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94화 (외전) (94/97)

외전 1화.

01. 휴리트

화사한 봄의 꽃들로 둘러싸인 휴리트 저택의 정원. 그곳을 가로질러 마차들이 쉼 없이 들어섰다. 섬세하게 조각된 마차의 문양들은 작은 문 너머에 있는 이들이 어떤 권세가들인지 한눈에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개중에는 온몸을 흰 천으로 감싼 신관도 더러 있었다. 황궁에서 작위 수여식을 거행했을 때에도 얼굴을 비추지 못해 안달한 이들이 일곱 날도 다 되지 않은 오늘 그대로 등장한 셈이었다.

“어쩜, 올 때마다 정원 분위기가 바뀌어요. 공작께서 세심히 관심을 기울이신다더니.”

“꼼꼼하신 분이니까요.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두지 않으시고…….”

연회 홀에서는 공작새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인사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휴리트 가문의 정원의 아름다움에 관해, 또 고풍스러운 건물의 외관의 가치에 관해, 이 연회의 완벽함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새로이 가주가 된 공작을 추어올렸다.

“그분이 가문을 잇게 되어 정말 다행이에요.”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마치 공작은 작은 흠결도 없는 사람 같았다. 실제로 제국의 백성들과 공작의 영지민들은 공작을 추앙해 마지않았다. 공작은 아랫것들에게 퍽 좋은 윗사람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이 공작을 깎아내리지 않는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공작은 섬세한 만큼 집요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제국에 자신의 적을 두지 않았다. 날을 세우는 이들 대부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거나 노골적으로 공작의 편에 섰다. 상대를 포섭하거나 압제하는 모습은 전대 공작인 리안 휴리트를 닮았다고 정평이 자자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공작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가진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꿀을 바른 듯 흘러내리는 금발과 황금빛의 눈동자는 사람들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귀족들은 흠 없는 차기 공작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달을 냈다.

“아, 그런데 그분은…… 남부로 내려가시나요?”

감미로운 악기 소리와 두런두런 담소 나누는 소리가 어우러지던 홀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공작의 연회에서 튀어나오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인사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탓이었다.

후계의 자격이 있었으나 결국은 공작의 자리에 앉지 못한 비운의 ‘휴리트’.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궁금해하던 터라 시선이 집중되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백작 부인 하나가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당연한 말씀을. 오늘 낮에 떠났다 들었습니다.”

“어머, 정말요? 어떻게 아셨어요?”

옆에 있던 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백작 부인이 공작과 친분이 있다고는 하나 깊은 이야기까지 할 정도가 못 된다는 건 분명했다. 공작은 제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성정이 아니었다. 상대의 의문을 읽은 백작 부인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물론, 각하께 직접 들은 이야기지요.”

백작 부인은 당연한 걸 묻지 말라는 듯 귀찮은 투였다. 표정에는 공작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미소도 함께 그어져 있었다. 그러나 자리에 있던 몇몇은 공작이 그의 거취를 일부러 흘렸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귀족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일순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공작 각하 드십니다.”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주인공이 등장했다. 모두의 시선이 서서히 열리는 문에 닿았다.

문 틈 새로, 적색 드레스를 늘어트린 세리아 휴리트가 비쳤다. 세리아가 공작 임명식을 마친 후 처음으로 연 연회가 성대한 밤을 장식하고 있었다.

* * *

스륵. 공작의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세리아는 연회장으로 나갔을 때의 모습 그대로 흐트러지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발걸음 소리만큼 움직임의 소리도 거의 없는 여자는 소파로 다가가 사뿐히 앉았다.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노데이나가 세리아의 옆에 서서 말했다. 얇다란 고개가 천천히 끄덕이자 노데이나가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 몇에게 목욕 준비를 명했다.

“많이 곤하시지요? 자기 전에는 재스민 차를 올릴까요?”

노련한 하녀는 다정하게 웃으며 세리아의 머리 장식을 하나씩 내리기 시작했다. 무거웠던 머리가 가벼워지자 세리아 또한 조금씩 긴장이 풀리는 듯 보였다.

“차는 됐어. 그보다.”

