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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8화 (8/117)

8화.

“아….”

그와의 혼란스러운 첫 대면 식사가 끝이 났다.

진이 빠진 엘레나는 침대에 풀썩 누워 눈을 감았다.

“…망가져도 상관 없다라.”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미친 듯한 인형 놀이에 어울려 줄 생각 따윈 없었다.

어떻게든 이곳을 탈출해서 에이든을 만날 거니까.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제인이 들어왔다.

“아가씨…!”

“제인! 미안. 무겁지….”

수고롭게도 무거운 책을 한 아름 들고 온 제인은 헉헉대며 숨을 골랐다.

본관과 멀리 떨어진 도서관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꽤 고생했을 텐데.

아무래도 이따가 맛있는 것을 같이 먹자고 해야겠다.

“조금요?”

순간 그녀의 말장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하지만 이내 웃음이 터져버린 그들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아, 제인. 내가 말한 책은 다 가져왔어?”

“네. 이걸 찾느라 사용인들이 고생깨나 했어요, 아가씨. 도대체 어디에 쓰시려고….”

“탈출할 거야, 이 지긋지긋한 성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제대로 깨달았다.

여기서 잠자코 있다간 미친 사이코에게 산 채로 잡아먹힐 게 분명하다는 것을.

그러기 전에 이 지긋지긋한 저택에서 탈출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계획을 짤 순 없었다.

이 거대한 저택의 지리를 파악해야 탈출 가능성도 높아질 테니까.

어차피 마음대로 나가진 못하니 뭐라도 해야 했다.

엘레나는 의자에 털썩 앉아 호기롭게 두꺼운 책을 펼쳤다.

“근데… 나 글을 몰라.”

책을 펴자마자 첫 페이지부터 처음 보는 꼬부랑글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자였으니.

엘레나의 눈에는 제국어가 그저 낯선 외국어처럼 느껴졌다.

스스로가 바보 같아 울고 싶었다.

글도 모르는데 어떻게 책을 읽는다고 이 많은 것을 부탁했는지.

“아가씨, 글은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제인은 글썽이는 엘레나를 귀엽게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곤 티테이블에 있던 의자를 꺼내 그녀 옆에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자… 아가씨, 이건 ‘아’라고 읽습니다. 모음이지요. 저희 제국어에는 총 6개의 모음이 있답니다. 따라 해보세요. 아.”

그렇게 제인의 제국어 과외가 시작되었다.

제인은 유능한 선생처럼 중요한 것을 콕콕 짚어 가르쳐주었고 그녀 역시 수업을 잘 따라가며 빠르게 습득했다.

“어머나, 아가씨. 천재가 아니신가요? 어쩜 몇 시간 만에 글을 읽기 시작하세요!”

“이래 봬도 내가 언어를 전공하던 사람이야.”

그녀는 제인의 칭찬에 팔짱을 끼곤 우쭐거리며 콧대를 세웠다.

그러자 제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 아가씨께서 상급학교를 나오셨나요…?”

실수였다.

집시가 상급 학교라니.

이래서 전생의 기억은 여기서 하등 도움이 되지가 않는 것이다.

“아! 아니… 난 그냥 상급 학교에 가보고 싶었어…. 어, 언어를 배워보고 싶어서!”

제인은 그때 옳다구나 싶어 손가락을 맞부딪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의 목표는 공립 아르데오 상급학교가 어떠세요?”

그녀의 말에 엘레나는 토끼 눈을 하고 의아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뭐?”

“상급 학교에 가면 아가씨가 좋아하는 언어를 마음껏 배우실 수 있답니다! 현대, 고대 제국어와 쿠르나스어 같은 외국어까지 배우실 수 있어요. 또 아르데오 상급학교에는 제국 최고의 언어학자인 킬라이언님께서 교수직을 맡고 계시고요.”

그녀는 엘레나보다 더 흥분한 듯 주먹을 쥐곤 쉬지 않고 말했다.

“아니… 나, 난 그저 여기서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을 뿐인걸?”

엘레나는 당황한 듯 뒤통수를 긁으며 시선을 피했다.

제인에게 미안했지만 앞으로의 목표는 학교 따위가 아닌 탈출이었다.

“탈출하신 뒤 다니시면 되죠. 목표는 많을수록 좋답니다, 아가씨. 게다가 아가씨께선 재능이 있으세요. 일반인보다도 습득력이 훨씬 빠르십니다.”

“그럴까….”

제인의 칭찬에 엘레나의 얼굴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그러곤 부끄러운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슬쩍 가렸다.

“그나저나 대공님과의 식사는 어떠셨어요?”

“말도 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이었어.”

“최악이요?”

제인은 우스꽝스러운 그녀의 표정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우아하게 웃었다.

고급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모습은 꼭 화보의 한 장면 같았다.

“그래, 최악. 한 번도 최고였던 적, 아니 중간이라도 간 적조차 없었어. 항상 최악이야.”

엘레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래도 이렇게 소소하게라도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이 있다니.

오백 년 된 묵은 체증이 한 번에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대공님은 항상 아가씨 생각뿐인걸요? 너무 미워하지는 마세요.”

“하, 그 인간이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줬다면 날 여기서 풀어줬을 거야. 아니, 처음부터 가두는 일도 없었겠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엘레나는 마치 주문이라도 외는 듯 음침하게 구시렁거렸다.

제인조차 그의 편인 것 같아 조금 마음이 아렸다.

“아마 사람 대하는 법을 잘 모르셔서 그러실 거예요. 대공님께선 어렸을 때부터 쭉 혼자셨거든요.”

“혼자?”

“네, 대공님과 대공부인께서 돌아가시고. 또 소중한 친구들마저 모두 잃으셨어요. 그래서 늘 혼자였죠.”

