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2화 (2/117)

2화.

“콜록! 콜록!!”

이런 생활을 한 지도 어언 4일째.

하지만 저 사이코는 여전히 그 흔한 풀떼기죽조차 주지 않았다.

굶겨서 죽이는 악취미가 있는 것일까.

아니, 그건 또 아닐지도.

죽지 않을 정도로 물을 주는 걸 보니 그저 고통스러워하는 걸 즐기는 것 같다.

온몸은 혈액이 빠져나간 것처럼 맥이 없다.

이러다가 곧 아사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남겨왔던 음식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끼익-

몇십 년은 돼 보이는 고장 난 나무문이 기분 나쁜 소릴 내며 열렸다.

이윽고 문 뒤로는 재수 없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오늘은 웬일로 가지런히 놓인 식사를 들고 나타났다.

갓 만든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와 수프에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사람이 며칠을 굶으면 이성이 사라지고 짐승이 된다는 것을 오늘 뼈저리게 깨달았다.

음식, 음식이 너무나도 먹고 싶었다.

“안녕, 엘레나.”

탁-.

언제나 똑같은 인사와 말투.

똑같은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그는 먼지가 잔뜩 낀 책상 위에 트레이를 올려놓곤 느린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돌바닥에 닿는 구두 굽 소리가 저벅저벅 방 안에 울렸다.

“오늘은 어쩐 일로 조용하네.”

“…….”

그의 소망대로 그녀는 이를 드러내지 않고 얌전해졌다.

며칠을 굶었더니 반항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당신이 죽을까 봐 이것저것 가져왔어.”

“하….”

이제야 죽을 걱정을 하는 건가.

이것 참 고마워해야 할 일인 건지.

“전보단 낫네.”

곱슬거리는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그의 손에 엉겼다.

고개를 내저을 힘도 없었기에 그저 얌전히 따랐다.

“차라리 죽여….”

결말이 뻔히 보이는 이야기 따위 더 이상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

굶겨서 죽이려면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나았다.

“내가 당신을 왜 죽여.”

남자는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빛엔 애정이 가득했다.

“내 신부가 될 사람인데.”

“미친놈….”

그의 머릿속을 해부할 수만 있다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테다.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입으로 나오는 말들도 더 이상 듣기 힘들었다.

“당신은 그 입버릇부터 고쳐야겠어.”

그는 허리를 숙이곤 천천히 얼굴을 갖다 댔다.

까맣고 긴 속눈썹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비쳤다.

“내게 그렇게 발톱을 세우면 되겠어.”

“닥쳐…!”

그녀는 본능만 남은, 죽기 직전의 사자처럼 으르렁댔다.

남자는 비소를 흘리며 냉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입술이 문제일까.”

거칠거칠한 입술에 따듯한 입김이 내려앉았다.

입을 열면 곧바로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님 이런 걸 원하는 거야?”

그는 장난스레 웃으며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마주 닿은 온기에 기분이 무척이나 더러웠다.

“귀엽게.”

“꺼져…!!!”

고개를 홱 돌리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며 소리쳤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에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콜록… 콜록…! 하아… 하….”

“그래도 아직 발악할 힘은 남아있나 봐.”

“아…!”

억지로 들린 턱 끝이 그에게 향했다.

그는 나른한 눈빛으로 눈, 코, 입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당신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살짝 들린 남자의 입가엔 주름이 졌다.

바닥을 기는 낮은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런 건 내가 전문이라.”

그녀는 그를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목구멍 사이로 퍼져나온 힉힉거리는 쇳소리가 입 안을 맴돌았다.

“근데 내가 참을성이 없어.”

그는 들고 있던 물병 뚜껑을 입으로 따냈다.

“마셔.”

“윽…!”

그는 물로 가득 찬 물병을 입 안에 들이부었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물은 곧장 그녀의 옷을 적셨다.

축축이 젖은 옷 너머로 굴곡진 여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런, 숙녀께 실수를.”

“하아… 하아…!”

