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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5화 (15/117)

15화.

한 방울, 두 방울.

그녀의 눈가에선 아픈 눈물이 피어났다.

살결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은 어느 여름 날 소나기처럼 무거웠다.

테이블에 걸터앉은 그는 천천히 일어나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

누군가 일부러 시간을 늘인 것처럼 그렇게 조금씩.

“나 좀 놔줘. 제발… 카루스….”

그는 말없이 울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얼굴 위론 그 어떤 표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제발. 제발….”

그는 무릎 꿇은 그녀 앞에 다가가 턱 끝에 손을 댔다.

“풀어주면 당신은 내게 뭘 줄 건데.”

반쯤 감긴 눈꺼풀 사이로 붉은 달을 닮은 눈동자가 비쳤다.

물에 젖은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카루스….”

엘레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툭툭 떨어지는 눈물이 앙증맞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도 얻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

“……하.”

이미 답은 정해져있었다.

그에게 영원을 바칠 것,

충성을 맹세할 것.

이게 그가 원하는 답이었다.

하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초래할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지 알기에.

“날 놓아주면 없는 듯이 살게. 당신을 치안국에 말하지도 않을게… 쥐 죽은 듯이 살 테니까….”

“다시.”

고개 숙인 그는 손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꼭 원하는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것처럼.

“제발. 이러지마….”

“다시.”

“카루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원피스 끝자락을 적셨다.

다리에 닿은 물기가 기분 나쁘게 축축했다.

“난 분명 기회를 줬어.”

“…….”

“그걸 놓친 건 당신이야.”

탁-

그는 무심하게 그녀를 지나쳤다.

구두굽 소리가 마치 사형선고를 하듯 둔탁했다.

“카루스!!!”

그녀의 외침에 그는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등 뒤로 나지막한 미소가 보였다면 착각이었을까.

“할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 뭐든…. 그러니까…!”

멈췄던 발걸음은 다시 메트로놈처럼 일정하게 똑딱거리며 다가왔다.

“뭘?”

데카루스는 그녀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들자 악마 같은 미소를 지은 얼굴이 보였다.

“뭘 할 건데, 엘레나.”

앞선 공포심에 입이 선뜻 떨어지질 않았다.

마치 감히 신과 대적한 듯한 기분에 온몸이 떨렸다.

“아. 아….”

그러자 그는 바닥에 떨어진 손을 집어 들며 희미하게 웃었다.

“내게 영원을 맹세해.”

촉촉한 입술이 여린 손등에 맞닿았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며 나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생 내 것으로 산다고 약속해.”

그녀의 고개는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주름이 질 만큼 꼭 감은 눈에선 눈물이 뚝뚝 흘렀다.

이토록 비참할 수 없었다.

그의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세계는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고개를 들어.”

그의 손길이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눈물을 짓누르는 손바닥은 축축하게 젖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 했다.

“당신은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입에 맞닿았다.

지그시 누른 입술은 어느새 크게 벌어져 서로를 탐했다.

그는 입천장을 핥으며 천천히 그녀를 간질였다.

지독하게 엉킨 혀는 서로를 느끼며 입 안을 뒹굴었다.

거칠어진 숨소리는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하아… 사랑해, 엘레나.”

엘레나는 입술을 떼고 그의 눈동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금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아른거렸다.

“듣고 싶어, 당신 목소리.”

그의 명령에 따라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목구멍은 철문이 닫힌 것처럼 쉬이 열리지 않았다.

억지로 입을 벌려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결국 길게 늘어진 입 꼬리 사이로 가여운 음성이 들려왔다.

“사랑해….”

이곳은 새하얀 지옥이다.

순수해 보이지만 그 속은 까맣게 물들어있는 새하얀 지옥.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잔인한 새장.

그제야 깨달았다.

그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 * *

다시 눈부신 아침이 밝았다.

아무 기억도 없는 걸 보니 어제 그렇게 쓰러져버린 거겠지.

바깥이 아직 조용한 걸 봐선 이른 새벽인 것 같다.

칼 같던 그가 여전히 옆에서 잠을 청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또다시 지옥이 시작된 것이다.

“하아….”

낮게 한숨을 쉬자 그는 잠시 뒤척였다.

밤새도록 그녀를 꽉 안고 자는 바람에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빗장 같은 팔을 걷어내려던 찰나.

짙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어디 가.”

“…….”

그는 아침 인사라도 하는 듯 목덜미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움찔거리며 팔을 밀어내자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딱히 갈 곳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의 품이 싫어서일 뿐.

마치 거대한 인형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 싫어서.

엘레나는 하릴없이 말라붙은 생선처럼 그대로 몸을 뉘었다.

“어제 당신이 그렇게 쓰러져버려서 놀랐어.”

손 틈 사이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깍지를 꼈다.

마주 닿은 온기가 난로처럼 따듯했다.

“…….”

어제의 기억들이 유성처럼 떨어졌다.

엘레나는 전쟁에 홀로 남겨진 아이처럼 몸을 떨었다.

“엘레나.”

“저리 가….”

나뭇가지처럼 마른 팔은 그를 힘없이 쳐냈다.

그에게 더 이상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

아니, 반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감히 대적할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엘레나, 나 봐.”

“…….”

그녀는 죽은 것처럼 말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다.

“엘레나.”

짙은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일 초도 안 돼서 눈을 돌렸다.

무서웠다.

“이리 와.”

