로 잠들 생각인가 보다.

답답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괘념치 않았다.

엘레나는 눈을 감고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풀벌레들의 노랫소리와 나뭇가지에 달린 나뭇잎들이 춤추는 소리.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눈이 감기려 할 때쯤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사근거렸다.

“늘 상상했어.”

“…….”

“당신을 이렇게 품에 안고 잠드는 밤을.”

그는 팔을 뻗어 가느다란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맞닿은 온기에 몸이 조금 더 따듯해지는 느낌이었다.

“당신을 조금 더 일찍 찾아냈더라면.”

“…….”

“그랬다면 달랐을까.”

그의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의구심을 들게 했다.

왜 매번 오래된 연인을 그리워하듯 말하는 걸까.

꼭 손가락에 붉은 실이라도 매어진 운명처럼.

“뭐, 이제 상관없으려나.”

“…….”

“이미 당신이 내 품 안에 있으니까.”

물에 젖은 듯 축축한 목소리가 귓가에 녹아내렸다.

귀에 맞닿은 뜨거운 입김에 저도 모르게 순간 몸이 움찔했다.

“자는 척하는 거 다 알아.”

그는 피식 코웃음 치며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민망함에 손깍지를 슬그머니 빼자 그는 못 빠져나가도록 더 세게 손을 쥐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안 가.”

엘레나는 부끄러운 듯 새침하게 대답했다.

하필 들켜서 그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다니.

머리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랑스럽게.”

엘레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짧은 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낯간지러운 말 따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거의 매일같이 염불처럼 외대는 탓에 귀에 딱지가 내려앉을 것 같았다.

“당신은 여전히 사랑받는 법을 몰라.”

데카루스는 슬며시 다가와 귓불을 깨물었다.

잘근잘근 씹어대는 탓에 귀에 벌레가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늘 받아들이지 못하고 튕겨내려고만 해.”

“…그만해.”

엘레나는 순간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자꾸 멋대로 저를 판단하는 그가 괘씸했다.

사랑받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고 원한 적도 없다.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지.”

그의 손가락이 긴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얇은 유리라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든, 난 상관없어.”

“…….”

“엘레나, 당신은 당신 그 자체니까.”

그는 고개를 숙여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유리알처럼 깨끗한 눈동자엔 투명한 진심이 서려 있었다.

진실의 거울을 마주한 것처럼 더 이상 그를 회피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어.”

“…….”

“너무나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당신을.”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곧장 무언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엘레나는 고개를 떨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리 와.”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천천히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울렁였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판판한 가슴에 맞닿은 얼굴에서 심장 소리가 들렸다.

잔잔한 박자에 맞추어 엘레나도 천천히 호흡했다.

“당신은 왜 매번 날 아프게 하면서, 자꾸 끌어당겨….”

슬픔에 젖은 목소리가 단단한 가슴팍에 맺혔다.

작은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잠옷이 주름졌다.

“당신이 너무 끔찍하고 싫은데 벗어날 수가 없어.”

“…….”

“왜 자꾸 내 눈앞에 아른거려서 날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그는 말없이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머리 위에 눈처럼 조용히 내려앉은 입술이 따듯했다.

“당신이 너무 싫어. 싫은데, 근데 마음이 이상해…. 당신이랑 있으면 자꾸 가슴이 울렁거려….”

눈물은 소리 없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온 감정이 한계에 다다랐다.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날 더 이상 망가뜨리지 마. 당신의 인형이 되어 줄 테니 날 제발 가만히 내버려 둬….”

인생의 반 이상을 폭언과 폭행 속에서 살아왔다.

그 누구도 사랑한다고, 존재만으로도 소중하다고 말해준 적 없다.

따스한 품에 안겨 본 기억조차 없다.

이 세상이 미웠고 저를 버린 부모가 미웠다.

매일같이 스스로를 자책했을 뿐 사랑해주진 못했다.

그렇게 이 모든 화살은 전부 그녀 자신에게 돌아갔다.

불행의 씨앗은 전부 그녀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왜 자꾸만 저를 소중하고 사랑한다고 해주는 것일까.

“엘레나.”

이질감이 느껴졌다.

한 번도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긴 적이 없었는데.

한 번도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긴 적이 없었는데.

혹시 이곳은 날 속이려고 만든 가짜 세상이 아닐까?

평생 고통만 받은 내게 신이 준 마지막 형벌이 아닐까?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던 차가운 심장이 깨질 것만 같았다.

“괜찮아.”

그는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천천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기를 다루는 듯 잔잔하게, 세지 않게.

따듯한 몸이 괜찮다며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사랑받고 싶었구나.”

심장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스스로 질문을 내던졌다.

사랑받고 싶었나?

정말 누군가의 품을 원했나?

예, 아니오로 나누어진 갈림길 앞에서 서성였다.

그 오랜 시간을 자기 자신이 누군지조차도 모른 채 살아왔기에.

바쁘게 달려와 자신을 돌보지도 못한 채 버텨왔기에.

자신이 누구고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당신이 싫어. 당신이 너무 싫어….”

작은 비는 어느새 강이 되어 흘러넘쳤다.

그의 너른 어깨는 어느새 투명하게 물들었다.

우는 법을 몰랐던 아이는 어느새 목청껏 눈물을 흘렸다.

“그래, 엘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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