세리아가 뒤에 있던 노데이나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자신의 하녀를 제 옆에 앉혔다. 푹신한 소파가 노데이나의 엉덩이를 감쌌다.

“노데이나도 좀 쉬어.”

부드러운 목소리. 나이가 어느 정도 차고부터는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걱정이 묻은 퉁명스러움. 그 속의 염려와 애정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세리아는 예외적으로 노데이나에게 다정했다.

“오늘 나보다 더 고생했어.”

그건 다른 귀족들에게 내보이는 전략적인 선의나 친절과는 결이 달랐다. 어릴 적부터 유일하게 사랑을 베푼 양육자에 대한 존중이었으며 강한 유대의 증명이었다.

노데이나는 매끄럽게 떨어지는 금발을 세리아의 귀 뒤로 넘겨 주며 살풋 웃었다. 세월을 접어 둔 듯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의젓하셔라.”

듣고 있던 세리아가 피식대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의젓하다니. 휴리트 공작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노데이나밖에 없을 터였다.

“나도 알아. 이제 다 컸지.”

그녀는 농을 받아 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릴 때랑은 달라.”

세리아를 양육해 온 하녀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능히 읽어 내고 매끄러운 손등에 손을 얹었다.

“그럼요.”

이것은 하나의 어리광이었다. 세리아는 부유하였으나 황량했던 어린 시절을 잘 이겨 냈다는 확신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게는 영영 어린아이세요.”

세리아가 피식 웃으며 소파 등받이에 팔을 괴었다. 하녀의 대답이 영 싫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녀는 사냥을 끝낸 사자처럼 나른하게 다리를 펴고 숨을 늘이다가 지금쯤 남부에 다다랐을 이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봤을 적에 내보이던, 아버지를 닮은 여유로운 한숨. 문득 떠올라 기분이 나빠져 그의 안부를 물었다.

“잘 갔어?”

노데이나는 그녀가 누구에 관해 이야기하는지 눈치챘다.

“명하신 대로 했어요. 타지에 가셔도 불편함에 없이 지내실 수 있도록요.”

“걔야 사막에 내다 놔도 잘 먹고 살 위인이지.”

카델만 있으면. 세리아는 얇게 이죽댔다.

“카델은, 아니, 카델 님은…….”

“알아. 끝까지 안 간다 어깃장을 놓은 거.”

약간 질린다는 투였다. 실제로 세리아는 카델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다리온이 카델을 끌고 가는 모양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녀는 카델과 유년을 함께한 사람이기 이전에 천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 짓는 귀족이었다. 그리고 카델은 어머니가 주워 온 천한 것이었다. 다리온은 고귀한 ‘휴리트’라는 성을 물려받았으니 카델은 다리온의 사랑에 감읍해함이 옳았다.

게다가 어머니가 좀 어여뻐했나?

세리아는 때때로 어머니가 카델을 자신보다 아낀다고 여겼다. 지금이야 어머니가 모두에게 공평히 무관심하다는 걸 알지만, 어릴 때는 그게 고까워 보일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카델은 휴리트들에게 주제넘은 사랑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토록 애를 먹였다.

패악을 부리고, 기어이 도망을 쳐 다리가 부러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반항을 멈추지 않았다. 성년이 된 다리온이 샅을 핥아 올릴 때도 자신이 덫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소리를 질러댔었다.

그러나 저택의 그 누구도 카델을 돕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제 풀에 지쳐 기절한 채로 다리온을 받아 내야 했다.

세리아는 그랬던 카델이 언제 조용해졌는지 반추했다. 아마도 다리온이 카델과 혼인하기 위해 그녀를 남부의 귀족가로 입적시킨다고 했을 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다리온은 공작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세리아의 도움을 받았다. 한창 후계 경쟁 중이었기 때문에 당장 카델과 혼인을 하려면 공작위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다리온은 카델에게 맹목적이었다. 단 몇 년도 그녀와의 혼인을 미룰 마음이 없었다.

카델은 여기서 꽤 충격을 받았는지 고분고분해졌다.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이때 즈음에서야 인정한 듯 보였다.

