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끼익-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콜록, 콜록!”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건지 먼지가 자욱했다.
꼭 도시를 뒤덮은 황사처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랄까.
엘레나는 한 손으로 코를 쥐어 막고 천천히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손전등이나 휴대폰 플래시도 없어 꼭 동굴 속을 탐험하는 것 같았다.
간신히 한 발자국 내디디면 또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는 방식으로 걸었다.
“아, 빛이다.”
어둑어둑한 계단을 조금씩 내려가자 큰 창문에서 햇빛 한 줌이 내리쬈다.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반지하구나.”
계단 밑에서 바라보니 천장이 무척 높았다.
데카루스를 한 세 명 정도 세워놓은 높이랄까.
주위를 둘러보니 전부 원목으로 된 책장뿐이었다.
딱히 특별한 게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인간은 왜 사는가, 1+1, 고대 에스텔의 역사….”
순 철학, 수학, 역사서뿐이라니.
허탈감에 한숨이 나왔다.
이러려고 그 큰 책장을 열심히 민 건 아닌데.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숨을 들이켜고 뒤를 돌아선 순간이었다.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엄청나게 큰 그림 몇 점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빛바랜 액자 속 그림은 아주 오랫동안 손대지 않은 것처럼 먼지가 가득 껴 있었다.
엘레나는 걸음을 옮겨 바닥에 놓인 액자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손바닥을 뻗어 자욱한 먼지를 걷어내자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 드러났다.
“……나?”
곱슬거리는 연분홍빛 머리에 푸른 눈.
벚꽃처럼 흐드러진 연분홍빛 머리에 푸른 눈.
하얀 피부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까지.
완전 그녀를 빼다 박은 것처럼 똑같았다.
“이게 대체….”
끼익-
일순간 얕게 울려 퍼지는 문소리에 모든 행동이 멈췄다.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머릿속에서는 빨간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렸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마땅히 숨을 만한 장소는 없었다.
저벅저벅.
계단 위에서 들려오는 구둣발 소리에 심장이 점점 크게 뛰었다.
“나와.”
지하를 울리는 어둡고 낮은 목소리.
길게 메아리치는 음성에 온몸에 정지 신호가 걸렸다.
팔과 다리가 얼어붙어 어쩔 줄 모르고 허둥지둥할 뿐이었다.
돌계단과 구두 굽의 마찰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리가 커질수록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나와, 엘레나 헬리오스.”
단단히 화가 난 듯한 그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씹어 말하는 제 이름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조금씩 그의 실루엣을 비추었다.
“하하… 안녕….”
멋쩍은 웃음으로 이 상황을 모면해 보려 했지만 당치도 않았다.
그의 얼굴이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제일 화나 보였기 때문이다.
“당장 나와.”
그는 자그마한 손을 거칠게 이끌고 계단에 올라섰다.
이곳을 자주 드나든 사람처럼 그에겐 캄캄한 계단이 낯설지 않아 보였다.
“아파…!”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가락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기에 뭐라 대꾸할 수조차 없었다.
탁-
“엘레나!!!”
집무실에 올라서자마자 그는 뒤를 돌아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불타오르는 것처럼 빨갰다.
아마 눈 색이랑 같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목에 선 힘줄은 곧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그게….”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마르는 입술에 그저 침만 계속 바를 뿐이었다.
“하….”
이대로 여기서 죽게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그의 표정을 보니 곧 죽을 것 같았다.
엘레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리저리 눈알만 굴렸다.
그는 화를 죽이려는 듯 숨을 고른 뒤 천천히 말을 이었다.
“뭘 하고 있던 건지 똑바로 말해.”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선 뭐라고 말해야 백 점일까.
사실대로 몰래 방에 들어와서 물건을 뒤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몽유병에 걸려 일어나 보니 여기 있었다고 해야 할까.
머리가 복잡해지는 순간이었다.
“말하라고 했어. 엘레나 헬리오스.”
그가 풀 네임으로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정말 화난 모양이다.
돌처럼 굳은 표정이 그녀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하….”
그는 눈을 꾹 감고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목덜미에 선 핏대가 빨대처럼 선명하게 드러났다.
탁-
순간 세게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중력을 거슬러 자석처럼 그에게 끌려갔다.
그의 팔이 등허리를 세게 쥐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당신이 없어진 줄 알았어.”
애처로운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살짝 눈을 떠 고개를 들자 불안으로 가득 찬 그의 얼굴이 보였다.
설마 지하를 뒤져서 그런 게 아니라 없어져서 화가 난 걸까.
“…….”
“당신이 또 나를 두고 사라진 줄로만 알았어.”
말하는 걸 보니 아마 그런 것 같다.
그는 이제야 안심한 듯 이마를 꼭 맞대곤 눈을 감았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오늘 생을 마감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그녀 또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귀를 의심할 만한 말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시 묶어놓는 거였는데.”
순간 잘못 들은 건가 하고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잘못 들은 걸까.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다시 한번 되물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틋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당신이 날개를 펴지 못하게 잘라놨어야 했어.”
순간 온몸에 시멘트를 부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약이라도 한 듯한 그의 눈빛에 속이 울렁거렸다.
발끝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공포심이 곧장 전신을 지배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애완 새는 날아가지 못하게 날개를 뽑는다고 하더군.”
