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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9화 (9/117)

9화.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책상에 엎어져 자고 있는 걸 보니 아마 제인과 다시 공부하다가 잠들었나 보다.

친절하게도, 따듯한 담요를 덮어주고 간 사람은 아마 제인이겠지.

몇 시간이나 잤는지 등과 어깨가 뻐근했다.

“으음….”

툭-

엘레나는 아기 새처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입을 쩍 벌려 하품했다.

고개를 몇 번 돌리며 기지개를 켜자 뭉친 어깨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기분이었다.

두꺼운 담요는 자연스레 몸을 타고 스르르 내려가 의자 밑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눈을 뜨며 다시 책을 보려던 찰나.

“당신이 왜 여기에….”

익숙한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순간 ‘귀신을 보나?’ 하고 손으로 두어 번 눈을 비볐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걸 보니 온전한 사람이었다.

“그대가 언제까지 잠을 자나 지켜보던 중이었지.”

책상 위에 팔을 괸 그는 나른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구미호처럼 사람을 홀리는 눈동자가 뇌쇄적이었다.

“그, 그럼 이만 나가.”

당황한 엘레나는 목소릴 떨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는 턱을 쥐어 잡으며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피하지 말라고 했잖아.”

끈적한 목소리가 고막을 녹일 것만 같았다.

“아파.”

엘레나는 고개를 세차게 돌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는 피식하고 웃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머물던 시선은 어느새 앙증맞은 입가로 내려갔다.

당황한 엘레나는 손으로 입술을 더듬었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뭐라도 묻은 것일까 하고 손을 가져다 입 주위를 만지는 순간.

입 주변에선 끈적거리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침…?”

설마 하고 탁상에 놓인 손거울을 집어 들자 투명하게 흘린 침이 입가에 번져있었다.

게다가 아까 미처 지우지 못한 눈물 자국까지.

민망함이 머리끝까지 차고 올라왔다.

재빨리 손을 들어 입을 가리자 그는 살짝 코웃음 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뭐긴.”

그는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방 안에 울려 퍼지는 구두 소리는 시계의 초침 소리와 맞물려 긴장감을 더했다.

자신보다 두 뼘은 더 큰 위압적인 사내의 모습에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의자를 끌어 뒤로 물러났다.

“당신 남편이지.”

“오지 마.”

엘레나는 명령조로 그를 쏘아붙였다.

하지만 벽에 가로막힌 의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오지 말라고.”

강철처럼 단호한 목소리가 입 끝에 맴돌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들을 위인이 아니었다.

“싫어.”

어느새 단단한 손이 부드러운 살갗에 맞닿았다.

천천히, 아기를 어루만지듯 쓸어내리는 손길은 간지럽다 못해 소름 끼쳤다.

“하지 마.”

“당신은 이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워.”

그의 말에 일순 얼굴에 열이 확 올라왔다.

아까부터 자꾸 특별하다느니, 사랑스럽다느니.

그런 말은 익숙지 않다.

평생 들어본 적도, 아니 들을 자격도 없는걸.

그녀는 의자 밑에 떨어진 밤색 담요를 잽싸게 주워 빨개진 얼굴을 묻었다.

“나가.”

“엘레나.”

그녀의 모습은 마치 버려진 동물 같았다.

바깥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누군가의 손길을 온전히 바라는 그런 작은 동물 말이다.

그는 동정심이라도 생긴 건지 그녀 앞에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러곤 겁먹은 새끼 고양이를 다루는 것처럼 아주 조금씩,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당신이 이렇게 날 필요로 하는데.”

차가운 손끝이 조심스레 그녀의 뺨을 쓸어내려 갔다.

엘레나는 몸을 둥글게 말며 어깨를 움츠렸다.

“정말 나가?”

“…나가.”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짧게 숨을 내쉬었다.

“엘레….”

“나가! 나가라고!!”

엘레나는 맞닿은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불안함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끝없이 흔들렸다.

“나가, 제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와 한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왜 울었어.”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고 달래듯이 말했다.

마치 사나운 야생동물을 생포하듯 말이다.

“안 울었어.”

그에게 이런 것조차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듯한 기분이 싫었다.

“자꾸 거짓말할 거야?”

“안 울었어. 안 울었다고.”

“엘레나.”

“나가.”

정적인 목소리는 바람 없는 강물과도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짧게 한숨을 쉰 데카루스는 이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날 그렇게 대할 때마다 너무나도 서운해.”

“서운…?”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비틀렸다.

목구멍에선 헛헛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발언에 얼굴 근육이 잘게 떨렸다.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데….”

올라오는 감정을 씹어 삼켰다.

악문 입술 사이로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당신… 정말 최악이다.”

그의 눈가엔 단 한 줌의 감정조차 없었다.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처럼.

“최악, 최악이라….”

그는 상념에 빠진 듯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그러곤 피식 코웃음 치더니 똑바로 그녀를 응시했다.

“난 항상 당신에게 최고가 되려 노력했는데 말야.”

그의 손이 가녀린 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턱 끝에 닿은 온기가 너무나도 불쾌했다.

