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쾅-.
그가 사라지자 긴장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작은 몸을 웅크린 채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에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저 이제 뭘 해야 하지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끼익-
“엘레나님, 아침 시중을 들러 왔습니다.”
그가 말하던 시녀들이 찾아왔다.
검은색 메이드 복에 하얀 앞치마를 입은 여자들이었다.
문 뒤로 보이는 3단 카트엔 갈아입을 옷과 목욕 용품들이 실려 있었다.
“아… 괜찮아요. 그냥 가세요.”
그녀는 영 내키지 않는 듯 한숨을 쉬며 시원찮은 반응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중을 들라 하셨습니다.”
답답한 소리.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걸까.
이불을 덮고 가만히 누워있자 시녀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억지로 손을 잡아끌었다.
“뭐 하는 거야?”
탁-.
엘레나는 숨을 빠르게 몰아쉬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가씨, 제발…. 시중을 들지 않으면 저희가 죽습니다.”
몸을 벌벌 떨던 시녀들은 한 번만 도와달라며 울먹였다.
꼭 며칠 전 그의 앞에서 떨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래, 이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그저 그 사이코 같은 남자의 집에서 일하는 것뿐인데.
“하. 그래요….”
아무리 그가 싫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 남자와 똑같은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들은 한고비 넘겼다는 듯 고개를 꾸벅이며 예를 표했다.
시중을 드는 게 뭐 그리 좋다고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인지.
평소 그가 이 저택에서 어떤 존재인지 감이 왔다.
“그리고 말씀은 낮춰주세요.”
“…그래.”
그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들은 야윈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중 한 명은 일단 꼬질꼬질한 몸을 씻기려는 듯 욕실에 들어가 급하게 물을 준비했다.
“아가씨, 이쪽으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가씨’라는 단어는 낯간지러웠다.
시녀는 커다란 거울이 달린 화장대 앞으로 그녀를 데려가 앉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쿠아마린을 닮은 푸른 눈.
진주처럼 희고 매끈한 피부에 젖가슴까지 내려오는 곱슬거리는 연분홍빛 머리카락.
조막만 한 얼굴, 사슴처럼 큰 눈망울에 오뚝한 코 그리고 앙증맞은 입술.
거울 속에서 마주친 이 여자의 이름은 엘레나 헬리오스.
“머리카락을 조금 자르겠습니다.”
“응….”
그녀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이곳 에스텔 제국에 불시착한 평범하지 않은 자.
이것이 그녀를 정의할 수 있는 표현이다.
“다 되었습니다, 아가씨.”
얄팍한 은색 가위에 잘려 나간 머리카락은 그녀의 모습처럼 처량했다.
소복이 쌓인 짧은 머리카락들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고마….”
“아가씨, 세욕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리로.”
머리를 잘라준 시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시녀가 급히 그녀를 불렀다.
엘레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욕실로 옮겨졌다.
욕실 내부엔 밖이 훤히 보이는 커다란 창과 곡선으로 조각된 큰 욕조가 있었다.
사자의 머리가 장식된 욕실은 과할 만큼 화려했다.
엘레나는 욕조 앞에 가만히 서 탈의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뒤따라온 시녀 역시 나가지 않고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었다.
“안 나가?”
“씻겨드리는 건 저희의 몫입니다. 어서 이리로. 옷을 벗으셔야 합니다.”
“아, 아니. 괜찮아. 목욕은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엘레나는 옷을 손으로 꽉 쥐며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웠다.
그러자 고개를 숙인 시녀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를 돌아 나갔다.
“세욕이 다 끝나면 말씀해주십시오, 아가씨.”
“그래….”
풍덩-.
“하….”
탕에 담근 차가운 몸은 불이라도 지핀 듯 금세 따듯해졌다.
시녀들이 준비해 놓은 물에서는 장미수라도 뿌린 것처럼 은은한 향이 퍼졌다.
불투명한 빛깔이 마유를 흘려 넣은 듯 뽀얗게 일렁였다.
멍하니 물을 튕기던 엘레나는 투명한 물방울이 맺힌 손가락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된 거지.”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부모가 있는 인간 그리고 부모가 없는 인간.
그녀는 이 둘 중 후자에 속했다.
그녀는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버려졌다.
엄마, 아빠의 이름은커녕 얼굴조차도 몰랐다.
보육원 선생님들이 곧 신이자 부모였다.
춥고 가난하게 자라왔다.
왕따를 당했지만 당당하게 이겨냈고 공부는 줄곧 잘해왔다.
장학금을 타지 못하면 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그다음 날은 걸을 수가 없었다.
그 덕에 좋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녀의 삶은 시궁창이었다.
우수한 성적이라는 명목하에 받은 장학금은 모조리 원장의 통장으로 가버렸다.
또 그녀는 독립하기 위해 중학생 때부터 이를 악물고 몰래 알바를 시작했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불공평하다고 하던가.
원장은 쥐새끼처럼 침대 밑에 숨겨 둔 단 하나뿐인 통장을 찾아버렸고 또 매를 맞았다.
그날은 생일이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19살, 여전히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에 보육원을 나갔다.
고시원이든, 반지하든, 옥탑방이든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저 보육원을 탈출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살아왔다.
“힘들었지. 왜 나만 그런 삶을 살아야 할까 많이 원망하기도 했고.”
신들의 장난일까, 아님 지독한 운명일까.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던 어느 날.
지겨웠던 회식 자리에서 겨우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신호등은 초록빛을 띠었고 평소처럼 그에 맞춰 횡단보도를 건넜다.
건널목의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였나.
어디선가 시끄러운 경적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빠르게 달려오는 과적 차량이 보였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움직이긴커녕 작은 비명조차 내지를 수 없었다.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물끄러미 커다란 트럭만 바라보고 있을 뿐.
