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눈가를 간질이는 햇살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엘레나는 본능적으로 한 손을 올려 잠을 깨우는 따사로운 빛을 막았다.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아….”
손목이 묶여있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지개를 켤 수도 몸을 돌릴 수도 없었다.
기둥에 묶인 손은 풀 수 없을 만큼 단단히 묶여 있었다.
“하….
엘레나는 허탈한 숨을 내쉬며 손을 곧장 내렸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 아침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되는지….”
“잘 잤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사근거렸다.
하지만 엘레나는 옆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다시 몸을 돌렸다.
안 봐도 뻔했다.
데카루스, 그자겠지.
“손목이 많이 불편하구나.”
등 뒤에서 다가오는 긴 팔이 그녀를 꽉 껴안았다.
그는 손을 뻗어 매듭 부위를 만지더니 목덜미에 키스했다.
“아파?”
“…….”
대답이 없자 그는 심술이라도 난 건지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이상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자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더 할까?”
“싫어.”
그는 그녀의 뒤통수에 한 번 더 키스하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런데 왜 대답 안 해. 응?”
당신이랑 말하기 싫으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당신 목소리 듣고 싶어.”
그는 목을 타고 올라와 귀와 뺨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하지 마.”
“당신이 하게 만들잖아.”
그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이마를 천천히 비볐다.
웅웅거리는 말소리가 뒤통수에서 퍼져 나왔다.
“아침 먹을까. 당신 배고플 텐데.”
“안 먹어.”
차가운 반응에 그는 짧게 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돌려세웠다.
“나 봐, 엘레나.”
그녀는 사막 위에 핀 잡초처럼 생기가 없었다.
음울한 눈빛이 곧장 상이라도 치를 사람 같아 보였다.
데카루스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쓸어내렸다.
“만지지 마.”
턱 끝에 닿은 오싹한 기분이 쉬이 지워지질 않았다.
엘레나는 동태 같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또 그리 불만이실까.”
“손대지 말라고.”
그의 손길이 다시금 부드럽게 턱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당신도 날 원하잖아.”
어느새 붉은 입술에 닿은 손가락이 그녀를 간질였다.
엘레나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그를 피했다.
“당신을 원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이 마음은 그저 분노로 똘똘 뭉친 하나의 잿더미에 불과하다.
그를 향한 일렁이는 감정 따위는 모두 거짓일 테다.
“그래, 당신이 그렇다면.”
그는 고개를 들어 이마 위에 짧게 키스했다.
진한 입맞춤에 살갗엔 뜨거운 온기가 자리 잡았다.
그러자 엘레나는 경기를 일으키며 손을 들어 이마를 벅벅 문질렀다.
“서운한데.”
“…….”
이 와중에 서운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기가 찼다.
그의 머리는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해부라도 해 보고 싶었다.
데카루스는 한숨을 픽 쉬더니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여기서 식사할까.”
가느다란 손가락이 지그재그를 그어가며 두피 사이사이에 흘러내렸다.
손톱이 닿지 않게, 아프지 않게 만지려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안 해.”
“오늘 당신이 좋아하는 연어를 준비했는데.”
엘레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그에게 연어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안 걸까.
요샌 뒷조사를 하면 음식 취향까지 다 나오는 걸까.
의심쩍은 표정을 짓자 그는 잘생긴 입매를 살며시 올리며 미소 지었다.
“내가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딨어.”
마법이라도 부린 건지 아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낱낱이 밝혀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이리 와.”
데카루스가 힘없이 누워있는 몸을 번쩍 들자 팽팽하게 묶인 천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는 언짢은 듯 혀를 한번 차더니 다시 그녀를 내려놓았다.
“이건 풀어야겠군.”
그는 팔을 뻗어 기둥에 꽉 묶인 매듭을 천천히 풀었다.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목줄처럼 매였던 천이 스르르 풀렸다.
그러자 그는 만족스러운 듯 다시 그녀를 무릎 위에 들어다 놓았다.
“뭐 하는 거야….”
엘레나는 작은 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하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설렁줄을 당겼다.
품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자 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꽉 쥐어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놔….”
“응, 괜찮아.”
“놔! 놓으라고!!!”
미친 듯이 몸부림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손이 묶여있어 그를 밀쳐낼 수도 없었다.
그는 부스스한 머리 위에 키스하며 그녀를 달랬다.
“가만히 있어.”
쉬-, 그는 놀란 개를 진정시키는 것처럼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바람 소릴 내었다.
머지않아 시종들은 음식이 가득 담긴 3단 카트를 가져와 침대 옆을 예쁘게 꾸몄다.
덕분에 방 안은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 차 군침을 돌게 했다.
시종들은 식식거리며 그의 품에 안겨있는 그녀를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레 그릇을 놓았다.
“나가 봐.”
그의 목소리는 그녀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훨씬 더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안 먹는다고 했잖아.”
그는 그녀의 말은 가뿐히 무시하고 옆에 놓인 스푼을 들었다.
동그란 은색 스푼 위에 담긴 말간 수프는 한눈에 봐도 제법 군침이 돌았다.
“자.”
그가 스푼을 들어 입 앞에 갖다 대자 엘레나는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밑으로 처박았다.
“엘레나.”
그녀의 이름을 여러 번 불러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마치 메두사의 얼굴을 보고 굳어버린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 들어.”
“…….”
“엘레나.”
끝없는 침묵에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곤 어쩔 수 없다는 듯 턱을 잡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입 벌려.”
“읏…!”
“착하지.”
“싫어!”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손가락을 이로 꽉 깨물었다.
그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자 입 안에서는 피 맛이 느껴졌다.
그 순간 엘레나는 저를 묶던 단단한 족쇄에서 빠져나와 침대 밖으로 몸을 옮겼다.
