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아, 진짜. 장난치지 마. 장난이라면 이제 질렸어.”
그녀의 장난에 오랜만에 웃음이 나왔다.
뭐, 시녀들도 사람이니 이런 거짓말쯤은 칠 수 있을 테다.
절대 그가 대공일 리 없다.
분명 스큘러스 대공 전하는 온화하고 선하신 분이라고 했다.
근데 그가 저런 미친 작자일 리가.
그가 대공이라면 진짜 손에 장을 지질 테다.
“…….”
하지만 그녀의 눈은 흔들림 없이 완고했다.
마치 진실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
툭-.
여린 어깨에 걸친 숄이 낙엽처럼 힘없이 떨어졌다.
소리 없이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
마른 가지 같은 팔이 바람에 휘날리듯 잘게 떨렸다.
이상함을 느낀 제인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거짓말이라고 해….”
아아, 신은 공평하지 않구나.
불행한 삶을 두 번이나 줬으면 한 번쯤은 행복이란 기회도 맛볼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에이든과 평생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다니.
“아가씨, 정말 대공님이 맞습니다. 이곳은 대공저이고요.”
제인은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이내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이라도 있는지 확인했다.
“멀쩡하신데. 아무래도 어서 쉬셔야겠어요.”
탁-.
“날, 날 여기서 내보내 줘.”
정신을 차린 엘레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바깥 날씨는 곧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그 미친 사이코에게서 이곳을 탈출해야 했다.
“돈이라면 꼭 줄게. 나 여기서 나가야 해. 제발… 제발.”
“아가씨….”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했다고 하지 않을게. 그러니 나갈 방법만 알려줘. 응?”
어린아이처럼 울고 매달리던 몸뚱어리는 이제 바닥에 무릎이 닿을 정도로 기울었다.
제인은 한숨을 쉬며 복도에 쭈그려 앉아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아가씨, 진정하세요. 방에서 따듯한 차라도 한 잔 드시는 게 좋겠어요.”
“아니, 아니야… 나 여기서 나가야 해….”
이곳에 있으면 그 미친놈과 꼼짝없이 결혼해야 한다.
굶으면 굶었지 그 인간이랑 한집에서 같이 사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가씨….”
“제발. 제인… 사례는 뭐든 할 테니까.”
그러자 그녀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어깨를 붙잡았다.
“아가씨, 죄송해요.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게 이런 걸까.
절벽 끝에서 손을 뻗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기분.
홀로 험준한 절벽을 올라가야 하는 기분이었다.
“자, 일어나세요. 방으로 모셔다드릴게요.”
“…….”
제인의 힘은 어찌나 세던지 바닥에 붙은 몸을 금세 일으켜 세웠다.
꼭 사형선고를 받은 듯한 말에 온몸에 기운이 빠졌다.
끼익-.
끌려간 방 안은 예전 보육원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넓었다.
대단한 손님이라도 맞이하는 듯 신경 쓴 티가 물씬 풍겼다.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눈부시게 빛났고 바람은 솔솔 불어 봄 내음을 한껏 퍼뜨렸다.
뒹굴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큰 침대에 수백 가지 종류의 책이 꽂힌 책장, 그리고 원목으로 만든 책상은 방 안을 가득히 채웠다.
또 커다랗게 그려진 천장화와 침대 위에서 차르르 흘러내리는 캐노피까지, 마치 공주님이 사는 방 같았다.
“이게 다 뭐야….”
“앞으로 아가씨께서 사용하실 방이랍니다.”
창을 타고 흘러온 바람에 제인의 잔머리가 예쁘게 흩날렸다.
온화하게 짓는 미소는 마치 햇살 같았다.
“차를 끓여 드릴게요. 잠시 여기 앉아 계세요.”
제인은 그녀를 일으켜 간신히 의자에 앉혀놓았다.
이렇게 보니 꼭 인형 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걸… 다 언제 준비했어?”
“아가씨께서 이 저택에 도착하실 때부터 준비했답니다.”
제인은 찻주전자에 준비된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뭔지 모를 이국적인 차향이 테이블까지 풍겨왔다.
도착했을 때부터 이 많은 걸 준비했다니.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컴컴한 방에 갇혀 어떻게 일주일을 살아왔는지.
왜 지금 여기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지.
그리고 하필이면 그가 대공이라니.
모든 게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가 날 왜 데려온 걸까….”
“아가씨는 특별하시니까요.”
그녀는 찻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티테이블로 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발린 말을 내뱉는 그녀가 조금 미웠다.
“왜 다들 내게 이해 못 할 말만 하는 거야.”
“차차 알게 되실 거랍니다.”
제인은 입매를 말아 올리며 예쁘게 웃었다.
그러자 엘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
“네, 얼마든지요.”
“그럼 혹시 나와 같이 있던 에이든이라는 남자는….”
에이든 역시 함께 노예상에게 끌려가 범선 지하실에 갇혔다.
