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에이든…? 당신이 어떻게 에이든을 알아?”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엘레나는 갑자기 살아있는 생선처럼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에 대해 들은 게 있는 거지. 그렇지?”
에이든이 살아있는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그가 에이든을 언급할 리가 없어.
“아니, 그저 당신이 잘 때 에이든이란 이름을 부르길래.”
“아….”
바보처럼 괜스레 기대란 걸 했었나 보다.
오랜만에 듣는 에이든의 이름에 잠시 기분이 좋아졌던 거로 만족해야 할까.
엘레나는 다시 마른 생선처럼 침대에 털썩 누웠다.
“원한다면 알아봐 줄까.”
그가 글씨가 빼곡히 적힌 서류를 보며 말했다.
“뭐? 정말?”
그녀는 덮고 있던 이불을 내팽개치며 다시 벌떡 일어났다.
죽은 동태눈깔 같던 눈엔 순식간에 생기가 돌았다.
“정말이야? 당신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그녀는 정말 기쁜 듯 두 번 되물었다.
곰 인형이라도 선물 받은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무도 모르게 그의 작은 보조개가 하얀 볼에 예쁘게 패었다.
“난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지 않아.”
여기 온 뒤 처음으로 그에게 고마움이라는 감정이 느껴졌다.
순간 그에게 조련당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곧장 고개를 털었다.
“에이든은 내 하나뿐인 친구란 말야. 보육원에서부터 함께 자라온….”
기쁠 때나 힘들 때나 서로를 옆에서 충실히 지켜준 사람.
자유롭게 살 거라고 하자 그 옆을 함께해 준 사람.
자신에겐 에이든밖에 없었다.
인생의 전부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것 또한 에이든이었다.
“당신에게 소중한가 봐.”
“응. 정말 많이.”
에이든에 관한 얘기를 하자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피어났다.
배시시 웃는 모습에 데카루스는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라르사는 엄벌에 처해질 거야.”
쾅. 옥새 같은 거대한 도장이 크게 소리를 내었다.
“당신이 그 여잘… 어떻게 알아?”
라르사, 엘레나를 매일같이 괴롭힌 보육원 원장의 이름이다.
끔찍하리만치 증오스러운 기억 탓일까.
순간 몸에 오한이 들어 얕게 떨렸다.
“파렴치한 짓을 했더군.”
“당신도 파렴치하다는 말을 알긴 아는구나?”
“엘레나.”
엘레나는 헛기침하며 입을 빼죽 내밀었다.
본인도 파렴치한 짓을 했으면서 그걸 모르는 건가.
그에게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뭐, 아무튼 그걸 이제야 알았나 보네. 공국의 주인이 말야.”
“그래. 이번 일을 계기로 공국의 교육국에 최대한의 지원을 할 생각이야. 법령도 강화할 거고.”
그래도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걸 보니 괜히 대공을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이게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겉으로 드러난 이 남자의 모습이겠지.
“뭐, 그래. 근데 내 뒤를 캔 거야?”
“응, 공교롭게도.”
그는 남의 정보를 캔 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뭐, 상관은 없었다.
가진 거라곤 자유뿐인 집시에게 무엇이 남았으랴.
신상을 털었다고 해도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걸릴 건 없었다.
“어차피 내 뒤를 캐도 나올 건 많지 않아. 난 떠돌이였으니까.”
“많지 않다라….”
그가 도장을 찍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그래, 당신은 아직 모르는 게 많으니까….”
“응? 뭐라고?”
그는 뭐라 웅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잘 못 들어 되물었지만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아니, 아니야. 엘레나, 이리 와. 제국어 수업을 시작하지.”
“다른 사람한텐 배워도 당신한텐 안 배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새침하게 대답했다.
한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끔찍한데 그와 함께 머리 맞대고 공부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그저 지금 당장 이 방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내가 제인보단 나을 텐데. 아카데미 수석 졸업이기도 하고.”
자기 자랑을 이토록 무덤덤하게 하는 인간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얼굴부터 몸매 그리고 학력까지.
스스로가 완벽하다고 칭하는 꼴 아닌가.
엘레나는 코웃음을 치곤 다시 베개에 얼굴을 폭삭 묻었다.
“당신이랑은 죽어도 안 해.”
그와 얼굴 맞대고 있느니 차라리 콱 죽어버리고 말 테다.
데카루스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서랍을 열었다.
“초콜릿을 줄까, 엘레나.”
그는 마치 축 늘어져 있는 고양이를 유혹하기 위해 츄르를 주는 것처럼 말했다.
바보도 아니고 초콜릿 따위에 당하진 않는다.
“그런 거에 내가 넘어갈 것 같아?”
“당신이라면 그럴 줄 알았는데.”
잠시 조용해진 걸 보니 또 무언가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산책 갈까?”
아무래도 이 남자가 학식이 뛰어나다는 건 거짓부렁인 게 분명하다.
어떻게 그 머릿속에서 몇 분 동안 쥐어 짜낸 말이 ‘산책 가자’인가.
또 생각해 보니 이 말은 강아지들한테나 하는 말인데.
완전히 나를 짐승처럼 여기는 게 확실하다.
뭐, 잠시 혹했던 건 사실이다.
이 커다란 저택 외부는 창밖으로만 구경해 본 게 다니까.
바람도 쐬고 햇볕도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저놈이랑 나가기는 싫었다.
참자, 참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그럼 나랑 놀까.”
“제발 당신은 말이 되는 소리 좀 해.”
왜 자꾸 귀찮게 말을 걸어대는 걸까.
엘레나는 한숨을 쉬며 베개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끼익-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나 보다.
또각또각. 바닥과 마찰하는 구둣발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설마 침대까지 오려는 걸까.
털썩-
그가 침대에 앉았는지 머리맡이 가라앉았다.
