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화 (1/117)

1화.

“날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

지쳐버린 몸뚱이가 힘없이 밧줄에 기댔다. 며칠은 굶은 듯 맥없는 목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그건 그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남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먼지가 가득한 책상을 천천히 긁었다. 듣기 싫은 소리가 귓속을 시끄럽게 울렸다.

그는 그렇게 천천히 다가와 가냘픈 턱을 쥐어 잡았다.

“사랑스러운 엘레나, 나의 신부.”

“이 손 치워.”

여자는 기분 나쁜 듯 고개를 홱 돌리며 마구 잡은 손길을 뿌리쳤다.

그는 피식 웃더니 무릎을 굽히고 앉아 의자에 묶인 그녀를 소중한 듯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친 붉은 눈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는 인간이 아닌 악마일까. 미소 짓는 새하얀 얼굴이 아름답다.

그 어떤 존재보다 빛나는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라고 할 수 있을지도.

그의 입술이 촉촉이 닿는다. 벌어진 입술 사이 뜨거운 무언가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거부할 수 없는 악마에 오늘도 비참하게 홀려버렸다.

“사랑해, 엘레나.”

* * *

그녀는 납치당했다.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아름다운 사내에게 말이다.

“안녕, 엘레나.”

루비처럼 빛나는 새빨간 눈동자에 밤하늘처럼 까만 머리칼을 가진 이 남자.

저보다 두 뼘은 큰 듯한 키에 다부진 어깨 그리고 중저음의 목소리까지.

여자깨나 울렸을 것 같은 이름 모를 이 인간.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사이코패스다.

“잘 잤어?”

그가 정상이 아닌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 번째, 헛소리를 잘한다.

“나도 당신과 함께 자고 싶었는데, 아쉬워.”

두 번째, 공감 능력과 이해 능력이 떨어진다.

“묶어둔 팔은 아프지 않지?”

세 번째, 사람을 짐승 취급한다.

“당신이 아직 사나워서 말이야.”

한마디로,

“미친 새끼….”

현생과 전생을 통틀어 어언 30년을 살아왔지만 이런 인간은 처음 본다.

사람을 묶어놓고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질 않나.

강아지처럼 귀엽다고 쓰다듬질 않나.

그렇다고 또 극진히 대접해주는 것도 아니다.

여기 와서 이틀째 밥 한 끼 먹은 적이 없다.

아무래도 굶겨 죽일 심산인가 보다.

“아무리 납치라고 해도 밥은 주는 게 상도덕 아닌가?”

다이어트한다고 굶을 때도 이렇게 못 먹진 않았다.

그 덕에 마른 몸이 더욱더 빼빼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당신을 조용히 만들려면 어쩔 수가 없어.”

진지한 듯한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이 밥을 안 먹으면 죽는다는 걸 모르는 건가?

대체 이 인간 상식이란 게 있는 걸까.

“이거 당장 풀어.”

“아직은 안 돼, 엘레나.”

예쁘게 올라간 입매는 초승달처럼 환한 미소를 그렸다.

그는 붉은 눈을 지그시 맞추며 또박또박 말했다.

“도망갈 거잖아.”

순수한 그의 말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말속에 담긴 의미는 그렇지 않았다.

이건 절대 도망갈 수 없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죄송한데 전 댁이 누군지 몰라요.”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봐도 이 남자와 관련된 건 단 한 개도 없다.

하지만 뭔데 자꾸 아는 척을 하는 건지 속이 먹먹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그는 손을 들어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눈빛에선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 손 놓지.”

한껏 눈매를 세워 최대한 무섭게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이런 것 따위 그에게 어린아이 장난과도 같았다.

“그런 표정도 귀여워.”

그는 아주 머리가 닳을 정도로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덕분에 말 잘 듣는 강아지가 된 듯한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한 거겠지.

어르고 달랬던 화가 갑자기 튀어나와도 할 말 없을 테다.

“말로 할 때 놔.”

이건 진심이었다.

손만 풀려있었다면 그를 흠씬 때렸을 것이다.

목소리를 내리깔고 표정을 굳히자 그는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 얼굴을 들이댔다.

“당신이 어쩔 건데.”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틀며 비소를 흘렸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 속엔 비아냥대는 투가 섞여 있었다.

“소리 지를 거야?”

“…….”

“아님 여길 빠져나가기라도 하게?”

그는 여우 새끼처럼 살랑거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하대하는 듯한 느낌에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응? 말해 봐.”

그는 확실히 미친놈 같았다.

이 상황에서 자기가 우위에 있는 것처럼 실실거리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그녀도 만만치 않은 미친년이라는 걸.

퉤-.

“엿 먹어.”

그녀는 짓궂게 웃으며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미소를 띠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는 게 보였다.

쌤통이다.

“당신은 여전히 짓궂어.”

그는 손등으로 오른쪽 볼에 묻은 타액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꼭 화장품 광고 모델처럼 말이다.

“사랑스럽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다.

그가 못되게 군만큼 그대로 돌려줄 수밖에.

“당신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손을 들어 부드럽게 볼을 쓸어내렸다.

“이렇게까지 예의가 없을 줄이야.”

그의 말에 잠시 허수아비처럼 몸이 굳었다.

지금 설마 자신에게 예의가 없다고 말한 건가?

“……예의?”

“그래, 엘레나. 남편 얼굴에 침을 뱉으면 안 되지.”

뇌가 정지된다는 게 이런 말인가.

지금 저 남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곰곰이 따져보았다.

남편, 그러니까 영어로 Husband.

사전적 정의로 혼인하여 여자의 짝이 된 남자.

“뭐?”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되물어 주었다.

