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97화 (외전 완) (97/97)

외전 4화.

차가운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감각이 생경했다. 나는 빛에서 검을 빼내기 위해 의자에서 굴러야 했고, 간신히 빛에 손을 넣었다. 다행히 빛을 투과한 내 손 쪽으로 검이 옮겨 왔기 때문에 손에 쥘 수 있었다. 검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나는 검을 흘긋 보고 다시 꽉 쥐었다. 손에 땀이 나서 미끄러웠다. 언제나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여겼는데, 막상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어딘지 아득해졌다. 만감이 교차했다. 여러 명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를 돈벌이로만 보던 부모. 나를 사고팔며 고깃덩이로만 취급하던 매음굴의 포주. 매음굴에서 내게 온정을 베풀던 같은 처지의 여자들. 언제나 모호한 감정만을 남기던 베르디안. 끔찍할 정도로 증오만 했던 리안 휴리트.

그리고 헤일라.

헤일라. 나는 남겨질 헤일라에 관해 가장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그 애를 위해 안배해 둔 모든 것을 차근차근 되새겼다.

헤일라는 네이오라를 쓰지 않을 것이다. 영리한 애니까. 더 이상 내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약은 쓰지 않으리라. 그리고 약을 쓰지 않겠다 다짐한 순간에야 나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이 검으로 뭘 도려내야 할지도 깨닫겠지.

하지만 과연 쓸 수 있을까? 검을 쓰면 자유로워지겠지만 죄책감 따위는 모르는 괴물이 될 테고, 쓰지 않으면 영영 휘둘리며 착취당할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나조차 모른다. 그러니 헤일라도 선택에 꽤나 애를 먹겠지. 나는 헤일라에게 저주와 같은 기회를 주고 떠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선물 앞에는 나의 죽음이 있으리라.

죽음 이후의 세상에 관해서는 신이 보여 주지 않았으므로 미래 따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네게 남겼으니 됐다.

사념을 떨친 나는 망설임 없이 왼 눈으로 칼을 찔러 넣었다.

“하윽…….”

안구를 불로 지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아직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됐다. 나는 칼을 빼낸 뒤에 몸 여기저기에 얕고 깊은 자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리안 휴리트가 나를 살해했다는 정황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피가 쏟아지고 온몸에 열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아마 검을 쓰는 데 성공하든 실패하든 여기서 죽겠지. 이 정도 상처를 입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강한 몸이 못 되었다.

마지막으로 심장에 검을 겨누었다.

“헤일라.”

나는 침대에 앉아 시간을 죽이며 네 이름을 불렀던 그때처럼 똑같이 너를 불렀다.

“헤일라, 나는…… 나는 네가 정말 끔찍해.”

너에게는 내가 그렇겠지.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어둠에 섞여 들었다.

“어떻게 날 버려. 네가 어떻게 나를 버려! 가족이라고 했잖아. 사랑한다고 했잖아!”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데. 다 잃었어도 너를 살렸으니 되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까지 했는데…….

원망의 목소리가 허무하게 퍼졌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건만 눈물만 줄줄 흘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을 원망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게 했어야지. 그랬으면…….”

그렇다면 나는 조금 더 안온하게,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헤일라를 온전히 이해하며 사랑한다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이것은 홀로 모든 것을 알게 된 인간의 비극이었다. 다른 인간들은 알 턱이 없다. 그들은 무지하며 그러므로 행복하다. 그러나 자신이 행복하다는 자각도 없다.

아마 너도 그렇겠지. 헤일라는 나의 불행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믿겠지만 사실은 이 빌어먹을 예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안다는 것. 끔찍한 신의 안배가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감정도 알지 못하는 천치가 되어 버렸다. 너를 사랑하는지 증오하는지도 모호하여 매 순간 갈팡질팡하는 내 꼴이 너무나 우습다.

다음 생에는 사랑이든 원망이든 하나만 하고 싶어.

검을 다시 꽉 쥐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눈앞이 흐렸다.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이다음은 아주 쉬웠다. 감정을 지우고자 하는 대상과, 그 대상을 향한 절대적인 감정을 속으로 읊으면 된다. 이것은 검을 쓰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었다.

빛이 울렁이며 신의 검을 감싸고, 손안에서 검이 진동했다.

“부디…….”

헤일라에 대한 증오를 지워 줘.

