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이젠 벌써 일주일째다.
혼자 있어 보니 있지도 않은 엄마 생각이 나더라.
해준 거라곤 이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래서 다들 엄마, 엄마 하는 건가.
가족이란 울타리 없이 비렁뱅이 생활도 씩씩하게 잘 견뎌왔는데.
왜 이제 와서 눈물이 나는 것일까.
끼익-
지겹도록 반복되는 낡은 문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시선의 끝엔 역시나 그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질리지도 않는지 똑같은 높낮이로 그녀를 불렀다.
“안녕, 엘레나.”
“…….”
또 왔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요새 그의 말에 대꾸조차 안 한다.
반항하면 밥을 굶길 줄 알았지만 이 남자 정말 사랑이란 걸 하나 보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은 물론 매번 화려한 진수성찬을 식사로 대접한다.
거기에 따듯한 물로 손수 세수까지 시켜주니 임금님 대접이 따로 없었다.
“오늘은 황제 폐하께 다녀왔어. 근데 날이 갈수록 노쇠해지셔.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정무도 못 보실 정도거든.”
그가 요새 하는 일과 중 하나다.
하루 종일 있었던 일 재잘거리기.
그 덕에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매일 한 시간씩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
일주일간 이 짓을 하다 보니 진절머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딴 거 말고 다른 얘기 좀 해 봐. 지겨우니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던가.
일주일간 말을 안 하니 입이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다물었던 입은 자동으로 고삐가 풀렸다.
그녀의 말에 그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고 다시금 재잘거리며 다른 재밌는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아, 저번에 말한 기사단장 이삭 기억나지. 걔가 내 소꿉친구인데 오늘 회의에서 나랑 대판 싸웠어. 그 이유는….”
“재미없어.”
“그럼, 제프타나 가의 귀족 재판이 열렸는데 그 이유가 윌리엄 제프타나 공작이 사람을 시켜 자기 딸인 아리아의 마차를 부숴 죽여버리려 했다더군. 그래서….”
“지겨워.”
“아, 그럼 다른….”
“네가 하는 얘긴 전부 재미가 없다고!!!”
결국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전부 뻔하고 재미없는 얘기뿐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엘레나, 그럼….”
“됐고. 날 데려온 진짜 이유나 설명해.”
그는 한숨을 두어 번 푹 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엘레나, 말했잖아.”
“첫눈에 반해 날 데려왔다고? 헛소리하지 마. 네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인 거 알아. 대체 날 어떻게 하려고……!”
엘레나는 의자를 들썩이며 괴성을 질렀다.
이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해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엘레나, 자꾸 그러면 당신을 묶어둘 수밖에 없어.”
그는 답답한 듯 고개를 숙여 한숨을 두어 번 쉬었다.
그러곤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힘들겠지만 당신이 이해해.”
“이해…?”
확실히 미쳤다.
그녀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 아니 그녀가 몸담았었던 보육원 원장보다도 미쳤다.
사람을 완전히 짐승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이해. 대주교께서 원래 이성적인 사람의 기본 덕목은 포용과 이해라고 하셨거든.”
“지금 나랑 장난해…?”
이 미친 남자는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걸까.
이렇게 사람을 짐승 취급해 놓곤 이해를 하라고?
“엘레나. 그러니 이만….”
이해고 나발이고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버스에서 24시간 동안 내리지 못하는 것보다 괴로웠다.
그가 떠먹여 주는 수프는 이제 보는 것조차 괴로웠다.
“그만….”
“엘레나.”
“그만! 그만 좀 하라고!!!”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적막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메아리치는 울림이 창밖으로 퍼져나갔다.
그녀의 목 주위엔 힘줄이 곤두서 있었다.
엘레나는 곧 울 것처럼 고개를 떨며 그를 향해 말했다.
“제발… 제발 그만 좀 해….”
원망으로 가득 찬 그를 향한 눈빛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이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끔찍한 지옥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지긋지긋해. 당신이 주는 음식도….”
고개를 떨군 엘레나의 목소리는 쉼 없이 떨렸다.
“재잘대는 목소리도.”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무릎을 적셨다.
툭툭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그녀를 더 애처롭게 만들었다.
“이제 다 너무 끔찍해….”
엘레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쇳소리가 간신히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고개를 들어.”
그는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예쁘게 올라간 입매는 호선을 그리며 미소 지었다.
“착하지.”
이제 정말 지긋지긋했다.
차라리 노예로 팔려 가는 게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밧줄은 점점 손목을 죄어 쓰라렸고 움직이지 않아 말라비틀어진 다리는 꼴도 보기 싫었다.
“제발… 제발 그만해.”
그녀의 눈동자는 마른 동태눈처럼 희미했다.
몸은 기운이 다 빠져 얼마 살지 못할 사람처럼 야위었다.
“살려줘… 제발, 제발…. 당신이 하라는 건 뭐든 할게… 그러니 제발.”
푸른 눈엔 투명한 파도가 아스라이 밀려왔다.
촉촉이 젖은 눈가엔 커다란 눈물방울이 맺혔다.
“하…!”
순간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그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웃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왜… 웃어?”
“처음부터 그렇게 애원했어야지, 엘레나.”
순간 그는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며 말했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당했구나.
처음부터 이 남자는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었어.
어떤 말을 할지, 어떻게 반응할지.
전부 다.
속이 새카만 여우에게 홀린 거야, 지금.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본능이 이성을 앞섰다.
“살려…줘….”
“그래, 앞으론 그렇게 말하는 거야, 엘레나.”
툭-
오래되어 삭은 밧줄이 손목에서 떨어졌다.
밧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돌바닥엔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흐흡…. 흡….”
“괜찮아, 괜찮아.”
