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그때만큼은 정말로 헤일라에 대한 원망도, 죄 없는 동생을 원망하는 나에 대한 환멸도 접어 두고 행복에 젖어 들 수 있었다. 막연하게 모든 게 잘될 것이라 믿었던 어린 날의 나로 잠시 동안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날에도 꿈을 꾸었다. 하얗고 커다란 방. 온갖 아름다운 보석들이 즐비한, 아마도 신전일 그 공간에서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꿈.
[내가 먼저라고? 날 가장 사랑해?]
너의 배신에 관하여 의미 없는 추궁을 쏟아 내고,
[넌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지. 진심 따위는 알 길이 없을 거라고. 허울뿐인 말로 안심시키면 그만이라고 여겼을 거야.]
나를 기만한 너를 파헤치며,
[그런데 사실 나도 그랬어. 그러기를 바랐어. 알기를 바란 적 없어…….]
자조와 회환을 섞어 울부짖는.
[가. 어디로든. 놔 줄게.]
그리하여 버려진 다음 너를 버리게 되는 그런 꿈.
반드시 꿈이길 바랐으나 현실이 될 신의 농간이자 예언을, 나는 그 안온한 날에 보고야 말았다.
아니어야만 했다. 아닐 것이라 여겼다. 헤일라가 나를 버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저 때문에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아는 아이였다.
심지어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남겨질 너를, 너만을 염려했는데. 그래서는 안 되었다. 헛웃음을 뿌리며 신의 농간이라 여겼다. 그렇게 넘겨야만 숨을 쉴 수 있었다. 꿈속의 현실은 너무나 잔인했기 때문에.
하지만 아니라고 되뇌면서도 나는 결국 예언에 관하여 털어놓지 못했다. 그것은 비극의 단초였으며 운명의 시작점이었다.
그리고 신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맞물렸다. 헤일라는 리안 휴리트를 만났고, 거두어 살렸으며, 사랑에 빠지고야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본 미래의 조각이 진실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버림받는다. 혼자 남게 되어 헤일라의 미래에는 내가 사라진다. 내가 저에게 준 것은 모두 잊고. 나를 저버리고.
그 애는 감히, 나를…… 잊으리라.
그럼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이는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나는 영영 잊혀져 처음부터 없는 사람으로 흩어질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였던가. 나는 이 사실이 참을 수 없어졌다. 그래서 어느 날 아주 충동적으로 결정했다.
운명을 바꾸겠다고.
* * *
병에 걸린 괴팍한 계집을 경계하는 이는 없었다. 신문을 나르는 천것도 나를 괄시하였으니 말 다했지. 다행히 이런 점이 리안 휴리트의 경계를 허물었다. 오만한 남자는 고고한 눈으로 나를 품평하고 재단했다.
그저 내 목숨 줄이나 연명하며 호위호식 할 수 있다면 동생이어도 팔아넘기는 쓰레기. 그는 나를 그 정도로 생각했다.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는 꿈에도 몰랐겠지.
“헤일라…….”
나는 혼자 있을 때 항상 헤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내 마지막 혈육. 나의 동생. 가족. 유일하게 애정을 품은 인간.
삶을 지탱하는 단 하나의 심지.
그만큼 나는 점점 헤일라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그 애를 학대한 이유는 내가 반강제로 행한 희생 따위와는 일절 관계가 없었다. 나 이외의 것을 사랑하고 나 이외의 것을 의지하고, 종래에는 나 이외의 것을 선택할 너에 대한 분노였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너만은.
그래서 그에게 접근했고, 멍청한 리안 휴리트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 들였다. 헤일라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아 그녀가 지치게 만들고, 그는 이후 나에게 치료와 돈을 넘겨주는 것으로.
동시에 나를 멸시하는 신문 배달부를 통해 타센 휴리트에게도 연통을 보냈다. 그를 이용하면 리안 휴리트를 헤일라와 떼어 놓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헤일라는 다시 나만 보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내가 보았던 미래의 그 상황 따위는 오지 않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균열은 생기겠지만, 끄떡없다. 헤일라와 나는 평생 갖은 폭력 속에서 서로를 지켜 왔다. 그러니 내가 할퀸 상처 정도는 너도 참고, 다시 나를 안아 주러 오리라 여겼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운명이란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나는 맹세코, 리안 휴리트가 타센 휴리트를 죽일 줄은 몰랐으며, 헤일라가 그리도 일찍 나를 버릴 줄은 몰랐다.
헤일라가 타센을 따라 신전으로 향한 그날. 기절하듯 잠들어 버린 오수에서 나는 동생이 다시 리듀카로 돌아가는 걸 목도했다. 헤일라는 시신만이 남아 있던 그곳에서 리안을 위해 시신을 구덩이에 처박아 버렸다.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우리는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운명의 재단사가 아니라 운명의 파수꾼이었던 것이다.
* * *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지? 어떤 선택을 했어야 네가 나를 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너밖에 없는데. 너밖에!
아니, 처음부터 이 세상천지에는 너와 나밖에 없었잖아. 너도 그랬잖아. 떠나지 않기로 했잖아.
닳아 가는 몸보다 커져 가는 증오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헤일라는 리안 휴리트와 떨어져 삼 년 내내 다른 사람이 된 양 내게 차가웠다.
얼마나 고매한 사랑인지. 치가 떨림과 동시에 내장이 타들어 가는 듯 불쾌했다. 그러나 나는 헤일라가 그를 다시 재회할 것을 알았다.