퍽, 하고 칼날이 심장을 갈랐다. 살갗을 가르고 파고드는 선득한 칼날의 감촉이 선명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깨닫게 된 사실 하나.

검을 쓰는 데 실패했다.

그리하여 검은 내 심장을 그대로 관통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이것은 행복에 겨워 흘리는 눈물이 분명했다. 나는 죽기 직전에야 행복하면 눈물이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습게도, 축복처럼 느껴졌다. 뽑히지 않는 검이 이토록 안온한 죽음에 이르게 할 줄이야.

점점이 퍼지는 어둠이 나를 이끌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반항 없이 그것을 따랐다. 온기가 가시는 육신의 입술이 호를 그렸다. 그리고 완전한 침묵과 점멸이 내 주변을 메웠다.

죽음이었다. 그리고 죽음의 요람 속에서 익숙함이 나를 덮었다.

삐그덕대는 오랜 나무 침대,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얇은 이불 속에서 작은 손으로 너와 손장난을 치던 그때가 눈앞에 아른댔다.

편안했다.

03. IF_평행선

수풀이 우거진 산의 초입. 남루한 옷을 몇 겹이나 껴입은 여자가 헤진 신발을 신은 채로 터벅대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마른 손은 투박한 칼자루를 쥐기 위해 옹골지게 말려 있었다.

“하아, 흑…….”

여자는 아주 지쳐 있었다. 입술 새로는 신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온몸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동자는 흉흉하기 그지없었는데, 그녀는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손 안에 든 칼은 결코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몸은 정신을 떠받들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툭 치면 부러질 것처럼 얇은 다리는 후들대다가 무너지기 일쑤였다. 결국 여자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수풀 사이에 몸을 처박았다.

“아, 아…….”

죽여야 하는데. 그 인간들을 기어코 죽인 다음에야 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머릿속에는 자신을 사창가로 팔아넘긴 부모의 피를 봐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씻을 수 없는 병을 얻어 더러운 포주도 멸시하게 된 나를 감당하는 건 오롯이 부모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일어나서, 얼른…….

탁!

그때 누군가 여자의 손목을 잡아챘다. 손에 들고 있던 녹슨 칼이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고개가 강제로 돌아갔다.

“레테.”

그녀를 잡은 건 남자였다. 남색 눈동자를 가진 커다란 남자. 그는 한 눈에 봐도 값비싼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귀족이 분명했다.

그런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레테는 털을 곧추세운 고양이처럼 날을 세워 그를 쏘아 봤다.

“레테, 레테.”

“당신 뭐야.”

미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매음굴에서 상대하던 음침한 귀족 중 이런 남자는 없었는데,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 알 길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이럴 시간이 없었다. 얼른 일어나 칼을 휘둘러 그들을 도륙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몸이 굳어 버리는 병이라 했으니 하루빨리 해치워야 했다.

그런데 이 미친 남자가 놔주지 않는다.

“아, 드디어, 드디어…….”

그는 이상한 말만 되뇌며 레테를 꽉 안았다. 빠져나오려 했지만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난 당신을 몰라.”

레테가 무슨 말을 하든, 남자는 아주 오랫동안 레테의 마른 몸을 확인하듯 더듬었다. 앙상한 어깨, 날개뼈가 도드라진 등, 굴곡진 허리를 빠짐없이 훑었다. 그러나 성애적인 몸짓이 아니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존재한다는 걸 절박하게 확인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 짓을 이어 나가다가 천천히 몸을 뗐다.

“응, 모를 거야.”

마주 본 그는 볼우물이 패도록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요요히 빛나는 눈동자에는 이름 모를 감정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지금 장난해?”

“내가 널 만나기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지 알면 그런 말 못 할 텐데.”

그는 다시 한번 레테를 껴안으며 한숨 쉬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안 놓으면 배에 구멍 날 줄 알아.”

레테는 저가 떨어트린 칼을 주워 쥐며 말했다. 그걸 본 남자가 유쾌하게 웃었다.

“구멍이야 이미 한 번 났어. 여기 오는 길에.”

그는 눈썹을 모으고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칭얼댔다. 그러나 자상을 입었다는 말은 거짓임이 틀림없었다. 레테와 닿아 있는 복부는 붕대를 덧댄 티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아.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

“…….”

무시하자. 레테는 일어나면서 시선을 돌렸다. 미친놈이 분명했다. 엮이면 복수고 뭐고 끝장날지도 몰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그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레테는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을 가볍게 밀치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발에 체이는 나뭇잎들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사랑한다는 뜻이야.”

