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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2화 (12/117)

12화.

분명 아침인데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누가 눈두덩이에 돌이라도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하….”

후회가 마구 피어올랐다.

대체 왜 어제 거기서 그렇게 눈물이 난 걸까.

평소에 잘 울지도 않는 성격인데 말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의 품에서 엉엉 울어대다니.

“바보 같아….”

옆으로 돌아누우니 온몸이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어깨와 목은 또 왜 이렇게 뻐근한 건지.

“어제 잘 때 그놈이 나 때렸나.”

그거라면 말이 된다.

분명 잘 때 괴롭힌 게 틀림없어.

“근데 대체 몇 시간을 잔 거….”

퉁퉁 부은 눈꺼풀을 간신히 떠 시계를 봤다.

분명 해가 뉘엿뉘엿했을 때 눈을 감았으니까 아마 저녁 6시쯤 잠들었을 터.

그리고 지금이 10시니까.

“16시간?”

엘레나는 이불을 젖히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떻게 사람이 한 번도 안 깨고 16시간을 자지?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마 이 세계에 빙의해 이렇게 오래 잔 건 처음인 것 같다.

아니, 전생에서도 이 정도로 자 본 적은 없다.

경이로움에 감탄하고 있던 순간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들어와.”

“아가씨!”

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제인이었다.

아침부터 제인을 보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제인!”

“근데 아가씨 얼굴이….”

제인은 눈썹 사이가 맞닿을 만큼 얼굴을 찌푸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래도 눈이 탱탱 부은 탓에 놀랐나 보다.

엘레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제인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뭘 가져 온 거야?”

“간단한 아침이요. 근데 아가씨 우셨어요?”

그녀의 말에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저번에도 제인의 품에서 운 기억이 있는데 또 울었다고 하면 울보처럼 여길 것이 아닌가.

“아니, 울긴. 그냥 잠을 많이 자서 그래.”

“잠을 많이 자서 부은 눈이 아닌데….”

제인은 꼭 탐정처럼 턱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아니라니까! 그나저나 나 배고파. 어서 먹을래.”

엘레나는 민망함을 감추려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트레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잘 구워져 진한 갈색빛이 도는 빵을 한입에 크게 베어 먹었다.

“음, 맛있어. 역시 이 집은 빵을 잘해.”

제인은 그녀의 말이 웃겼는지 눈매로 초승달을 그리며 미소 지었다.

“빵은 많이 있으니 많이 드세요, 아가씨.”

“응!”

엘레나는 버터나이프를 들어 캐비어를 빵 위에 발랐다.

먹음직스러운 분홍 빛깔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대공님께서 아가씨는 늘 캐비어를 발라 드신다고 하시기에 가져와 봤어요.”

“그놈이?”

먹을 때 훔쳐보기라도 했나. 어떻게 알았지.

그렇게 맛있게 먹었었나.

“네, 그리고 수프는 당근과 소고기를 섞어 만든 것과…. 아! 또 쌀이 들어간 샐러드를 좋아하신다고….”

엘레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그걸 다 세세히 알고 있는 걸까.

발가벗겨진 기분에 얼굴이 빨개질 것만 같았다.

“마, 맞아….”

치즈와 소고기를 넣은 수프는 한국에서 먹던 인스턴트 수프 맛이 나서 그런 것이고, 쌀이 들어간 샐러드를 좋아하는 건 밥이 생각나서 그랬던 것이다.

이곳의 주식은 늘 빵이니까.

“대공님께서 어쩜 그렇게 아가씨를 챙기시던지요. 먹는 것부터 입는 것까지 하나하나 다 손수 관리하신다니까요!”

제인은 양손을 두 뺨에 올려놓곤 사춘기 소녀라도 되는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래, 아주 세기의 로맨티시스트 나셨다 이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난 그 인간이 싫어. 너무너무 싫다고.”

엘레나는 강철이라도 씹듯 빵을 거칠게 뜯었다.

눈에는 타오를 것 같은 불꽃을 피우곤 말이다.

“그래도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대공님도 아가씨를 그렇게 대한 건 후회하실 거예요.”

미워하지 말라고 해서 안 미워했을 거면 진작에 그랬겠지.

이미 그에 대한 호감은 0에 수렴한다고!

“됐어, 제인. 그 인간은 반성 따위 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제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다 먹은 그릇이 담긴 트레이를 살포시 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저는 이만 일이 있어 나가 볼게요.”

“벌써?”

엘레나는 길 잃은 고양이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을 쏘았다.

이곳에서 대화를 나눌 사람이라곤 제인밖에 없는데.

“네, 연회장 홀에 잠시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요. 얼른 가 봐야 해요.”

“알았어….”

바쁜 사람을 붙잡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줄 수밖에.

“그럼.”

쾅-

제인이 나가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1인 병실을 쓰면 이런 느낌일까.

넓은 공간에 환자처럼 혼자 있으려니 마음이 헛헛했다.

“하….”

엘레나는 하릴없이 대자로 침대에 뻗었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가 된다는데 지금은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나가기는커녕 바깥 바람을 쐬는 것도 불가능하니.

“날 많이 챙긴다라….”

머릿속은 의문투성이였다.

어제 그가 남긴 말부터 행동까지.

거기에 제인까지 불을 지펴버렸으니.

“정말 나를 사랑이라도 하는 건가….”

만약 정말 그렇다면 대체 왜.

그와는 어떤 인연도, 만남도 없었다.

게다가 이상한 건 분명 초면인데 그는 마치 저를 잘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빙의 전, 그러니까 일곱 살 이전에 그와 안면이라도 있었던 걸까.

