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02. 뽑히지 않는 검
세상에는 차라리 나지 않는 게 나은 생명도 있다.
남에게 기생하여 골수까지 빨아먹고 사는 인간들. 비겁하고 간교한 혀를 놀려 타인을 지옥으로 내모는 쓰레기들. 자신 이외의 인간들이 겪는 고통 따위에는 눈 하나 깜짝 않는 냉혈한들.
그리고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인간들은, 멀쩡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을 뻔했다’고 사고하게끔 만들어 버린다. 참으로 개탄할 만한 일이다. 신이라는 작자는 왜 버러지 같은 것들을 세상에 싸질러 놨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고백하자면, 나 또한 신의 나태함에 수혜를 받는 입장이었다. 나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은 인간임과 동시에, 멀쩡한 다른 인생이 태어난 바를 후회하게끔 만드는 부류였다.
최악의 수렁에 빠진 구질구질한 인생. 구명줄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수렁. 그리고 타인까지 그 수렁으로 끌어들이는 오물 덩어리.
그것이 나였다.
그렇다면 나는 왜, 언제부터 이런 모양으로 나뒹굴게 되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게 앞이 보이지 않는 듯 까마득했다. 그것은 가난하고 잔악한 부모의 배 속에 육신이 배태되었을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또한 반반한 외모를 갖고 태어난 순간 조금쯤은 더 확실시 되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인간이라 명명하기에 부적절한 아름다움을 달고 태어난 동생이 세상에 나왔을 때 명확해졌을지도.
아니, 아니지. 무엇보다 최고의 순간은 부모들이 동생을 살리기 위해 나를 사창가에 팔아넘겼을 때일 것이다. 그도 아니면 거기서 몸을 굴리다가 온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병을 얻었다 선고 받았을 때던가…….
멍청한 소리.
내면의 누군가가 일갈했다. 어느 때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환청이리라. 그러나 이 환청은 마냥 무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진실만을 말한다.
그런 귀여운 이유들 때문이 아니잖아.
귀에 윙윙대며 거슬리는 사실들을 나열한다.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내 삶의 기반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때를 스스로 되짚었다.
비쩍 골아 빠진 손으로 무딘 칼을 쥐어 아비와 어미를 도륙한 직후. 나의 마지막 남은 혈육이 내 패륜을 목도하고 뒷걸음질을 쳤을 때.
그래. 그 투명한 황금빛 눈동자에 담은 게 괴물이라는 듯 덜덜 떨고 있는 걸 봐 버렸을 때,
나의 지옥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 * *
침대에 누워 밖을 바라보는 일상은 무료하다. 매일 비슷한 종류의 꽃이 피어 있고 비슷한 새들이 날아다니며 비슷한 바람이 분다. 이전에는 진저리 날 정도로 무료한 삶을 동경했던 것 같은데. 다리를 쓰지 못해서인지 끔찍하기만 했다.
“언니! 이것 봐. 오늘은 사과가 되게 좋다?”
명랑한 바보를 흉내 내는 동생도 어제와 같았다. 나는 혈색이 비치는 그 애의 붉은 뺨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꼭 네 뺨에 사과 두 개를 달아 놓은 듯해.
이전 같았으면 웃음이라도 달고 그리 말해 주었을 텐데. 나는 입을 단단히 닫고 속으로 웃었다. 이런 꼴이 되어서도 동생의 발그레한 혈색을 사랑스럽다 느끼는 내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동생을 살리기 위해 사창가에 팔려 가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놓고 아직도 애틋한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게 영 현실감이 없지 않은가. 이제는 다리도 못 쓰는 주제에.
만약 내가 지켜보는 이였다면 사람 좋은 척 연기를 하는 것이라 비웃었으리라.
“사과는 됐어. 입맛 없으니까 나가 봐.”
고저 없는 목소리를 내는 건 이제 쉬웠다. 헤일라는 풀이 죽었으면서도 미소 지으며 내 손을 두어 번 쓸었다. ‘이전에’ 내가 동생에게 자주 해 주었듯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이 순진한 계집애는 다정을 숨 쉬듯 쏟아부었다. 그런 점이 사람 미치게 하는 걸 여태 모른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속이 울렁거려 언제나처럼 손을 빼냈다. 헤일라가 방을 나갔고 몇 분 정도 부엌에서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었다. 아니, 바람이 조금 따뜻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스르르 잠이 든 그날.
나는 아주 오랜만에 어떤 꿈을 꾸었다.
꿈속은 아주 요상했다. 세상 모든 빛을 다 모아 둔 것처럼 찬란했다가 모든 게 점멸한 하늘처럼 새까맸다. 또, 온갖 향기로운 꽃향기를 모아 둔 듯 아득했다가 쉬어 버린 음식을 늘어놓은 듯 끔찍한 냄새가 나기도 했다.
꿈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냥 꿈일 뿐이었다. 나는 깨고 싶어 발버둥을 쳤는데, 그것은 아주 무의미한 일이었다. 내 몸은 그저 길고 강한 흐름에 따라 부유할 뿐이었다.
다만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기는 했다. 별처럼 수놓아진 셀 수 없는 빛들에 손을 뻗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나는 짧은 찰나 어떤 순간들을 목도하게 되었다.
금실이 수놓아진 제복을 입은 남자가 검조차 쥐지 않은 민간인을 찔러 죽이는 장면이라든가, 개처럼 목줄을 찬 이들이 발가벗겨져 무대 같은 장소에 선 모습이라든가.