“한 번만 내게 친절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될까.”

“하, 친절…? 지금 당신 입에서 나온 단어가 친절이야?”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예부터 공감 능력 따위 없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래.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고 날 어루만져줬으면 좋겠어.”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몸집이 작은 그녀에게 그는 마치 거대한 거인처럼 위협적이었다.

“오지 마.”

입 안에 맴돌던 말을 간신히 입 밖으로 꺼냈다.

하지만 효과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허리를 굽히며 손가락을 머리 끝자락에 가져다 댔다.

“만지지 마.”

탁-

엘레나는 닿은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다.

그러곤 온기가 남아있는 머리칼을 꽉 쥐며 그를 노려보았다.

데카루스는 버려진 손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뭐가 웃기기라도 한 듯 코웃음 쳤다.

“난 그렇게 행동하라고 가르쳐준 기억이 없는데.”

그는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소름 끼치는 손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그는 입매를 끌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어디까지 사랑스러울 거야.”

“닥쳐.”

그녀는 여전히 가시를 잔뜩 곤두세운 고슴도치처럼 사나웠다.

조금만 스쳐도 피가 날 것 같은 뾰족한 가시었다.

데카루스는 안 되겠다는 듯 숨을 푹 내쉬며 몸을 세웠다.

“이곳에서 나가려고 꽤 노력하더군, 엘레나. 제국어까지 배우고 말이야.”

그가 제국어 교본을 천천히 쓸어내리자 손끝에 먼지가 묻어나왔다.

입에 가까이 대고 후 불자 먼지는 공중으로 사라졌다.

“감히 내 것에게 글을 가르쳐준 자가 누굴까… 한나? 알리사?”

그의 발걸음이 무겁게 움직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허리를 숙인 채 얼굴을 들이댔다.

“아니야.”

“아니면…. 제인?”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뜨거운 호흡이 솜털을 간질이자 등줄기엔 소름이 돋았다.

“아, 아니야. 나 혼자 배우려던…!”

그 순간 몸이 붕 하고 공중에 떴다.

등과 허벅지를 지탱한 팔이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당황한 엘레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목덜미를 쥐었다.

“뭐 하는 거야? 놔!!!”

“말을 안 듣는 짐승에겐 벌을 줘야지.”

그는 거칠게 캐노피를 걷어내며 침대로 향했다.

주름 하나 없이 잘 정돈된 시트 위에 가녀린 여체가 닿았다.

그 위에 올라탄 데카루스는 비딱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 잘 알아.”

“…….”

“한데 난 그걸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거든.”

가느다란 손가락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조심스레 넘겼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이 전신에 퍼졌다.

엘레나는 눈을 꼭 감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니 조용히, 얌전히 굴어.”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짓누르듯 힘을 주어 내뱉었다.

짙고 어두운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감정 없는 차가운 눈빛에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당신 행동에 따라 사람이 죽고 살 수 있다는 걸 명심해.”

전장의 장수처럼 투쟁하던 그녀의 눈동자는 이내 꼬리를 내렸다.

그와 도저히 눈을 마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앞에 서면 자꾸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그리고 앞으로 글은 내가 가르치는 걸로 하지.”

“뭐…?”

사형선고를 당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갑작스러운 통보에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유일하게 그에게 벗어날 수 있었던 순간이었는데.

그 순간마저 빼앗아 가버리다니.

“싫어. 당신이 뭔데…!”

엘레나는 이를 악물고 그의 두 팔을 맞잡았다.

벗어나려 아등바등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는 결코 부술 수 없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소용없는 거 알잖아.”

나지막한 목소리가 저를 볼품없게 만든다.

끝없는 절벽 밑에 고립된 것처럼 무력해진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갈 길 잃은 푸른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를 꽉 깨무는 것뿐이었다.

파리한 입술에선 비릿한 피 맛이 풍겼다.

“피 나잖아.”

그는 말없이 다가와 입술 위에 번진 피를 핥았다.

두터운 살덩이가 상처 부위를 끈적하게 쓸고 지나갔다.

“하지 마….”

그녀는 영혼 없는 얼굴을 하고선 그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사람처럼 맥이 없었다.

그는 꽃잎처럼 작은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상처가 아프지 않도록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주욱 훑었다.

소복이 쌓인 눈길을 밟듯 포근한 시선이었다.

“당신의 눈도.”

그의 입술이 눈가에 닿았다.

따듯한 입김이 눈꺼풀에 천천히 퍼졌다.

“코도.”

얼굴은 점차 아래로 내려가며 도장을 찍듯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입술도.”

살며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따듯한 살덩이가 스며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피하자 그는 두 뺨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농밀한 혀가 입 안에서 춤을 추듯 뒤엉켰다.

“피하지 말고 받아들여.”

엘레나는 그의 팔목을 세게 휘어잡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기분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부정할 수 없는 뜨거운 숨결이 목구멍 사이로 터져 나왔다.

“앞으로 당신은 내게 물들게 될 거야. 헤어날 수 없을 만큼, 깊은 심연에 갇힌 물고기처럼.”

“…….”

“내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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