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6화 (16/117)

16화.

“너무 아름다워.”

“그쵸? 선대 대공부인, 그러니까 디아나님께서 전부 꾸며놓으신 거예요.”

“대공 부인…?”

선대 대공의 부인이라면 그의 어머니를 칭하는 걸까.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대공님의 어머니세요. 잠시 이리로.”

그녀를 따라간 곳에는 붉은 장미들과 어우러진 회색빛 비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설프게 배운 제국어로 읽어 보니 ‘디아나 드 스큘러스’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부인께서 장미를 좋아하셨거든요. 그래서 정원에 장미가 많은 것이랍니다.”

“아….”

이 넓은 정원을 혼자서 다 꾸몄다니.

그것도 이렇게 아름답게.

“대단하신 분 같아.”

“네,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게다가 디아나, 그러니까 달의 여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신탁을 듣는 유일한 분이셨어요.”

“아….”

들어본 적 있다.

제국의 유일한 성녀, 디아나.

그녀의 신탁으로 수많은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유능했다고 들었는데.

“왜… 죽었지…?”

듣기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다고 했다.

건강했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죽을 리는 없을 텐데.

“그건 워낙 비밀리에 감춰진 사실이라 저도 거기까진 잘 몰라요. 참 고우신 분이셨는데….”

제인은 비석을 보며 잠시 울먹였다.

남몰래 뻗은 손으로 살며시 그녀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었다.

“괜찮아. 좋은 곳에 가셨을 거야.”

그러자 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것을 빤히 지켜보던 엘레나도 눈을 감고 그녀를 위해 기도했다.

“자, 그럼 계속 둘러봐요.”

넓은 정원엔 붓꽃, 해바라기, 코스모스 등 다양한 꽃들이 즐비했다.

또 눈을 사로잡을 만한 미로 정원까지 있으니 꼭 놀이동산에 온 것만 같았다.

“나중에 함께 온실에서 차 한잔해요, 아가씨. 기분이 정말 좋아진답니다.”

“좋아.”

엘레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정원을 벗어난 뒤 제인은 그녀를 물가로 안내했다.

“와, 이렇게 큰 호수라니.”

저택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호수엔 오리들이 줄지어 거닐고 있었다.

햇빛이 부서지는 물 위엔 나룻배가 동동 떠 있었다.

또 호숫가 주위에 핀 수초와 버들이 바람에 흩날려 장관을 이루었다.

“이 배 타보면 안 되나?”

물가 위에 정박한 커다란 배가 빨리 타보라는 듯 유혹하는 것 같았다.

“아쉽지만 지금 사공이 없네요. 어딜 가셨나?”

“사공?”

“네, 원래는 사공이 계시거든요. 아마 대공님이 안 계셔서 그런 것 같아요.”

“아….”

이 저택의 모든 것은 다 그에 의해 돌아가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의 손길 하나 안 닿은 곳이 없구나.

“나중에 대공님과 함께 타러 오세요. 예전에 선대 대공님께서 부인과 타고 계신 걸 봤는데 아주 아름다웠답니다.”

제인은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두 손을 마주 모았다.

하지만 그와 한 배를 같이 타는 것은 영 내키지 않았다.

꽥꽥-

“응?”

갑자기 들리는 꽥꽥 소리에 발밑을 보았다.

작은 오리들은 그녀 주위로 다가와 소리를 내며 빙 둘러 갔다.

“귀여워….”

평소에도 동물들을 좋아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오리를 보다니.

엘레나는 쭈그려 앉아 오리를 쓰다듬었다.

“얘네 도망가지도 않아?”

“원래는 잘 도망가는데, 어쩜. 아가씨가 너무 좋은가 봐요.”

“같은 옷을 입어서 그런가….”

오리와 같은 연노란색 원피스를 입어서 잘 따르는 건가 싶었다.

제인은 쭈그려 앉아 오리와 노는 엘레나를 보며 엄마미소를 지었다.

“제인, 제인과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

“그래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란 제인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응, 진짜. 제인과 있으면 마음이 편해. 그래서 고마워.”

이 저택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연지사 제인일 테다.

그녀처럼 친절하고 따듯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저도 아가씨와 함께해서 정말 행복해요.”

배시시 웃음을 짓는 제인은 꼭 천사 같았다.

어렴풋이 짓는 그녀의 미소에 온몸에 금세 활기가 돌았다.

“좋아! 나도 다시 힘을 내야지!”

다시 힘을 내서 꼭 이 저택을 탈출할 테다.

그리고 그의 힘에 맞서 싸워 지지 않으리라.

“가자, 제인! 또 구경시켜줘!”

“이제야 우리 아가씨답네요.”

댕- 댕- 댕-

그때, 저 멀리 정각을 알리는 시계탑 종이 세 번 울렸다.

새들의 날갯짓에 맞춰 울리는 종소리가 평화로웠다.

“아, 벌써 3시가 되었나 봐요. 아가씨. 재단사가 올 시간이에요.”

“하아… 벌써?”

“네, 아쉽지만 다음에 또 구경해요.”

“응….”

그렇게 즐거웠던 제인의 대공저 투어는 막을 내렸다.

또다시 그녀의 손을 잡은 엘레나는 쫄래쫄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재단사와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금 기분이 안 좋아졌다.

제인은 그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괜찮아요. 금방 끝날 거예요.”