그리고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남자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기억나는 건 뒷목의 알알함 정도였다.

* * *

“그러니까 우린 운명이라는 거야.”

“또 정신 나간 소리 하지.”

“그래, 정신이 나갔어. 너한테.”

뻔뻔하긴. 레테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냥 웃어 넘겼다. 긴장 따위는 묻어 있지 않은 깨끗한 미소였다.

자신을 베르디안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오 년간 한결같이 레테의 옆에 머물렀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아냐고 물어도 봤지만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와 우리를 맺어 줬다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나 해 댔다. 베르디안도 그것이 거짓말임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으나 다른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결국, 처음 만날 날부터 레테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호화로운 감금 생활에 절여졌다. 그것에는 매음굴에서 얻은 병을 치료하는 행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은 좀 어때?”

그는 레테의 손을 주물대며 물었다.

“네 덕에 안쪽이 헐어 버릴 것만 빼면.”

레테는 어젯밤 그가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일을 되새기듯 이마를 좁혔다. 유독 질척댔던 밤이었다. 그러나 퉁을 주려는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베르디안은 볼을 붉히며 쑥스러워 할 뿐이었다.

“그럼 오늘은 핥기만 할게.”

“미친놈.”

둘은 이런 조의 말들을 주고받으며 나란히 누웠다. 식후의 나른함 때문에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얼마 전 만난 헤일라가 건강을 위해서라도 식후 산책을 하라 잔소리했던 게 기억났다.

“왜 웃어?”

베르디안은 이유 없는 레테의 미소가 귀하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레테가 헤일라를 떠올릴 때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꿰뚫고 있었다. 그의 기분이 약간 저조해진 게 눈에 보였다. 베르디안은 특히 헤일라를 경계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레테는 그저, 자신에 대한 독점욕 때문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다른 생각 하지 마.”

아이 같았다. 자신만 바라보라고 몽니를 부리는 아이. 레테는 이럴 때마다 저도 모르게 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 안 할게.”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다가 레테를 꽉 끌어안았다.

“좋아. 정말로…….”

밥 먹듯 하는 고백이었다. 레테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향이 폐부에 들어찼다. 가장 절망적이었던 순간 자신을 가로챈 남자. 약탈자가 주는 모든 것이 달았다.

어쩔 때는 헤일라와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 여겨질 때도 있었다. 묘한 죄책감이 들었지만 부러 감정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제 헤일라와 자신의 세계가 따로 떨어져 있다는 걸 인정할 만큼 시간이 지났다. 헤일라와 저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고백하건대, 그녀는 베르디안을 사랑했다.

물론 베르디안을 완전히 믿는다는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쓰레기 같은 부모를 처리해 주었고 헤일라도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물론 그 과정에서 그의 친우라는 작자가 헤일라에게 추근덕대는 건 매우 불쾌했다― 도왔다. 병을 치료해 주었고 아껴 줬다. 그럼에도 언젠가 그의 마음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원할 것이라 믿기에, 그와 자신의 연결은 너무나 미약했다. 베르디안은 언제든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럼에도 괴롭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이 순간, 의심할 바 없이 레테라는 인간을 사랑하고 있었다. 베르디안이 보이는 눈빛 하나, 손길 하나가 모두 조심스러웠다. 레테는 삶을 살아가며 퍼부어지는 종류의 열렬한 사랑 따위는 받아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했다. 레테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보다 현재의 선명한 행복을 움켜쥐기로 했다.

레테는 베르디안이 모르게 잔잔히 웃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한없이 꼼지락대다가 서서히 눈이 감기는 걸 느끼고 눈을 감았다. 그녀는 남자가 썩 부드러운 제 머리칼을 쓰다듬는 감각을 미몽 속에서 즐겼다.

그 사이로, 베르디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자, 레테.”

응. 그녀는 잠결에 대답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이런 평온이 어째서 자신에게 깃들 수 있었는지에 관해 흘리듯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잠이 주는 평안 속으로 빠져들었다.

레테는 영영 알지 못했다. 베르디안이 왜 자신을 알고 있는지, 그가 어째서 자신에게 푹 빠져들어 있는지. 왜 자신의 부모를 베르디안이 대신 죽여 주었는지.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썩 행복했다.

행복할 것이다.

<검이 뽑힌 자리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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