온갖 추악한 몰골은 다 볼 수 있었다. 나는 금세 흥미가 떨어져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아주 밝고 따뜻한 빛이 있었다.
[헤일라.]
그것은 헤일라였다. 누군가 알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손에 쥐어지는 감촉은 어미의 뱃속에서 갓 나온 헤일라의 뺨을 쓰다듬었을 때처럼 따뜻했고, 눈에 와 닿는 빛은 언제나 곱게 묶어 내리는 머리칼처럼 찬란했다.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빛은 곧 나를 집어 삼켰고, 나는 그 안에서 정말로 헤일라를 봤다. 동생은 내 방 너머에 있을 주방에서 무딘 칼로 사과를 얇게 자르려 낑낑대고 있었다. 볼에 하얀 가루를 잔뜩 묻힌 채였다. 옆에는 접시에 담긴 밀가루 반죽이 놓여 있었다. 설탕과 버터가 나와 있는 걸 보면 사과가 들어간 빵을 만들려는 게 틀림없었다.
[아!]
꿈에서도 헤일라를 보고 있다는 게 우스워 미소 지은 순간, 헤일라가 칼에 손을 베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역시나 닿지 않았다. 나무 바닥에 피가 두어 방울 떨어졌다. 검붉은 피가 스미는 척척한 나무 바닥을 응시하는데, 갑자기 공간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공간이 완전히 소멸된 순간 반짝, 눈을 떴다. 하늘의 나침반은 이미 밤을 가리키고 있었고 주위는 어둑했다. 건조한 공기가 내 주변을 부유하고 있었다. 나는 반쯤 일어나 유독 밝게 빛나는 별들을 보다가 목이 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물이 놓여 있는 침대 옆 협탁에는, 사과 파이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 * *
“언니 혹시…… 어디가 또 아픈 거야?”
부쩍 말이 줄어든 내가 걱정되었는지, 헤일라는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알려고 들었다. 나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가 침대에 올라와 있는 헤일라의 오른손을 보았다.
오른손 검지에 말려 있는 작은 천 조각. 헤일라는 사과를 자르다 이리 됐다며 상처를 숨기려 들었다. 꿈속에서 봤던 장면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이걸 깨달은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나는 며칠 동안 공을 들여 꿈속에서 보고 들은 사건들이 정말로 실현되는지 지켜봤다. 황궁의 정세, 세간의 스캔들, 큰 자연 재해들이 정말로 일어나는지 일간지를 통해 꾸준히 확인했다.
하나씩 맞아 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때때로 완전한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기사들을 보면 헛웃음이 새기도 했다.
나는 모든 걸 다 아는 신처럼 그들을 관조했다. 내가 꾸는 꿈은 신이 내린 ‘예언의 힘’인 것이 점점 분명해졌다. 예언의 힘이 있는 인간은 신전에서 신관으로 살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영화를 누리며 살게 되는 자리라 들었다. 급한 치료도 받을 수 있으리라.
“진짜 다리 아픈 거 아니지? 응? 응?”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점점 길어져 갔다. 말간 얼굴로 내 손을 쥐고 흔드는 헤일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뭐가 그리 걱정이 되는지 아랫입술을 꼭 문 채로 내게 애원했다.
“약은 내가 어떻게든 구하니까…… 절대 숨기면 안 돼. 절대.”
새끼손가락을 내밀면서 콧김을 내쉬는 모습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전으로 들어가면 헤일라와 떨어져 지내야 할 게 뻔했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만약 이 빌어먹을 병이 내 몸을 점령한다면, 마침내 생을 끝장냈을 때 내 옆에 이 애는 없을 것이다. 나는 하얀 옷을 입은 무례한 자들에게 내 죽음을 전해 들을 헤일라를 상상했다.
이 멍청한 계집애는, 무지하고 어리숙하고 순진하기까지 한 내 동생은, 넘치는 재물을 받는대도 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게 뻔했다. 혼자 끌어안고 영영 슬퍼할 것이었다. 무언가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헤일라의 손가락에 대충 내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 하겠다고 중얼댔다. 그 애는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는지 내 손을 잡고 제 이마를 손에 갖다 댔다. 손등에 난 자잘한 상처가 눈에 띄었다. 매일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가 부르튼 예쁜 손.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자.”
나는 왜인지 마음이 좋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그러니까 내가 팔려 가기 전 헤일라와 종종 함께 잠들기 위해 했던 말이었으니까. 그러면 헤일라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후다닥 침대 위로 올라오곤 했다.
“……정말?”
지금은 약간의 물기 어린 눈으로 되묻기까지 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래, 라고 대답했다. 삐그덕대는 오래된 나무 침대 위로 헤일라가 기어 올라왔다. 그 애는 조심스레 내 옆에 몸을 말고 나를 보았다.
어릴 적, 낡고 헤져 여러 번 기운 얇은 솜이불 아래에서 손을 마주 잡고 잠에 들던 때가 생각났다. 어른이 되면 이 지옥 같은 집을 나가 행복하게 살자 굳게 약속했던 때. 아직은 내 삶에 희망이라는 게 있다고 믿었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언니는 아무 걱정 마.”
애써 어른인 척하며 나를 안심 시키는 헤일라도 여전하고
“내가 계속 같이 있을 테니까. 내 삶은 언니한테 준 거니까…….”
헤일라를 믿는 나도 여전했던 그 밤. 그날, 나는 나의 능력에 대해 헤일라에게 털어 놓기로 마음먹었다. 눈을 뜨면 우리 둘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함께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해 같이 고민해 보자고 말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