그는 팔을 당겨 벌벌 떨고 있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바로 닿았다.

“내가 무서워?”

무서우면 무섭다고 이실직고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

“대답해야지.”

“아니….”

고개를 젓는 대신 말로 대답을 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이미 그에게 훈련이 된 것이다.

“거짓말할 거야?”

“…….”

하긴 이렇게나 떨고 있는데 무섭지 않다고 하는 건 기만이려나.

엘레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그 역시 답답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산책이라도 해. 허락해 줄 테니까.”

“뭐…?”

산책이라면 바깥에 나가게 해준다는 말인가.

엘레나는 그제야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야 봐 주네.”

그는 아쉬운 듯 얕게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곤 이마에 살짝 키스한 뒤 침대를 빠져나갔다.

“산책도 하고 도서관에도 가. 이 저택 안에서 앞으로 당신은 자유로울 테니.”

“…….”

엘레나는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옷장 앞에 선 데카루스는 잠옷을 훌렁 벗은 채 셔츠를 꺼내 들었다.

“또 이따가 재단사가 올 거야. 제인에게 일러두었으니 그런 줄 알아.”

“재단사…?”

“응, 당신 드레스 맞춰야 하니까.”

드레스라면 설마 웨딩드레스를 말하는 것일까.

새삼 실감 나는 현실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멀끔하게 차려입은 데카루스는 천천히 침대 맡으로 다가와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걱정하는 그녀가 귀여웠는지 머리를 두어 번 흐트러뜨리고 허리를 숙였다.

“이따 밤에 봐.”

그는 떠나기 아쉬웠는지 한 번 더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덕분에 이마는 온통 뜨거운 입술 자국으로 가득 찼다.

“그럼 다녀올게.”

“…….”

쾅-

문이 닫히자 인생도 함께 끝나는 것만 같았다.

침대에 털썩 누워 힘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기운이 전부 빠져 일어설 수가 없었다.

“산책이라….”

끝끝내 그의 충성스러운 강아지가 된 선물일까.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님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비련한 모습이 퍽 웃겨 조소가 튀어나왔다.

어제의 기억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부유했다.

영원을 맹세했으니 이제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겠지.

“바보 같아.”

엘레나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 날씨는 눈부실 만큼 화창해서 산책하기엔 딱 좋은 날씨였다.

“나갈까….”

처음으로 저택 밖을 빠져나간다는 생각 탓일까.

심장이 조금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자유라는 건 썩 기분 좋은 것이었다.

잠시 창문 앞에 서 고민하던 엘레나는 옷장으로 향했다.

특유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형형색색의 원피스가 일렬로 줄지어 있었다.

“무슨….”

한눈에 봐도 몇 년은 거뜬히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양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황한 엘레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마음에 드는 색깔을 선택했다.

지금 날씨에 어울리는 연노란색 원피스는 개나리처럼 예뻤다.

거울 앞에 대어 보자 얼굴이 화사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굴에 묻은 눈물자국은 여전했다.

“이러고 나가긴 좀 그렇지.”

옷을 다 입은 엘레나는 시종을 시켜 세숫물을 가져왔다.

시녀가 한사코 닦아주겠다고 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후….”

뽀득거리는 얼굴은 진주알처럼 뽀얗게 빛났다.

오랜만에 사람다운 행색에 나름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밖으로 나가자 쨍한 햇살이 눈가를 간질였다.

이곳은 제국 남부에 위치한 탓에 봄에도 약간 더운 날씨였다.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아, 응….”

갑작스러운 인사에 당황한 엘레나는 말끝을 흐렸다.

화답해주지 못한 게 아쉬워 다음부턴 꼭 밝게 인사해주리라 다짐했다.

저택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저택 부지의 왼쪽 구석엔 시립 도서관만큼 거대한 도서관이 있었다.

건물 외벽엔 푸릇푸릇한 담쟁이덩굴이 예쁘게 피어있었고, 그 옆으론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이 보였다.

또 저택 중앙엔 널찍하게 펼쳐진 길과 시원하게 물을 내뿜는 분수대가 있었다.

“와…….”

베르사유 정원보다 넓은 곳을 하루 만에 다 볼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엘레나는 조심스레 발을 뻗어 계단을 내려갔다.

“아가씨?”

“어…? 제인?”

저 멀리서 바구니를 든 제인이 종종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 역시 반가운 마음에 빠르게 걸었다.

“아가씨, 천천히 오세요! 다치시면 어쩌려고!”

제인은 엄마 같았다.

물론 엄마는 없었지만 엄마라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엘레나는 그녈 보며 배시시 웃었다.

“우리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에요. 그렇죠?”

그녀는 예쁜 눈을 반짝이며 손을 꼭 맞잡았다.

손에 닿은 온기가 심장까지 따듯하게 퍼지는 것만 같았다.

“응.”

“자,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가요! 재단사가 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요!”

제인은 그녀의 손목을 끌고 저택 이곳저곳을 안내해주었다.

“우선 정원부터 둘러봐요. 이 저택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랍니다.”

“정원…?”

“네! 어서, 이리로!”

그녀의 손에 이끌려 간 곳엔 너무나도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한 정원이 있었다.

아치형 입구에는 형형색색의 장미들이 화려하게 피어있었다.

“와….”

“아직 놀라시긴 일러요.”

입구를 지나자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화원과 유리온실이 나왔다.

투명한 유리 온실 안에는 간단히 티를 마실 수 있는 티테이블도 마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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