그의 말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갔기에.

“남편, 엘레나. 당신과 내가 결혼할 테니까.”

한참 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느낌상 이 컴컴한 방 안의 공기가 멈춘 듯했다.

이 남자, 방금 결혼이라고 했나.

“……뭐?”

“결혼. 당신과 나의.”

“하….”

너무 어이가 없을 땐 헛웃음이 나온다고 하던가.

지금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어.”

“혹시, 당신 약이라도 먹은 거야? 아님 술에 취한 건가? 그것도 아님 정말로 미친 거야?”

분노에 차올라 그를 향해 속사포 랩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입을 열었다.

“응, 당신에게.”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하는 걸 보니 진심인 것 같다.

그때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들이 지나갔다.

아, 잘못 걸렸구나.

이 남자, 진심이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그녀는 눈을 감고 속으로 염불을 외우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정확히 날 데려온 이유가 뭐야.”

그러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내 신부니까.”

“하….”

그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말자는 게 철칙이었는데.

그 철칙이 오늘부로 깨져버렸다.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솟아올랐다.

“그래서 날 산 거야…? 나랑 결혼하려고? 그 돈을 주고?”

“그래.”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일주일 전, 제국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그녀는 항구에서 타국 불법 노예상에게 강제로 붙잡히게 되었다.

그렇게 발버둥 치다 흠씬 두들겨 맞아 짐승들이 타는 화물선에 타게 되었고, 무념무상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순간 이 사이코가 배를 뒤집어엎은 것이다.

그렇게 노예 경매상에 끌려간 그녀는 꽤 비싼 값이 매겨졌다.

경매꾼들은 희귀한 분홍 머리를 가진 여자에 꽤나 흥미를 가졌고, 덕분에 그녀의 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하지만 그때 이 남자가 나타났다.

천만 루나에 노예를 사들인 그는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뭐, 그 덕에 이렇게 살게 되었지만 다시 납치당하고 싶은 건 절대 아니었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천만 루나면 건물이 10개 딸린 저택을 사고도 남는 돈이다.

일반 서민이 평생 손에 쥘 수도 없는 돈을 하루 만에 써대는 사람이라면 엄청난 재력가인 게 분명하다.

“드디어 내게 흥미가 생겼나 봐.”

순간 그는 한쪽 입꼬릴 올리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벗어나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의자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그래, 대체 누구기에 이 아르데오 공국에서 이딴 미친 짓을 하는지 너무나도 궁금해서 말야.”

그의 복장을 보아하니 어디 대단한 집안의 영식인 것 같다.

아무렴 지체 높으신 귀족 나리의 망나니 막내아들쯤 되겠지.

“당신이 내게 이렇게나 관심이 많을 줄이야.”

그는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마치 재밌는 놀이라도 하듯 그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너무나도 영광인걸.”

여유가 넘치는 당당한 모습에 오기가 생겼다.

이곳에서 탈출해서 그를 꼭 치안국에 넘겨버릴 테다.

“그래, 지금 그렇게 마음껏 즐겨놔.”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왜, 설마 날 치안국에 넘기기라도 할 건가.”

속으로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깜빡였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불가능할 텐데.”

“당신이 몰라서 그러나 본데, 이 아르데오 공국에선 범법 행위를 한다면 그 누구라도 정당히…!”

“하….”

그는 짧게 탄식하더니 피에로처럼 입매를 주욱 올렸다.

그러곤 뭐가 그리 웃긴 지 한참 동안 너털웃음을 지었다.

“…….”

“계속 말해 봐.”

그는 어디 들어나 보자는 표정으로 비딱하게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비아냥대는 그의 태도에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더 이상 입도 벙긋하고 싶지 않았다.

“…….”

“당신은 절대 못 해.”

확신에 찬 듯한 눈빛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런 것에 질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 역시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봤다.

“스큘러스 대공 전하께서 당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데카루스 드 스큘러스.

황가의 방계혈족이자 아르데오 공국의 군주로서 제국에 그 명성을 떨친 남자이다.

그는 인성이면 인성, 학문이면 학문, 무술이면 무술로 입소문이 난 엄친아 중 엄친아다.

심지어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모 탓에 뭇 여인들 사이에 팬클럽까지 있을 정도.

또 그는 자선사업가로서 길거리의 비렁뱅이들에게 매번 빵과 우유를 나눠주며 선행을 베푼다는 미담은 아르데오 공국민이라면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만 공국민 앞에 평등하신 분이라면 응당 이자를 처벌해주실 것이다.

“허…!”

그는 삐딱하게 서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 인간이 정말 그러겠대?”

“그래, 그분은 공국민을 위해…!”

“대체 그런 소린 어디서 듣고 온 건지….”

그는 낮게 탄식하며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팔짱을 끼고 잠시 상념에 잠긴 남자는 이내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만약 그게 나라면?”

그들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일정한 박자에 맞춰 탁탁 움직이는 구두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뭐?”

“그 고귀하신 대공 나리가 나면 어쩌려고.”

이 인간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본래 대화란 건 퍼즐처럼 아귀가 맞아야 되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지금까지 나눈 온전치 않은 대화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기할까.”

“하! 그래. 내기해.”

온 공국민의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미친놈일 리가 없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성군이라 칭할 정도로 칭찬이 자자한데 말이다.

“자신 있나 봐?”

“그래. 만약 그렇다면 그 망할 결혼 내가 직접 해주지.”

그러자 그는 눈을 내리깔고 속삭이듯 읊조렸다.

“결혼… 결혼이라….”

나른한 그의 눈빛은 악마의 달큰한 속삭임처럼 뇌쇄적이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 턱을 괸 남자는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당신,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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