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0화 (10/117)

10화.

“물고기라….”

오늘도 밤을 지새웠다.

어젯밤 그와 함께했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쳤다.

사랑을 속삭이는 입술, 억지스러운 입맞춤과 애처로운 눈빛.

분명 무언가 바라고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갈증에 가득 찬 얼굴이었지.

“하….”

혼란스러웠다.

그의 눈동자엔 그리움이 가득 차 있었다.

“꼭 나를 아는 사람처럼….”

창문을 바라보며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던 엘레나는 뭐가 웃긴지 금세 조소를 지었다.

“그럴 리 없잖아.”

똑똑-

“아가씨, 세욕 준비를 하겠습니다.”

“응.”

아가씨라고 불린 지도 벌써 며칠째.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제 꽤 익숙해졌다.

“꼭 공주님 놀이를 하는 것 같아.”

시녀는 커다란 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와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했다.

금세 투명한 물로 가득 찬 하얀 욕조 속에는 분홍색 세욕제가 물감을 푼 듯 여러 갈래로 퍼져나갔다.

“향이 좋네.”

“대공님이 직접 고르신 세욕제입니다. 아가씨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정말 마음에 들어. 고마워.”

사무적인 대화가 끝나자 여느 때처럼 시녀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한사코 목욕 시중을 거부했기에 그들 역시 적응한 모양이다.

하지만 엘레나는 옷을 벗긴커녕 시녀의 발걸음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숨을 죽였다.

“갔나?”

문에 귀를 대고 바깥 소리를 훔쳐 듣던 엘레나는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문고리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귓구멍을 간질이는 문과 바닥 사이 마찰음에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 대담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없어.”

엘레나는 발끝을 세워 한 발자국씩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은 마치 몰래 물건을 훔치러 온 도둑 같았다.

“빨리, 빨리.”

엘레나는 주변에 보이는 얇은 천을 모두 모아 매듭지었다.

그렇게 긴 줄이 완성되자 커튼 봉에 단단히 묶어 고정했다.

“됐어.”

그녀는 깊게 호흡을 들이마신 뒤 창문을 슬쩍 열었다.

“죽진 않겠지.”

어제 머리를 쥐어짜 시뮬레이션을 돌린 결과 죽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뛰어내리려니 공포심이 앞섰다.

“할 수 있어.”

이제 그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스스로 이 무시무시한 대공저를 탈출하는 것.

이대로 넋 놓고만 있다간 그에게 정말 잡아먹히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게 이 방법이었다.

조금 무식하긴 하지만 이미 벼랑 끝에 내몰린 자에게 그 무엇이 두려울쏘냐.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엘레나는 주문을 외듯 반복적으로 입을 벙긋거린 뒤 긴 천을 잡고 창틀 위에 올랐다.

아파트 3층 정도 되는 높이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하, 못 하겠어….”

고등학교 수련회 때 번지점프도 못 해서 엉엉 울었는데 대체 무슨 정신으로 창문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한 건지.

“그래, 이건 아니야.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

“아가씨!”

오랜 세월 살면서 정말 운도 지지리 없다는 걸 오늘 다시 한번 깨달았다.

창틀에서 발을 떼려 한 순간 제인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육중한 문이 쾅하고 열렸다.

“아가씨…?”

“꺄악!!!”

갑작스런 제인의 등장에 발을 헛디딘 엘레나는 그대로 줄을 잡고 주욱 미끄러졌다.

“아가씨!!!”

깊은 바다에 빠진 것보다 더한 공포였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인 줄은 몰랐다.

“살려줘!!! 제인!!!”

제인은 치마를 걷어붙이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하지만 50kg가 넘는 사람을 끌어 올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제인은 어쩔 줄을 몰라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끌어 올릴 만한 도구를 찾았다.

하지만 그때.

끼익-

바로 밑에서 창문이 활짝 열렸다.

“이건 또 대체 무슨….”

짙게 깔린 중저음에 조심스레 밑을 내려다보았다.

공중에 동동 떠 있는 발밑으로 다신 마주치기 싫은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까딱하면 이대로 인생 하직할 수도 있으니까.

“저기…. 나 좀, 살려줘….”