왜 갑자기 와서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건지.
“당신, 가서 일이나 해. 할 일 많잖아.”
얼굴이 베개에 묻힌 탓에 말소리가 웅웅댔다.
“당신에게 할애할 시간 정돈 있어.”
그의 손이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상야릇한 느낌에 머리털이 쭈뼛하며 간지러웠다.
“만지지 마.”
탁-
머리칼을 지분대던 손이 처량하게 떨어졌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 마리의 작은 토끼처럼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가오지 마. 말도 걸지 말고 만지지도 마.”
그녀는 마치 한 발자국만 더 다가가면 터질 것 같은 지뢰 같았다.
긴긴 시간 방치되어 있다가 누군가 모르고 밟아 펑, 하고 터지는 지뢰 말이다.
타인의 손길이 두려워 저 깊고 어두운 진흙 속에 제 몸을 숨겨버린 것이다.
“당신은 서벌 같아.”
“…….”
“사람의 온기를 받지 못하고 자란 살쾡이. 늘 내게 발톱을 드러내잖아. 사실 당신, 사랑받고 싶으면서.”
“허.”
사랑을… 받고 싶다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수없이 당한 폭력들을 셀 수 있으랴.
사랑이란 이름으로 버려진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랴.
그녀에게 사랑이란 감정은 자신을 심판하는 잔인한 교수형이자 모래에서 피어난 서러운 감정이다.
“네가 뭔데 날 정의해.”
마음속 작은 불씨가 일순간 크게 번졌다.
엘레나는 이불을 확 걷어붙이며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아득바득 꼭 깨문 입술 사이에선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꼭 저를 다 안다는 듯 말하는 투가 듣기 싫었다.
“사랑?”
퍽 웃겼다.
사랑이란 감정을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느낄 필요도, 느끼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그녀를 아프게 했던 것이기에.
사랑을 받을 마음의 방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 방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거짓된 감정이기에.
“사랑 같은 거, 필요 없어.”
그래, 그런 감정 따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은 혼자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더불어 간다는 소린 전부 거짓부렁일 테니.
그런 말은 가식적이고 추하다.
전부 자신이 나약해서 만들어 낸 변명일 뿐이다.
“엘레나.”
“왜, 내가 불쌍해? 그래, 당신 같은 사람은 부모 없는 애 따위 처음 봤겠지. 그래서 내가 불쌍하니? 고아라서? 그래서 동정심이라도 생기는 거야?”
마음속 어두운 감정들을 전부 쏟아내 버렸다.
멋대로 저를 판단하는 이 남자가 싫었다.
들끓어 오르는 반항심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당신은 죽은 부모라도 있어서 행복했나 봐. 좋겠네. 내가 없는 걸 다 가져서. 안 그래?”
“…엘레나.”
그의 표정은 대번 어두워졌다.
약간의 공포심이 생겼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실 죽은 부모까지 들먹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분노로 입이 제멋대로 마구 움직였다.
“날 그딴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날 동정하지 마.”
“…….”
“난 당신 같은 부류가 제일 싫어. 선민의식 가진 인간들. 그게 딱 당신이야. 최악. 그 자체라고.”
그는 아무 감정 없는 사람처럼 그녀를 응시했다.
루비를 박은 듯한 붉은 눈동자에선 그 어떠한 생각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난 지금 당신이랑 마주 보는 것조차 힘드니까.”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속마음을 다 내뱉고 나니 마음이 헛헛했다.
죄책감이 어두운 안개처럼 스멀스멀 밀려왔다.
“이만 가. 당신 할 일…!”
순간 그의 손이 그녀를 훅 잡아당겼다.
거센 힘에 끌려간 엘레나는 너른 어깨에 폭삭 안겼다.
“이게 뭐 하는…!”
그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꼭 강아지를 만지는 것처럼 부드럽게.
“이거 놔.”
“…….”
“말로 할 때 놓으라고!”
엘레나는 버둥거리며 그의 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하지만 아프지도 않은지 몸을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당신은 변한 게 없어. 아프면서 아프다고 하지 못하는 그 성격도.”
“무슨 소리…!”
“고집만 세 가지고.”
왜 자꾸 예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구는 걸까.
한평생 당신을 본 적조차 없는데, 대체 왜.
“당신, 누구야. 대체 누군데 나한테…!”
“당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
“…뭐?”
그는 천천히 어깨를 떼어내며 그녀를 마주했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떨고 있는 자신이 비쳤다.
“당신을 품어줄 수 있는 사람.”
“무슨….”
그의 따듯한 손길이 보드라운 피부를 쓸어내렸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아스팔트 사이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사람.”
“그런 말 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았다.
악마의 저주스러운 주문과도 같았다.
사람을 자꾸만 나약하게 만드는.
“당신을 사랑해.”
“하지 마.”
온몸이 한겨울 눈보라 속에 홀로 남겨진 사람처럼 벌벌 떨렸다.
지옥문 앞에 선 것처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심이 쏟아져 나왔다.
“엘레나.”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눈가에 어린 작은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터진 눈물은 스쳐 지나가는 소나기처럼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엘레나는 두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세게 내리쳤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근데 왜 자꾸, 자꾸만….”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를 다시 껴안았다.
몸통이 짓눌리듯 꽉 안긴 엘레나는 그의 품 안에서 헐떡였다.
셔츠에 맞닿은 눈물 덕에 얼굴을 엉망이 되었다.
눈을 꼭 감은 엘레나는 간신히 잠긴 목소리를 꺼내었다.
“당신이 너무 싫어….”
“그래.”
“정말, 정말 싫어. 당신은 최악이야….”
등을 토닥이는 손에선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잘 가꿔진 봄날의 꽃처럼 그녀의 마음 한 곳에서도 작은 새싹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