그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수가 놓인 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그녀의 목 주위와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닦았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엘레나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입이 그렇게 거칠어서야.”

남자는 눈앞에 아른거리던 손을 멈춰 세우곤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예쁜 말만 써야지, 응? 엘레나.”

“내가 몇 번째야….”

초점 없는 눈빛은 갈 길 잃고 허공을 맴돌았다.

분명 이렇게 희생된 자가 그녀 말고도 여럿 있을 테다.

신부랍시고 데리고 와 제풀에 지칠 때까지 마음껏 갖고 놀다 버린 인형들.

“…….”

남자는 대답 대신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틀었다.

“이런 더러운 악취미가 세상에 폭로되면 당신에게도 치명타야!”

그녀는 헐떡대는 숨을 간신히 정돈하곤 목소리를 내뱉었다.

“엘레나.”

따듯한 손길이 그녀의 차가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덕분인지 몸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난 당신밖에 없어.”

“허…!”

이제 더 이상 그의 말에 놀아날 기운조차 없었다.

온몸을 감싸는 허무함에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물에 젖은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완연한 봄이라고 해도 햇빛이 들지 않는 이곳은 싸늘하기만 했다.

“왜 하필 나야….”

재수 없는 것도 능력일까.

전생과 현생 모두 이렇게 불행한 게 가능할 걸까.

이 정도면 신이 맘대로 인생을 쥐락펴락하는 게 아닐까.

첫 번째 생의 불행을 지우기 위해 두 번째 생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신은 정말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는구나.

눈가엔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소낙비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왜 하필….”

여기서 죽으면 행복할까 아니면 억울할까.

아니면 그럴 새도 없이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려나.

그가 처참하게 떨궈진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면 나 마음 약해지는데.”

“손 치워….”

잇새로 바람 소리만 겨우 내던 엘레나는 떨리는 눈을 치켜세워 그를 바라보았다.

“울지 마, 엘레나.”

그는 죽어가며 눈물 흘리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초연해 보였다.

은은한 미소를 띤 그의 얼굴에선 악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눈가를 매만지던 손가락이 흐르는 눈물을 쓸어내렸다.

“안 되겠어. 내일 다시 올게.”

그는 싱긋 웃더니 자세를 바로 하며 뒤를 돌았다.

책상 앞에 선 남자는 다시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집어 들었다.

“아….”

순간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이 뒤섞였다.

여기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정말 죽을 테다.

아무리 거지 같은 삶이었다 해도 다시 주어진 인생을 이렇게 비참하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엘레나는 마지막 힘을 간신히 쥐어짜 그를 불렀다.

“잠깐….”

그의 뒷모습에 언뜻 희미한 미소가 비쳤다면 착각일까.

키 큰 남자는 식사를 들고 다시금 천천히 걸어왔다.

시간이 지나 식긴 했지만 수프에선 여전히 온기가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고개를 숙여 붉은 눈을 맞추었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이건 그가 주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꼭 저승사자가 죽기 전 마지막 할 말을 묻는 것처럼.

그녀는 말없이 손에 들린 트레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아, 이거. 먹고 싶어?”

“…….”

떨리는 눈동자는 허망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여기서 대답을 하지 않으면 곧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자존심 같은 걸 내세우다간 꼼짝없이 뼈만 남은 해골이 될 테다.

결국 엘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 착하지.”

그는 테이블에서 가져온 따듯한 식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떠 그녀의 입에 건네주었다.

4일 만에 맛보는 음식이라 그런지 허겁지겁 정신없이 삼켰다.

음식이란 게 이렇게 귀한 것인지 처음 알았다.

떠돌이 생활을 할 때도 음식은 마음껏 먹을 수 있었는데.

“잘 먹네.”

그는 잘 먹는 그녀의 모습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마치 사료를 잘 받아먹는 귀여운 강아지를 만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입을 벌리고 닫는 행위만을 계속했다.

혀를 넘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음식에 그저 황홀경에 빠질 뿐이었다.