그게 아닌데.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웨딩드레스를 맞추는 게 문제다.

드레스를 맞춘다고 하니 정말 그와 결혼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한숨을 푹 쉬던 엘레나는 시체처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방의 공기에 다시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것만 같았다.

이따가 밤에 또 그의 얼굴을 봐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언제 와, 재단사는?”

“곧 오실 거예요. 기다려 주세요, 아가씨.”

“응.”

그렇게 간단히 차를 홀짝이며 한참을 기다리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키 작은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재단사 파비에르입니다. 오늘 아가씨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꼬부랑 콧수염을 잔뜩 기른 파비에르가 멋쟁이 신사처럼 깍듯이 예의를 차리며 인사했다.

순간 그의 우스꽝스러운 수염에 작게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손으로 간신히 입을 막아 민망한 상황은 면했다.

“반가워, 파비에르.”

“간단히 전해 들었습니다, 엘레나 아가씨. 결혼을 앞두고 계신다고….”

“그래.”

결혼이라는 단어에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자 그는 무언가 눈치챈 듯 헛기침을 하며 사근거렸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아가씨의 드레스를 맡게 되다니. 이 파비에르는 참으로 기쁩니다.”

그는 실실 웃으며 입에 발린 말을 잘도 해댔다.

퍽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다시 물릴 수도 없는 일이니.

“그럼 잘 부탁해.”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을 거들어주는 듯한 여자가 기다란 줄자를 들고 다가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머리를 단정히 묶은 그녀는 엘레나의 신장과 가슴, 허리, 엉덩이 둘레를 재며 재단사에게 정확한 치수를 불렀다.

그러자 파비에르는 기다란 콧수염을 한번 만지더니 검정색 만년필을 들어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댔다.

“자, 다 되었습니다. 아가씨. 이제 카탈로그를 보시죠.”

그가 건넨 두꺼운 카탈로그엔 백여 장 정도의 예쁜 드레스 디자인들이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색깔별, 모양별로 꼼꼼히 분류된 카탈로그는 그의 노고가 여실히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눈에 띄는 드레스는 별로 없었다.

“다 예쁘네. 예쁜데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전생에서 봤던 복식에 비하면 촌스럽고 수준 떨어지는 옷들이 전부였다.

아무리 비싼 원단을 사용했다고 해도 영 내키는 디자인이 없었다.

그래도 생애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예쁜 드레스로 맞춰 입고 싶었다.

“그 종이 좀, 잠시.”

그녀의 말에 재단사는 얼른 종이를 넘겨주었다.

그는 무얼 하나 싶어 눈을 흘기며 노트를 쳐다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드레스는….”

언젠가 인터넷에서 많이 봤던 그런 드레스.

머메이드 웨딩드레스.

여성의 신체를 선을 그대로 따라 만들어 인어를 연상케 하는, 한 번쯤은 입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드레스다.

그림은 못 그리지만 대충 어떻게 그려야 할지는 알고 있었기에 생각나는 대로 펜을 휘둘렀다.

“여기, 이런 모양의 드레스에 밑단을 플레어로. 그리고 레이스를 달아 더 고급스럽게 표현해 봤어. 또 안감은 도비 원단을, 그리고 겉감은 약간 비치는 튤 원단을 사용하고 아주 작은 보석을 꼼꼼히 박아줬으면 좋겠어.”

교양 시간에 배운 것들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이다니.

아무래도 대학 나오길 잘했다.

“예… 제가 한번 보겠습…!”

속으론 귀족 영애가 알아 봤자 뭐 얼마나 알겠어, 라고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노트를 받아 들자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이건 처음 보는 디자인입니다. 딱 붙는 드레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이건 혁명입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이 드레스를 입으신다면 모든 귀족 영애들이 탐을 내실 겁니다!”

현대 디자인을 따라 한 것뿐이지만 오랜만에 칭찬이란 걸 들으니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큼… 뭐! 내가 한 건 했지?”

“예! 아가씨! 이 드레스는 아가씨의 이름을 따 엘레나 드레스라 하겠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는 노트를 보며 그 인생 중 최고의 예술 작품을 마주한 듯, 눈을 반짝이며 연신 감탄했다.

뭐, 아마 떼돈을 벌 생각에 더 기쁜 모양이지만.

“결혼식 3일 전까지 완성시켜서 오겠습니다, 아가씨. 파비에르의 이름을 걸고 최고의 드레스를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다시금 조막만 한 손을 굴려 신사처럼 꾸벅 인사하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방문을 나갔다.

“아, 드디어 끝났다.”

뭐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피곤하다니.

아무래도 한숨 자는 게 좋을 듯했다.

“피곤해….”

빠르게 침대 위에 걸터앉은 엘레나는 기지개를 켰다.

“근데 아가씨께선 어쩜 이렇게 아는 것도 많으신가요?”

옆에 있던 제인은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여 물었다.

“뭐,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봤으니까?”

그러자 제인은 웃음을 터뜨리며 따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아가씨, 피곤하신 것 같은데 얼른 주무세요. 이만 나가 볼게요.”

“역시 제인. 눈치도 빨라.”

“당연하죠. 아가씨와 몇 년짼데.”

“응?”

몇 년째라니.

말실수를 한 걸까.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에요. 아가씨. 그럼 주무세요.”

“아… 응. 안녕.”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다닥 방을 빠져나가는 제인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뭐… 별거 아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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