그와 계속 꼭 손을 잡고 있었지만 경매장에 끌려가는 바람에 놓쳐버렸다.
지금은 잘 살고 있을는지,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소식이라도 듣고 싶었다.
“아가씨, 저는 일개 시녀일 뿐이랍니다.”
제인은 지그시 눈을 맞추며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손엔 온기가 돌았다.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그래, 뭐 일개 시녀 따위가 그에 대해 안다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녀의 목숨 또한 위험할 테니까.
그렇지만 분명 어떤 이유가 있다.
볼품없는 노예를 이곳 대공저까지 데리고 온 이유가.
“그래….”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일단 사람들과 친해질 필요가 있다.
친해져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또 지금보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긴 집시 생활에 이 나라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저 흘러가는 가십거리뿐이었다.
대공저에서 탈출해 봤자 금방 잡힐 게 뻔하기에 그가 다스리는 아르데오 공국에서 나가야 한다.
데카루스, 그를 절대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
“자, 여기 카나리아 제국에서 들여온 칸나 티입니다. 향은 물론 맛도 일품이랍니다.”
그녀 앞에 놓인 새하얀 찻잔의 내부는 금장 패턴의 월계수 잎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또한 핸들 전체가 도금되어 더욱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고마워.”
조심스레 찻잔을 들어 숨을 들이켠 순간 처음 맡아보는 향이 올라왔다.
“향이….”
“좋지요? 대공님께서 특별히 아가씨를 위해 준비하신 거예요. 구하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대공이란 말에 들었던 컵을 다시 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가 않았다.
“아가씨, 차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정말 대공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그에게 침을 뱉고 욕을 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아, 치안국에 가는 건 그가 아니겠구나.
진짜 미친놈에게 미친 척을 한 것부터가 잘못됐다.
“하아… 내가 미쳤지.”
“네?”
“아니야, 아니….”
엘레나는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딱 봐도 돈 냄새 나는 가구들과 장식물들이 전부 한 사람을 위한 거였다니.
“날 유혹해서 잡아먹으려는 걸까….”
“풉….”
옆에 있던 제인이 웃자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왜 웃어?”
“아가씨께선 재미난 말씀을 참 잘하십니다.”
제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우아하게 웃었다.
귓가에 부드럽게 흘러내린 연갈색 머리가 바람에 흩날려 나풀거렸다.
아마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 가장 고급스럽게 생겼대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인은… 왜 시녀를 하는 거야? 다른 일을 해도 되잖아.”
그러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선을 맞추었다.
“아가씨같이 어여쁘신 분을 뫼시기 위함이랍니다.”
동그란 눈은 금세 초승달처럼 접혀 예쁘게 휘었다.
제인의 말에 부끄러워진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고 그 모습을 본 제인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엘레나 아가씨. 전 아가씨를 모실 수 있게 되어서 정말 영광일 따름이랍니다.”
“그런 소린 그만해도 돼….”
아무리 입에 발린 말이라도 너무 과한 알랑방귀는 듣고 싶지 않았다.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자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 양손을 맞잡았다.
커피처럼 예쁜 연갈색 눈동자가 진하게 맞닿았다.
“아가씨는 소중하세요. 그 무엇보다도요.”
“무슨….”
제인의 말에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왜 자꾸만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칭하는 걸까.
왜 볼품없는 떠돌이를 천만 루나나 주고서 사들인 걸까.
왜 집시 따위에게 이렇게 좋은 방을 내준 걸까.
매번 머릿속을 헤매던 질문들이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너… 뭔갈 알고 있는 거지? 그러지 않고서야…!”
“쉿!”
제인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조심스레 그녀의 입에 맞추었다.
“아가씨께서 알 수 있는 건 여기까지랍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길.”
“제인!”
끼익-.
제인은 의문만 남긴 채 커다란 문을 닫고 유유히 사라졌다.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녀 역시 더 이상 정보를 꺼내기엔 힘들어 보였다.
“도대체 뭐야….”
* * *
오후가 지나고 어두컴컴한 밤이 되었다.
조잘대던 참새들의 지저귐은 어느새 부엉이의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그렇게 방에선 한 발자국도 나가지도 못한 채 시간을 때웠다.
이를테면 하루 종일 창문 밖을 보며 지나가는 시종들을 구경하거나 책장에서 읽지도 못하는 두꺼운 책을 꺼내 훑었다.
차라리 수감 생활을 하는 게 나을 정도로 시간이 더럽게도 안 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엘레나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누구야? 들어와.”
두근대는 마음에 헐레벌떡 문 앞에 섰다.
아마 침대에서 문까지 2초도 안 걸린 것 같다.
제인일까, 아니면 다른 시녀가 간식이라도 가져온 것일까?
끼익-.
“기다렸구나.”
“당신….”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다.
기대와는 다른 인물의 등장에 미소를 띠었던 얼굴은 순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를 보자마자 온몸엔 긴장감이 돌아 구역증이 느껴졌다.
“당신이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