“이렇게 잘 먹을 거면서.”

어느새 트레이 위엔 빈 그릇들이 한 개, 두 개씩 쌓이기 시작했다.

그릇의 높이만큼 그녀의 곯은 배도 점점 차올랐다.

그렇게 포만감이 들자, 갑자기 거의 다 죽인 먹잇감을 살리는 의도가 궁금했다.

“이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게 뭐야.”

점멸할 듯 느리게 깜빡이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릇이 담긴 트레이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새하얀 뺨에 닿은 사내의 큰 손이 그녀를 어루만졌다.

“당신.”

“…….”

그는 감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이야, 대체… 난 돈 많은 귀족 영애도 아니고 그저…!”

“알고 있어.”

남자는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끝에 입을 살짝 맞추었다.

반쯤 감긴 그의 눈빛은 사람을 홀릴 것처럼 관능적이었다.

“그저 당신이 필요해.”

“대체 왜 나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분도, 재력도 없는 사람을 왜 그렇게 원하는지.

“당신을 사랑하니까.”

“허…!”

차갑게 꽁꽁 얼었던 뇌가 급속 해동되는 기분이었다.

사랑한다는 그의 고백에 헛웃음이 나왔다.

“사랑…?”

종잇장처럼 구겨진 얼굴은 쉬이 펴지지 않았다.

엘레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한번 되물었다.

“당신이 날… 사랑해…?”

“그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평생 사랑이란 걸 받아본 적은 없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다.

사랑이란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마음이 아닌가.

이렇게 사람을 짐승처럼 이용하고 가두는 것이 이 단어의 정의였나.

“헛소리 작작해….”

“진심이야.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해.”

예쁘게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엔 조소가 피었다.

말장난을 하는 듯한 이 남자에게 없던 정도 떨어질 것 같았다.

엘레나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비꼬듯 말했다.

“억지 부리지 마.”

“억지가 아니야, 엘레나.”

밥을 먹어 겨우 난 힘이 다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온전하지 않은 자와 대화를 나눈다는 게 이리 힘든 일이었나.

말라붙은 입술엔 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엘레나는 답답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감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을까.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대화에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았다.

“당신이 정말 날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이거 풀어.”

그녀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듯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진지한 듯한 그녀의 말에 남자는 잠시 행동을 멈췄다.

그렇게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은 내게 뭘 줄 건데?”

“하….”

이 와중에 거래를 하자는 건가.

똑똑한 건지 아님 교활한 건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장단에 조금 맞춰주기로 했다.

정말 풀어준다면 이것만큼 좋은 기회는 없으니까.

“그럼 나도 당신을 사랑할게.”

혼신의 힘을 다해 최대한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학생 때 했던 연극 동아리의 짬이 어디 갈쏘냐.

나름 연기파 배우였던 경험을 살려 신들린 메소드 연기를 펼쳤다.

“…….”

그는 말없이 일어나 의자 뒤로 향했다.

밧줄에 닿은 차가운 손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몸이 조금씩 움찔댔다.

“후회하는 일 없을 거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론 쾌재를 부르며 도망갈 준비만을 했다.

풀리자마자 바로 저 문을 열고 뛰쳐나가리라 다짐했다.

“근데, 엘레나.”

“응.”

움직일 때마다 그에게서 나는 부드러운 블랙베리 향이 코끝을 찔렀다.

그가 손을 움직이자 그녀를 옥죄던 밧줄이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설마 진짜 풀어줄 거라 생각한 거야?”

남자의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꼭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당신이 그렇게 멍청할 리 없잖아. 안 그래?”

그는 다시 밧줄을 동여맨 뒤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턱을 휘어잡아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귀엽게.”

“미친 새끼.”

“그렇게라도 당신이 날 불러준다면 얼마든지 환영해.”

그는 조심스레 손을 잡더니 무릎을 꿇고 키스했다.

따듯한 입술이 그녀의 손등을 녹였다.

“우리 사랑이 영원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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