아마 전생의 마지막 기억이 트럭 운전수의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을 테다.
“아저씨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지. 사람 눈이 그렇게 커지는 건 처음 봤으니까.”
그렇게 그녀의 운명은 바뀌었다.
눈을 깜빡한 순간 한낱 꿈을 꾼 것처럼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성인이었던 몸은 어린아이로, 자동차가 즐비했던 도로 한복판은 아이들로 가득한 보육원으로.
또 낯선 언어와 낯선 외향까지.
처음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언어가 저절로 이해되는 건 물론 별다른 노력 없이 자연스레 입 밖으로 튀어나왔으니까.
“또 갑자기 시야가 낮아지니까 세상이 다르게 보였지.”
그렇게 신이 그녀에게 다시 한번 행복하게 살 기회를 준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큰 착각이었다.
폭력은 언제 어디서나 그녀의 곁을 도사리고 있었다.
전생과 같이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하면 남들 눈에 띄지 않는 허벅지 안쪽을 꼬집혔고 밥을 늦게 먹으면 그다음 날은 굶어야 했다.
친구들과 싸우거나 원장의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무차별적으로 매를 맞기도 했다.
그것도 겨우 갓 7살이 된 어린아이인데 말이다.
아마 그때 처음으로 신이라는 존재를 원망한 것 같다.
신이 있다면 응당 전생에 비해 더 나은 삶을 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매일같이 울었다.
그렇게 그녀는 전생, 현생을 합쳐 20년이 넘는 세월을 보육원이라는 가시 돋친 울타리 사이에서 외롭게 자랐다.
매일같이 매질을 당하던 그녀가 처음 탈출이란 걸 생각했을 때는 겨우 7살 남짓한 나이였다.
이미 오랫동안 전생을 살아온 터라 보육원이 그녀의 삶에 하등 도움 되지 않는다는 건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올빼미가 울던 밤, 도망쳤다.
먹을 것, 잠자리, 입을 옷.
모든 게 부족했다.
하지만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한 그녀는 남들과 다를 바 없이 행복했다.
그와 함께 말이다.
‘엘레나, 이것 봐.’
‘응?’
그녀에겐 친구가 있었다.
보육원에서부터 같이 자라 평생을 함께해 온 친구.
‘뭐야, 이게. 웬 꽃?’
에이든은 9살이 되던 날 보육원에 입소했다.
그는 아이답게 엉뚱했지만 애어른처럼 성숙한 면도 있었다.
때론 엄마, 아빠처럼 때론 동료처럼 든든한 지원군이 돼주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싱그러운 미소를 선물해주던 친구였다.
이 세상엔 없어서 안 될 소중한 사람.
아주 어린 나이였던 엘레나에게 힘이 되어주던 사람이었다.
‘못생긴 얼굴 더 못생겨질까 봐. 좀 웃으라고. 네가 자꾸 우울해 하니까 나까지 우울해지잖아.’
‘뭐? 못생겨?’
‘아, 잘못했어! 때리지 마!’
그녀는 노래하고 춤추길 좋아했다.
집시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와 함께라면 그곳이 돌길이든, 숲길이든 어디든 상관없었다.
때론 연극을 하고 때론 거리에서 노래하며 돈을 벌었다.
변변찮은 수입이었지만 자유라는 것에 행복했다.
그때 힘이 돼 주었던 게 에이든이었다.
그 아이의 맑은 호박석을 닮은 눈동자가 생생했다.
그녀를 보며 웃던 그 미소는 잊히지 않을 정도로 환했다.
“에이든… 에이든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처럼 누군가에게 끌려가 매질이라도 당하는 건 아니겠지….”
옛 생각이 나는 듯, 푸른 눈동자는 멍하니 허공을 부유했다.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흐르는 눈물은 따듯한 목욕물에 천천히 낙하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밖에서 한사코 기다리는 시녀들이 있기에 어서 채비하고 나가야 했다.
그녀가 일어서자 찰랑거리는 목욕물이 탕 밖으로 흘러나갔다.
반죽을 해 놓은 듯 새하얀 여체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처럼 빛났다.
끼익-.
“저기… 나 다 끝났어.”
“예, 아가씨. 그럼 이만 이리로 오시지요. 앞으로 아가씨께서 쓰실 방을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새하얀 원피스에 얇은 숄을 간단히 걸치곤 방문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바깥세상에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느 귀족 자제인지 복도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온통 금으로 장식되어 있는 벽, 딱 봐도 값비싸 보이는 조각품들, 그리고 오르세 미술관에나 있을 법한 미술품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그 자태를 뽐내었다.
“이런 인간이 왜 나 같은 걸….”
“아가씨께선 대공님께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시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순간 얼음 조각상처럼 몸이 굳었다.
온전했던 뇌가 움직임을 멈춘 기분이었다.
대공.
대공이라고?
“시녀들 중에서도 시녀장인 저를 포함한 다른 이들을 아가씨께 배치한 걸 보면 여간 아끼시는 게 아닙니다. 또, 아가씨께 들어가는 것은 모두 최상급으로 준비했고요. 분명 대공님께선 아가씨를 소중히 여기시는 것….”
“아니, 그거 말고. 방금… 방금 대공이라고….”
엘레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대공은 에스텔 제국에 딱 다섯 명에게만 내려진 지위다.
그것도 공국의 군주들만 가질 수 있는.
한데 그가 대공이라고?
“어머, 아직 모르셨나 보군요.”
연갈색 머리를 단정히 묶은 제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이곳 아르데오 공국을 다스리는 대공님이십니다.”
“뭐?”
엘레나는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제인을 붙잡고 한 번 더 되물었다.
“그가… 뭐라고?”
“아르데오 공국의 군주, 데카루스 드 스큘러스 대공 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