“하… 됐다.”

엘레나는 감았던 눈을 떠 천장화를 바라보았다.

아기천사가 축복이라도 하듯 하늘을 빙빙 도는 예쁜 그림.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저렇게 자유로웠었는데.

“내 인생 이대로 마감인 건가….”

탈출할 아이디어 대신 한숨만 푹푹 나오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온 집 안의 기사와 시종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질 않나, 제인마저도 데카루스 그놈 편이질 않나.

세상에 아주 맘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

“에이든이 있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그와 함께 있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싸움도 못 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었지만 말이다.

“하, 됐어. 엘레나. 이럴수록 더 힘을 내야 돼.”

굳은 의지를 가지고 버티다 보면 분명 좋은 일이 있을 테다.

꼭 어떻게든 이곳에서 탈출해서 에이든을 만나리.

엘레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끼익-

“저기….”

“…….”

문을 열자마자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 있었다.

계속 말을 걸어 봐도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나가고 싶은데….”

“전하께서 아가씨의 출입을 금하셨습니다.”

로봇 같은 기계식 대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하면 이곳, 이 저택에서라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데카루스한텐 말 안 할게. 응?”

“죄송합니다, 아가씨.”

“하….”

끼익-

그의 완고한 거절에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았다.

이곳에서 나가기라도 해야 탈출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아!”

한참을 제자리에서 빙빙 돌던 엘레나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라도 번뜩 떠오른 듯했다.

끼익-

“저기….”

아까와 똑같은 패턴에 기사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아가씨, 전하께서….”

“아니… 나 화장실 가고 싶어.”

설마 화장실까지 따라오는 사람은 없겠지.

짧은 시간 안에 이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대견했다.

아마 천재가 아닐까.

“아….”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문을 살며시 열어주었다.

복도의 공기는 방 안의 공기와 사뭇 달랐다.

“설마 화장실까지 따라오는 건 아니지? 변태처럼.”

엘레나는 뒤를 돌아 공주님처럼 새침하게 말했다.

“예?”

이렇게 쐐기를 박아줘야 함부로 행동하질 못한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배운 스킬 중 한 가지다.

“아, 아닙니다.”

원래 따라올 계획이었으면서.

그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그럼 빨리 오셔야 합니다, 아가씨. 안 그럼 전 진짜 대공님께 죽습니다.”

“아, 그래. 그래.”

그녀는 귀찮은 듯 대충 팔을 올려 휘휘 손짓을 해주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자유에 괜스레 발걸음이 가벼웠다.

“내부 사정부터 좀 알아볼까.”

밖에 나가면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에게 잡힐 게 뻔했다.

그래서 우선 그의 집무실부터 털어보기로 했다.

아무렴 그의 약점이라든지 공국의 기밀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그럼 그걸로라도 협박이든 협상이든 해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밖에.

“지금쯤이면 분명 회의 시간이니까….”

엘레나는 시녀들의 눈을 피해 집무실로 향했다.

그가 부재중인 터라 다행히 앞을 지키는 기사도 없었다.

철컥-

“흠….”

기다란 금색 문고리를 돌려 봤지만 역시나 굳게 닫혀있었다.

“그럴 줄 알고 이걸 가져왔지.”

철두철미한 그가 문을 열어놓고 갈 리가 없었다.

방 안에서 주운 철 막대가 이렇게 유용할 줄은 몰랐지.

철컥-

“역시.”

집시에게 이 정도 문을 여는 것쯤이야 누워서 떡 먹기였다.

주인 없는 집을 몰래 들어갔을 때도 철 고리로 문을 열었으니.

끼익-

역시나 방은 텅 비어있었다.

어제 헤쳐 놓고 간 침대는 그가 정리해 두었는지 깔끔했다.

재수 없는 성격과 다르게 은근히 깔끔하다니까.

엘레나는 곧장 책상 앞으로 가 서랍을 뒤졌다.

“분명 무언가 있을 거야.”

하지만 너무나도 자신만만했던 탓일까.

서랍을 열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쓸모 있는 것이라곤 맛있어 보이는 초콜릿 한 봉지였다.

“하… 이게 아닌데.”

의자에 앉아 주위를 빙 둘러봤다.

보통 영화에서 보면 이런 거대한 저택에는 꼭 비밀의 문이 있단 말이지.

“비밀의 문. 비밀의 문….”

대체 어디에 숨겨둔 걸까.

엘레나는 눈알을 굴려 찬찬히 가구들을 살폈다.

액자, 시계, 소파, 책장….

“책장?”

순간 엘레나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보통 책장을 누르거나 밀면 비밀의 공간이 나오기 마련이다.

“여기 있었구나.”

엘레나는 폴짝 뛰어 책장 앞에 섰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하나씩 꺼내며 이곳저곳을 손으로 더듬었다.

하지만 열리기는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제야.”

한참 고민하던 엘레나는 두 손가락을 맞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밀어 볼까?”

근데 사실 이 큰 책장을 밀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제 몸뚱어리보다 큰 가구는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하지만 해 보기도 전에 포기하는 건 미련한 법.

엘레나는 책장 옆에 등을 대고 온 힘을 다해 밀었다.

“제발….”

처음엔 너무 뻑뻑해 소리만 크고 밀리질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소망이 닿았는지 조금씩 책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낑낑대며 간신히 밀어내자 그 사이로 조그마한 문 하나가 나왔다.

“이거다.”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낸 비밀의 공간은 사람 한 명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엘레나는 고무줄을 꺼내 치렁치렁한 머리를 한데 묶었다.

“그럼 어디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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