그녀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그는 눈을 꼭 감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와.”

그는 팔을 길게 뻗어 바구니처럼 둥글게 팔을 말았다.

“어, 어떻게…!”

“나 믿고 뛰어내려.”

하지만 그를 향한 신뢰도란 0퍼센트였기에 믿음이 생기긴커녕 불신만 가득했다.

“못 뛰겠어!”

“딱 한 번만 눈 감고 뛰어. 괜찮으니까.”

고집을 부리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 안다. 또 팔에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해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고.

엘레나는 어쩔 수 없이 부들거리는 손을 가볍게 놓았다.

“아…!”

일순간 등에 닿은 쿠션감에 아찔했던 감각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갓 태어난 아기 새처럼 눈 한쪽을 간신히 뜨자 언짢은 표정을 지은 그가 보였다.

당황해 몸을 버둥거리자 그는 재빨리 몸을 기울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당신은….”

데카루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그녀를 단단한 나무 바닥에 내려놓았다.

철컥-

그는 창문을 닫고 밤색 잠금장치까지 단단히 걸어 잠갔다.

날카로운 쇳소리에 온몸이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른세수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착잡한 모양이지.

마음속에선 괜스레 통쾌함이 들었다.

“예측 밖의 행동을 한 건 칭찬해 줄 만하군.”

그는 이내 뒤를 돌아 그녀를 응시했다.

그 어떤 생각도 드러나지 않는 표정은 여전히 낯설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가녀린 어깨를 잡아끌었다.

덕분에 품 안에 폭삭 안긴 엘레나는 평소와는 달리 얌전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이대로 반항했다가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숨죽여 연신 눈치만 보았다.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먹구름이 낀 듯한 짙고 낮은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의 입술이 닿은 솜털이 귓바퀴를 간질였다.

“알았으니까, 그만…. 놔.”

엘레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단단한 몸을 밀어냈다.

그러자 그는 피식 웃으며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손가락에 엉겨 흐르는 머리칼은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오늘부터 내 방에서 자도록 해.”

“…뭐?”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어 눈썹을 구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꽤나 진지한 표정인 걸 보니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았다.

“싫어, 내가 왜.”

“당신이 매일같이 사고를 치니 어쩔 수 없지.”

데카루스는 한숨을 푹 쉬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앉은 책상 주위엔 종이들이 산처럼 높다랗게 쌓여있었다.

마치 서류에 파묻힌 듯 그 잘난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취소해.”

“…….”

“데카루스.”

“당신이 이름 불러주니 좋네.”

그는 자동화 기계처럼 도장을 쾅 찍으며 영혼이라고 단 하나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 말 취소하라니까?”

“…….”

답답한 마음에 강아지처럼 책상 주위를 얼쩡거렸지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게 발만 동동 굴리며 부산스럽게 주위를 배회하던 엘레나는 마음속 묵혀둔 말을 홱 내질렀다.

“당신 진짜 재수 없는 거 알아?”

“칭찬으로 들리는군.”

욕지거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업무에 열중했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자극을 줘 봐도 반응이 없자 결국 뚱한 얼굴로 가만히 서 묵언 시위를 했다.

하지만 그는 레이저처럼 뜨거운 시선에도 여전히 빨간 도장을 쾅 찍으며 서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불안함에 입술만 뜯던 엘레나는 결국 될 대로 돼라, 최후의 발악을 했다.

“안 그럼 나 여기서 혀 깨물고 콱 죽어버릴 거야.”

격한 어리광에 데카루스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눈을 꼭 감았다.

그렇게 그는 한참 동안 의자에 기대 메두사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잠을 자려는 건가 싶어 한 발 더 다가갔지만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이 방법은 먹힌 것 같아 급히 한 수 더 읊었다.

“지, 지, 진짜야. 나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진짜, 진짜로 죽어버릴 거야!”

그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니 입이 마구 말랐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눈을 감고 있던 데카루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구둣발을 또각거리며 다가왔다.

“그렇게도 싫은가.”

“뭐, 뭐야. 왜 이래.”

주어 없이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으라고.

하여간 남을 향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엘레나는 가까워지는 그에게서 달아나려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내가 그렇게도 싫으냐고.”