원치 않는 예언이 나의 밤을 앗아 갔다. 그리고 결국 헤일라와 리안 휴리트는 다시 만났다. 나는 정해진 수순처럼 신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헤일라의 삶에서 완벽히 도려내졌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틀에 박힌 듯 빤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화려한 방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내내 생각했다.
헤일라를 죽이고 싶다. 그 애를 죽이고 나도 죽고 싶다. 죽이고 싶다. 엉망으로 만들어서 헤일라가 모든 일을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다. 울부짖으며 사죄하고 나의 고통만큼 병들었으면 했다.
하지만 실상 시들어 가는 건 내 쪽이었다. 나를 만나는 걸 유희로 아는 베르디안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죽은 생선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 나는 건성으로 네가 뒈져 버리면 생기가 조금쯤은 붙지 않겠냐 말하곤 했다. 그는 그런 말도 좋아하면서 내게 치댔다.
“넌 특별해.”
그는 늘 이렇게 말하며 내 머리칼을 꼬았다. 마치 소중한 어떤 존재를 보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내가 많은 걸 알지 못하는 인간이었다면 착각에 빠지기 딱 좋았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다행으로 알지 않았다.
차라리 시간을 돌려 내가 조금 더 멍청했을 때 그를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지레짐작하고 마음을 내어 줬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버림받더라도 순간순간은 행복에 겨워 살았을지도. 나는 이제 무지하여 얻은 행복도 행복임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많이 깨우쳐 버렸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인간이다. 매 순간을 함께하고, 모든 걸 바쳐 살려 낸 혈육도 결국에는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선택했으니 다른 이라면 더욱 기대할 구석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저 재미있는 장난감을 얻은 것이라 여길 뿐. 그의 눈에 스치는 염려나 초조 또한 물건을 아끼는 마음과 다르지 않겠지. 매음굴에서 나를 사고판 사내새끼들과는 다르게 나를 안았지만 그뿐이다. 더 이상 속고 싶지 않았다.
음울했다. 나를 잡아 둘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냥 죽고 싶었다. 원망하고 증오하는 데도 기력이 필요한데, 나는 이제 그럴 힘도 없었다. 매분 매초 죽음이 유혹적으로 손을 휘젓는 듯했다.
신전의 치료와 베르디안이 구해 오는 귀한 약들로 몸은 호전되고 있었으나 그뿐. 나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초점 없는 흐린 눈을 누군가 뽑아 가 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느끼기 싫어.
죽음에 대한 갈망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때, 베르디안이 내 어깨를 꽉 쥐었다. 마주친 눈동자의 동공이 확장되어 있었다.
“뭐라도 해 봐.”
“……뭘.”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그가 눈을 반달로 휘며 물었다. 아니, 그것은 물음이 아니라 하나의 확신.
나는 베르디안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의 말로는 그가 상상하던 것과는 다른 형태일 것이다.
나는 몹시 지쳐 있었고, 무엇보다.
안식이 고팠다.
* * *
대신관 임명식.
나는 오늘 죽는다. 내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나는 베르디안에게 네이오라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순진한 구석이 있는 남자는 내가 드물게 보이는 열의에 흥분하여 동쪽으로 향했다. 아마도 내가 뒤따라 보낸 심복이 그에게 말을 전하겠지.
베르디안은 네이오라를 헤일라에게 전해 주게 될 것이다. 그때가 오면 그가 무슨 표정일까? 조금 궁금했지만 그것은 삼킬 수 있을 정도의 궁금증이었다.
나는 심복을 보내 두고 약속대로 황제를 알현했다. 그녀는 황실을 상징하는 치렁치렁한 의복을 입은 채로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나는 그 꼴을 흘긋 보고 필요한 말만 골랐다.
“당신은 임명식 직전까지 리안 휴리트를 붙들어 놔. 그리고 임명식이 모두 끝난 뒤에 헤일라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 하면 돼.”
황제는 다짜고짜 내가 하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리기 전에 나는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리안 휴리트가 대신관 임명식 전에 리듀카에 갔다.’는 걸 헤일라가 알아야 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황제는 불쾌해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매끄럽게 웃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거야. 손해 보는 일 같으면 나중에 가서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죽고 나면 황제는 제 발로 헤일라를 찾아가 리안을 살인자로 몰 것이다. 그래야 헤일라를 리안에게서 떨어트릴 수 있을 테니까.
제 조카 같은 쓰레기 옆에 헤일라가 있어 주면 감지덕지할 것이지. 황제는 조카의 주제를 모르는 한심한 치였다. 어쨌든 나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그녀와 나의 목적은 일치했다.
차곡차곡 계획이 쌓여 갔다. 마지막으로는, 오늘의 대신관 임명식은 신전에 방문한 귀족 모두에게 공개하겠다고 미리 일러두었다. 그래야 나의 죽음을 헤일라가 목도할 수 있을 테니까.
종에게 명령해 리듀카로 향할 채비를 마쳤다.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리듀카로 향하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향하는 길에 보이는 꽃과 나무를 봤다. 살아 있는 순간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 것들이라 여기며 꼼꼼히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리듀카의 문이 열렸다. 나는 시종을 물리고 스스로 의자의 바퀴를 굴려 커다란 빛기둥 앞으로 다가갔다.
끝을 모르고 솟아오른 빛기둥의 중심에, 잘 벼려진 검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