생각해 보니 그도 부모가 있을 텐데 그에 대한 소문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젊은 나이에 대공이란 작위에 오른 게 당연시 여겨졌던 모양이다.

“많이 혼란스러우셨을 거예요. 부인께선 살해당하시고 선대 대공께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으니까요.”

“뭐…?”

엘레나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병이 있어 돌아가신 게 아니라 타살과 자살이라니.

세간엔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마 대공님께서 11살 즈음인가. 그때 일이 터졌어요. 그리고 바로 대공 작위를 물려받으셨고요.”

“11살….”

어려도 너무 어린 나이였다.

11살이라면 초등학교 4학년인데.

그런 꼬맹이가 공국의 군주라는 어마어마한 짐을 지다니.

“그도 많이 힘들었겠네.”

“그렇죠. 워낙 겉으로 드러내질 않으시는 분이라 속은 영 모르겠지만요.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것 따위로 정당화하고 싶진 않아….”

엘레나는 고개를 떨구며 작게 목소릴 내었다.

아무리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를 옹호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살인자를 도덕적으로 심판해야 할지 말지의 문제를 따지는 것처럼.

불행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었으니까.

힘들다고 다 비뚤어지는 것도 아니고.

원래 성격이 괴팍한 것일 테지.

그리고 여기서 누가 누가 더 불행한지 대결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감히 타인의 슬픔을 저울로 재고 따지는 건 옳지 않으니까.

“나도 늘 혼자였는데.”

물론 옆에 에이든이 있었긴 하지만.

뭐, 이렇게 보니 그의 옆에 줄곧 아무도 없었다는 게 조금은 안쓰럽긴 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네요. 아가씨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꼭 오랜만에 본 사람의 안부를 묻는 듯한 질문이었다.

조금 당황한 엘레나는 이내 연설 준비라도 하듯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난, 난. 나는….”

마치 바보라도 된 것처럼 입에서 말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누군가 앞에서 자기 얘길 해 보는 것이 처음이라 그런가.

무얼 먼저 말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천천히 말씀하셔도 돼요.”

친절하게도 제인은 양손을 꼭 잡아주었다.

따듯한 온기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나는, 고아야. 그 자식은 부모님이라도 있었겠지만 난 없었다고. 얼굴은커녕 목소리조차 몰라.”

“아….”

일순간 제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역시 고아라는 건 괜히 말한 걸까.

동정 같은 걸 바란 건 아닌데.

“그리고 쭉 보육원에서 자라왔어. 그리고 또….”

엘레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보육원에서 매일 맞고 자란 이야기까지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뭔가 부끄럽기도 했고 그냥 침울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보육원에서 나와 자유롭게 살았어. 자유라고 하기엔 조금 거창하지만.”

“…….”

“난 사실 별 볼일 없는 떠돌이 중 한 명이었을 뿐이야. 그래서 이렇게 대접받는 것도 낯설고. 네가 아가씨라고 불러주는 것도 좀 오글거리기도 하고.”

엘레나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제인의 표정이 안 좋은 걸 보니 역시 괜히 말한 건가.

“미안. 내가 괜한 얘길 해서.”

“아니요, 아가씨.”

제인은 갑자기 팔을 활짝 뻗었다.

“이리 안기세요.”

“어?”

“어서요.”

일순간 중력을 거스르는 힘에 의해 그녀에게 폭삭 안겨버렸다.

솜 베개처럼 폭신거리는 포근한 품은 그 무엇보다도 따듯했다.

“우리 아가씨,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힘드셨어요.”

“응? 나 하나도 안 힘들었….”

그 순간 눈에선 알 수 없는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뭐야, 나 왜….

뒤늦게 눈물이란 걸 인지한 엘레나는 당황한 듯 눈을 비볐다.

하지만 빌어먹을 눈물은 멈추지 않고 끝없이 흘러내렸다.

“나 왜 이래. 대체.”

제인이 말없이 그저 꼭 끌어안기만 할 뿐이었다.

하나도 슬프지 않았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궁상맞게.

“제인, 나 이상해. 왜 눈물이.”

자꾸 흘러내리는 눈물이 이렇게 괘씸할 수 없었다.

꼭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계속 눈물이 흘렀다.

그러자 제인은 등을 토닥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건 우리 아가씨의 마음속에 피어난 작은 이끼 같은 거예요. 음지 속에서 남몰래 자라온 이끼요. 햇빛도 받고 사랑도 줘야 하는데 그걸 하지 못해 생긴 거죠.”

제인은 이상한 비유를 들어가며 말했다.

마음속에 낀 이끼라니.

이끼는 축축하고 기분 나쁜, 그런 벌레 같은 식물이 아닌가.

“그러니 아가씨. 이제 행복하실 일만 남았어요. 더 이상 아가씨를 괴롭히는 것들은 없을 거예요.”

“없진 않을 것 같은데….”

갑자기 그 재수 없는 놈의 얼굴이 떠오른 건 왜일까.

왠지 그 남자한테 시달릴 것 같은 이 불길한 예감.

“아니요, 없을 거예요. 너무나도 특별한 존재세요. 아가씨는.”

“난, 그냥. 그냥 별 볼일 없는 사람일 뿐이야. 그렇게 비행기 태우지 않아도 된다고.”

태어나서 이런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들어볼 기회도 없었고.

자꾸 이런 말을 들으니 낯간지러웠다.

“난 특별하지 않아. 그럴 자격도 없고….”

그 말을 들은 제인은 피식 웃더니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그럴 자격이 없긴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특별하신 엘레나 아가씨. 제겐 그 무엇보다 큰 별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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