그는 연신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며 떨리는 몸을 안아주었다.
이 따듯한 품이 얼마 만일까.
아린 손목은 힘없이 떨어져 그의 손에 닿았다.
그러자 그는 가녀린 몸을 안아 들었다.
“가자, 집으로.”
* * *
“으음….”
얼마나 잔 거지.
꽤 오랫동안 잠들었던 것 같은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따듯한 햇살이 그녀의 몸을 감싸며 반짝하고 빛났다.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눈을 뜬 엘레나는 잠시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다.
“아….”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새하얀 얼굴에 그녀는 뒤로 살짝 주춤했다.
“꿈이 아니야….”
감은 눈 아래로 보이는 기다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 깎아놓은 것처럼 높은 콧대와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
밀랍 인형 같은 그의 외모는 모든 이를 홀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에 정신 팔려있을 시간이 없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지 않고 이 방을 탈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용히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봤다.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문까지 소리를 내지 않고 갈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녀는 발 한쪽을 천천히 이불 밖으로 내밀며 몸을 살그머니 굴렸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실까.”
하릴없이 붙잡힌 손목이 그녀를 자석처럼 이끌었다. 저도 모르게 사내의 품에 안긴 엘레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거 놔….”
그녀는 굼벵이처럼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목소릴 떨었다.
“그건 안 되겠는데.”
귓바퀴에 닿은 입술 사이로 따듯한 호흡이 흘러나왔다.
살을 간질이는 찌릿한 느낌에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웅크렸다.
“부끄러워?”
단단한 팔이 그녀의 몸을 살짝 잡아 돌렸다.
겁먹은 토끼 같은 모습에 남자의 입가엔 잘게 주름이 졌다.
“비켜…. 갈 거야.”
“당신이 어딜 가.”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손길에 고개를 홱 돌려 그를 피했다.
“집에 갈 거야….”
얕게 떨리는 눈동자는 간신히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반쯤 감긴 눈꺼풀은 사람을 홀리는 구미호처럼 유혹적이었다.
“여기가 앞으로 당신 집이야.”
그는 흐드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나 가야 해.”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앞을 가로막은 단단한 몸을 밀어냈다.
하지만 물이 바위를 쪼갤 수 없듯 그녀가 그를 벗어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그는 달아나려는 여체를 세게 껴안아 완전히 품 안에 가두었다.
“쉬이, 착하지.”
그는 사나운 고양이를 달래는 듯 천천히 그녀를 진정시켰다.
“여긴 내 집이 아니야….”
“곧 익숙해질 거야.”
“이 손 치워, 당장.”
“엘레나, 소용없는 거 알잖아.”
그 순간 엘레나는 있는 힘껏 그의 팔목을 물며 발악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깊게 들이켠 숨을 내쉬며 악력으로 그녀의 입을 떼어냈다.
핏줄이 선 손목에는 짐승에게 물린 듯한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나도 고양이는 처음인데.”
그는 물린 손목을 높이 쳐들어 눈앞에 댔다.
새하얀 피부는 곧 피가 날 것처럼 빨개졌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팔목에 머물던 시선이 이내 그녀에게 향했다.
루비처럼 붉은 눈빛엔 싸늘한 한기가 돌았다.
“당신은 아무 데도 못 가.”
그의 품에 폭삭 안긴 엘레나는 발버둥 치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놔! 놔!!!”
“당신은 나와 이곳에서 평생 함께할 거야.”
그는 덤벼드는 벌떼처럼 그녀를 몰아붙였다.
기를 쓰고 헤쳐내도 소용이 없었다.
마치 늪에 빠진 발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뭔데… 대체 뭔데 이러는 거야!!!”
고요했던 방 안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창문에 앉아 먹이를 먹던 새들 또한 놀라 달아났다.
대체 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첫눈에 반해서 사람을 돈으로 사서 가둔 거라고?
말이 안 됐다.
하물며 정말 사랑한다면 이런 식으로 대하진 않았을 테다.
흔들리는 눈빛이 그와 마주했다.
은은한 미소를 띤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사랑하니까, 엘레나.”
“난 당신 장난감이 아니야.”
“그래, 내 신부지.”
그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귀 뒤로 넘겼다.
소름 돋는 감각에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렀다.
눈을 감고 이를 꽉 물었다.
눈가엔 동그란 물방울이 맺혔다.
“왜 울어.”
가느다란 손가락이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냈다.
힘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비처럼 쏟아졌다.
“그만해, 제발. 제발…….”
그의 손가락이 살며시 속눈썹을 간질였다.
“예쁘다.”
그가 허리를 끌어당기자 그녀는 작은 곰 인형처럼 너른 품에 폭삭 안겼다.
“오늘 시녀들이 와서 당신 방을 안내해줄 거야. 또 일상복도 맞출 거고.”
예쁘게 볼록 튀어나온 이마에 따듯한 입술이 맞닿았다.
“그러니 잘하고 있어, 엘레나. 난 오늘 사냥 약속이 있어 나가봐야 해.”
“…….”
앙다문 입술 사이론 가벼운 신음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머리를 한번 쓰다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 앞으로 향했다.
“탈출은 불가능하니까, 얌전히 있어.”
“쓰레기 같은 새끼….”
화가 난 걸까.
그는 옷을 입다 말고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눈동자엔 싸늘한 한기만이 감돌았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여린 턱을 휘어잡았다.
“역시 그 입버릇은 고치는 게 좋겠어.”
벌어진 셔츠 사이로 단련된 듯한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턱을 높게 치켜들며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설마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닐 테고.”
그의 말에 순간 몸이 떨렸다.
경직된 표정을 본 그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피식하고 웃었다.
“그럼, 다녀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