입 꼬리에 퍼진 희미한 미소에 등줄기엔 소름이 돋았다.
엘레나는 두 손으로 천천히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나 갈게….”
“여기 내가 있는데 당신이 어딜 가.”
그는 소중한 장난감이라도 만지듯 그녀를 쓰다듬었다.
머리칼에 엉기는 온기 하나하나에 솜털이 곤두섰다.
“난 당신이 날아갈까 봐 두려워.”
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입을 벙긋할 수조차 없었다.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정말 그의 애완 새로 전락해버릴 것 같아서.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마.”
“…….”
“나와 약속해.”
그녀는 자동응답기처럼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피식 웃으며 손을 잡아 쥐었다.
“가자, 방으로.”
* * *
이윽고 방에 도착한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눈치만 슬슬 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생각만 할 때였다.
그의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뭐 했어.”
“…어?”
“뭐 했냐고. 지하실에서.”
낮게 뛰던 심장이 천천히 고동소리를 내었다.
사실 바닥에 있던 그림에 관해 묻고 싶었다.
그 여자애가 누군지.
왜 그 그림을 가지고 있는지.
왠지 그것이 빙의하기 전 기억을 되찾아줄 열쇠일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렇게 은밀한 곳에 숨겨놓은 거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다.
그런 걸 봤다고 하면 또 캐물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곱 살 이전에 잃어버린 기억들.
그러니까 빙의를 하기 직전의 기억들은 다시 땅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아마 영영 찾을 수 없겠지.
아무리 진짜 몸이 아니라고 해도 아쉬움이 컸다.
“이리 와.”
그는 긴 팔을 벌려 고개 숙인 그녀를 천천히 감싸 안았다.
품 안에 폭 안긴 엘레나는 작은 캥거루 같았다.
“앞으로 나와 함께해.”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천천히 손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비단처럼 부드러운 천이 두 손목을 통과했다.
이상한 느낌에 팔을 들자 긴 천이 손목을 아프게 죄었다.
“이게 무슨…!”
화들짝 놀란 엘레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얼굴색이 눈처럼 차가웠다.
“쉿, 괜찮아.”
“이게 뭐 하는 거야…?”
손목이 조여 올수록 점점 숨이 막혀오는 것만 같았다.
추웠던 지하실의 옛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이게 뭐 하는 거냐고…!”
“그래, 착하지.”
“데카루스!!!”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보았다.
하지만 그는 무정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거 풀어. 당장.”
엘레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마구 떨리는 목소리와 울먹이는 눈빛엔 불안함이 가득했다.
“밥은 내가 먹여 줄 테니까 걱정 마. 손이 없어도 내가 도와줄 거야.”
그는 정말 사이코패스라도 되는 것 같았다.
감정 없는 얼굴로 툭툭 내뱉는 말에 오한이 들었다.
“이거 풀어. 풀라고 당장!!!”
엘레나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목이 찢어져라 소릴 질러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자, 이리 와.”
그는 손목을 묶었던 줄을 당겨 침대 헤드로 데려갔다.
안간힘을 써 버텨 보았지만 결국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끌려갔다.
“그만, 그만해…. 이건 아니잖아.”
데카루스는 다른 천을 꺼내 들어 침대 기둥과 그녀를 묶어 단단히 고정시켰다.
“불안해서 그래, 응? 엘레나.”
그는 손목이 꽁꽁 묶인 그녀를 단숨에 품에 안았다.
끈을 풀기 위해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헛짓이었다.
“그래 봤자 소용없는 거 알잖아.”
“나한테 대체 왜 이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 응?”
엘레나는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저 그녀를 귀여운 듯 바라보며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지금까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줬잖아.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엘레나는 무릎을 꿇고 빌듯이 애원했다.
이렇게 묶여 평생을 살게 될까 봐 무서웠다.
날개 없는 새로 그의 새장에서 영원히 갇혀 있을까 봐.
“괜찮아, 이대로 푹 자면 모든 게 원래대로 되돌아 와 있을 거야.”
“카루스… 제발….”
“그렇게 불러주니 좋다.”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머리 위에 얼굴을 천천히 비볐다.
향기로운 복숭아 냄새에 입매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당신에게서 좋은 향이 나.”
“제발 이것 좀 풀어줘, 카루스. 제발. 제발…….”
아쿠아마린을 닮은 푸른 눈에 투명한 눈물이 가득 찼다.
긴 속눈썹 사이를 지나 여린 눈꺼풀에서 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왜 울어.”
셔츠 사이로 작은 눈물방울이 스며들었다.
데카루스는 동그란 이마에 입맞춤하며 시선을 맞추었다.
“울어도 예쁘면 어쩌자는 거야.”
엘레나는 이를 악물며 울먹이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앙증맞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그의 손가락에 맺혔다.
“만지지 마.”
“왜 이렇게 또 사나워졌을까.”
“당신은 미쳤어….”
“예쁜 말만 해야지.”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며 손가락으로 거칠거칠한 입술을 지분댔다.
그러자 엘레나는 고개를 홱 틀며 그를 거부했다.
“뭐, 이젠 소용없으려나.”
“무슨 소리야….”
“당신이 발악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뜻이야.”
천천히 어깨를 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른한 눈빛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