“하….”
그는 깊게 들이켠 숨을 내쉬며 피가 나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비소를 흘리며 새빨간 피를 문지르는 모습이 꼭 악마 같았다.
얼음장처럼 시린 눈빛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프잖아.”
그의 목소리에 얌전했던 심장이 마구 뛰었다.
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을 엘레나는 당황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아… 아….”
“아무래도 내가 당신을 잘못 가르쳤나 봐.”
그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말로만 해선 안 되는 걸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몸이 싸하게 굳었다.
마치 공포영화라도 본 사람처럼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엘레나는 겁에 질린 듯 천천히 창가로 뒷걸음질 쳤다.
“오지 마.”
이빨은 시베리아에 강추위에 홀로 남겨진 사람처럼 딱딱 소리를 냈다.
호흡은 단거리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빠졌다.
“이리 와.”
그는 침대 주위를 빙 둘러 다가왔다.
그가 가까워질 때마다 그녀 역시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막다른 길에 막히자 엘레나는 창문에 가까이 기대어 섰다.
“오지 마. 오면 나…!”
엘레나는 후들거리는 손을 간신히 들어 창문을 쳤다.
하지만 이런 작은 발악조차 그녀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반항은 여기까지야.”
철컥-
그의 손은 순식간에 창문에 붙어있던 밤색 잠금장치로 향했다.
굳게 잠긴 창문과 함께 그녀의 심장도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정도껏 해야 귀엽지.”
부드러운 손길이 볼을 스쳐 입으로 향했다.
그의 손가락은 갈라진 앵두처럼 벌어진 입술 사이를 지분댔다.
마주친 눈빛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착하지, 엘레나.”
단단히 붙잡힌 어깨는 그의 손길에 이끌렸다.
다시 침대로 돌아간 엘레나는 목각 인형처럼 힘없이 앉았다.
“아, 식어버렸네. 기다려. 다시 내오라고 할 테니.”
그는 다시 설렁줄을 당겨 시종들을 불렀다.
그의 명령을 받은 시종들은 금세 새로운 음식을 내왔다.
“자, 이제 먹을 수 있겠지?”
그는 잘 구워진 생선조각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맛있는 생선냄새가 후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했다.
침샘에선 침이 마구 흘러나왔지만 엘레나는 음식을 씹지도 삼키지도 않았다.
“씹어.”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후볐다.
무심히 벌린 입은 그의 명령에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턱을 벌리고 오므리며 이로 천천히 음식을 씹었다.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곧 체할 것만 같았다.
꿀꺽-
목 넘김 소리와 함께 그는 천천히 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잘했어.”
비참하다는 느낌은 오랜만에 받아보는 듯했다.
그가 차가운 밀실에 가두었을 때도 이런 감정은 느껴보지 못했었는데.
보육원 원장이 그동안 모은 돈을 빼앗았을 때, 그때도 이렇게까지 비참하진 않았다.
한데 지금 비참하고 원통하다는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마구 샘솟는다.
“엘레나.”
그의 부름과 함께 마치 로봇처럼 삐거덕대며 고개를 돌렸다.
데카루스는 손을 들어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이 닿자 느껴지는 물기는 피부를 촉촉하게 적셨다.
아, 울고 있구나. 지금.
“이럼 나 마음 약해지는데.”
긴 팔이 여린 몸을 끌어당기자 그녀의 얼굴은 금세 너른 어깨 위에 폭삭 묻혔다.
남색 잠옷 위로는 투명한 눈물이 빗방울처럼 톡톡 떨어졌다.
그의 큰 손이 등을 천천히 두드리며 그녀를 달래주었다.
“눈물 다 그치면 밖에 나가자.”
그는 어린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것처럼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매가리 없어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은 날개 잃은 새처럼 가여웠다.
눈물 흘리며 그의 품에 안겨있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싫었다.
아무 힘 없이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나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침대 주위를 빙 돌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녀를 번쩍 들어 일으켜 거울 앞에 세웠다.
눈물 자국으로 범벅이 된 얼굴은 퍽이나 봐 줄 만 했다.
“날씨가 더워졌으니 조금 가벼운 옷이 낫겠지.”
그는 옷장 앞에서 잠시 고민하더니 연분홍색 원피스를 꺼내 들어 그녀 앞에 대보았다.
“어때? 당신 머리색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엘레나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제 더 이상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한스럽고 개탄스러울 뿐.
데카루스는 그녀 앞에 다가가 천천히 잠옷을 들어 올렸다.
조금씩 드러나는 새하얀 피부에 찬기가 느껴졌다.
“놔….”
엘레나는 힘없이 그의 팔을 쳐내며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 당신이 입을래?”
데카루스는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그녀에게 건네며 이마 위에 진하게 키스했다.
여린 손에 옷을 쥔 엘레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팔이 묶여서 입을 수가 없구나.”
그는 천천히 다가와 손목에 묶인 천을 풀어주었다.
“자, 이제 입을 수 있지?”
그녀는 뒤를 돌아 천천히 옷을 벗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 끔찍한 상황 속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예쁘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허리까지 늘어지는 머리칼을 빗어주었다.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은 조금 신이 난 것 같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나 좀 그만 내버려 둬.”
그녀가 진심으로 꺼낸 첫마디에 데카루스는 빗질을 멈추었다.
다시 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눈빛은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당신이랑 있으면 숨이 막혀….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어…. 당신과 함께하는 매일 매일이 지옥 불구덩이 같아….”
털썩-
가녀린 무릎이 거친 나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 소리는 마치 까맣게 져버린 나뭇잎처럼 힘이 없었다.
“살려줘…. 나 숨 좀 쉴 수 있게 해줘, 제발.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