그는 어쩌면 바보일지도 모른다.

당연한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다, 당신 그 잘난 머리로 생각이란 걸 먼저 해 보지 그래? 당신 같으면 좋겠나….”

엘레나는 손가락을 들어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비아냥대는 말투에 그는 뭐가 웃긴지 입매를 올렸다. 또 그러더니 갑자기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게 아니겠는가.

“뭐, 뭐 하는 거야? 이게.”

당황한 나머지 엘레나는 손목을 거칠게 뺐다.

그러자 몸이 도리어 그에게로 자석처럼 끌려갔다.

“아…!”

순식간에 그와 가까이 마주한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붉은 눈을 반짝이며 한쪽 입 꼬릴 올렸다.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보고도?”

“…뭐?”

지금 대체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자기가 자기보고 잘생겼다고 한 건가, 지금?

엘레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당당한 걸 보아하니 진담인 게 맞나 보다.

붙잡힌 손이 그의 입술을 스쳤다.

“…왜, 왜 이래.”

“당신이 아직 내 가치를 모르는 듯싶어서.”

그녀의 손은 거칠게 끌려 빳빳한 셔츠에 닿았다.

겉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은 딱딱한 돌을 만지는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내가 남들보다 나은 조건인 것 같은데.”

“놔……! 갈 거야.”

탁-.

그녀는 쥐어 잡힌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문 쪽으로 향했다.

부끄러운 듯 새빨개진 볼이 앙증맞게 느껴졌다.

문고리를 열려는 순간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밖에 경비병들이 있어.”

그래서 뭐 죽이기라도 할 거다, 이 말인가?

엘레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서류를 든 그를 쳐다보았다.

“왜, 날 죽이려고?”

“아니, 내가 왜?”

종이 틈 사이로 삐딱하게 고개를 세운 그의 얼굴이 보였다.

“당신을 나가도록 한 건 경비병이니 경비병을 벌해야 하지 않겠어.”

미친놈.

미친놈이다, 이 인간은.

일반인과 사고 자체가 다른 사람과 지금 한 방에 있다니.

“당신…. 미쳤어?”

“응, 당신에게.”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순간 몸이 눈사람처럼 굳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실소를 내뱉는 것뿐이었다.

“하… 그래, 내가 졌어. 당신 맘대로 해.”

그와 말을 하면 할수록 체력이 방전되는 기분이다.

엘레나는 어쩔 수 없이 곧장 침대로 향했다.

“마음대로?”

“그래, 마음대로.”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 엘레나.”

털썩-

그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를 등지며 침대에 누웠다.

다 말린 수건처럼 널브러져 있는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폭 하고 묻었다.

“이번엔 또 뭐 하자는 거지?”

“가만히 있으라며. 그래서 가만히 있겠다고.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이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뛰어내리면 뭐 하나.

방 바로 밑층이 그의 집무실인 줄은 몰랐지.

글을 배우면 뭐 하나.

이제부터 그가 가르쳐준다는데.

“하아….”

엘레나는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온몸에 혈액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혼인을 다음 달 내로 하려고 하는데.”

“머리 아파 죽겠으니까 그런 말은 관두지 그래.”

“그럼 이번 달로 할까.”

“아니, 다음 달.”

“그래, 다음 달로 하지.”

“너…!”

말을 하면 할수록 그에게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탈출하지는 못할망정 그에게 자꾸 동요하면 어쩌자는 건지.

“왜, 방금 다음 달에 하자고 했으면서 갑자기 또 불만이 생긴 건 아닐 테고.”

“하아. 그래… 졌다, 졌어. 내가 졌어.”

그녀는 포기한 듯 침대에 누운 채로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천장화를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 그림은 끝내주게 예뻤다.

“당신이 날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말장난할 기분 아니야.”

“난 당신과 이렇게 말 섞는 것만으로도 좋아.”

“난 당신이 싫어.”

“좋다는 말로 들리는군.”

그의 말이 끝나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와 쿵 하는 도장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얼마 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밀로 식을 치를 거야.”

“그러든지 말든지 어차피 내게 선택권은 없잖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때 인장을 찍던 날렵한 손이 허공에 멈추었다.

“근데… 에이든이란 자는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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