‘헤일라 님이 계셨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세리아는 카델의 분 섞인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애는 세리아를 마지막으로 마주한 순간에 이렇게 말했다. 헤일라가 요양 가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녀의 눈빛에는 헤일라를 향한 열렬한 맹신과 세리아를 향한 비난이 혼재해 있었다.

언젠가 카델은 알게 될까? 헤일라는 세리아에게 달에 한 번씩 연통을 받고 있다는 걸. 세리아는 단 한 번도 카델의 이야기를 편지에 빠트린 적이 없다는 걸, 깨달을 날이 올까? 영영 남부의 성에 갇혀 살 테니 평생 모른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중요한 건 아버지와 ‘그 사람’밖에 없었다. 다른 것들은 모두 관심 밖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아직도 이를 깨우치지 못한 카델이야말로 이 집구석에서 가장 죄질이 나빴다. 귀족가에서 무지란 곧 죄였으니, 카델은 그 대가를 몸소 감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아니지.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떠났으니 최악은 아니려나.

“멍청하지. 끝끝내 어머니가 제 가족이라 여기다니. 이렇게 순진할 데가.”

세리아가 카델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그러나 그것은 감히 귀족의 것을 넘보는 미천한 하녀를 조롱하는 조가 아니었다. 노데이나는 세리아의 어깨를 짚었다.

“어머니는 누구도 가족으로 생각지 않으시는데…….”

세리아의 머릿속에 어린 날의 잔상이 스쳤다.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던 아주 짧았던 한때의 어떤 순간이었다.

‘유감이구나.’

어린 태를 벗지 못한 소녀는 헤일라에게 손을 뻗으며 가족이 여럿 생겨 좋다고 투정을 부렸더랬다.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길 때였었나. 하지만 헤일라는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라는 얼굴로 읊조릴 뿐이었다.

‘나한테는 가족이 없거든.’

가족이 없다.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가족이 없다니? 그렇다면 나는? 아버지는? 다리온은? 어린 세리아의 머릿속이 엉망으로 엉켰다.

‘정확히는 하나뿐이지.’

‘아버지요? 아니면 다리온이요?’

전자이건 후자이건 세리아에게는 큰 고통일 터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헤일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군데요? 네? 누구예요?’

평소 점잖게 굴던 세리아는 그날 집요하게 늘어졌다. 처음 듣는 어머니의 진심이었다. 소녀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어머니를 저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말로 궁금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이제 없어.’

아마 세리아는 영영 그 표정을 잊지 못할 터였다.

세리아는 그날 이후 다시는 가족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것은 상처를 받아서도 아니었고, 화가 나서도 아니었다. 단지, 다시는…… 어머니의 그런 표정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 하나에서였다.

어머니가 다른 이를 그런 식으로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알고 싶지 않았다. 아주 나약하고, 간절하게…….

나중에, 아주 많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헤일라의 마지막 가족이 누구였는지 어렴풋이 윤곽이 잡혔지만 더는 파고들지 않았다. 그때 즈음의 세리아는 자신의 삶을 구축하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었으며, 그녀에게 가족은 노데이나 하나라는 데 더없이 만족했다.

그러니까 지금 불쌍한 건 카델 하나였다. 어머니의 가족 따위는 결코 될 수 없다는 걸 알지 못하고 죽을 카델. 아니, 이제는 카델 휴리트라고 불러야지.

세리아는 혼자 쿡쿡대다가 옆을 바라봤다. 노데이나가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오늘같이 좋은 날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 잡념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신 때문이리라.

그녀는 표정을 펴고 화제를 전환했다.

“나, 다리 부은 것 같아.”

“목욕물을 준비할게요. 찜질도 하시겠어요?”

“응.”

노데이나가 하녀를 불렀고, 곧 목욕물이 채워졌다. 세리아는 껍데기를 탈피하듯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노곤해지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재스민 차 마실래.”

자기 전에, 노데이나랑 같이. 눈가를 휘며 웃는 세리아는 아름다웠다. 값어치 없는 인간을 팔아넘기고 최고의 자리를 얻은 날이었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모두 지켜 낸 날이기도 했다. 세리아는 잡생각을 물리고 이 충만함을 즐기기로 했다.

잊어도 좋을 옛 기억 따위는 저 속에 작게 접어 넣어 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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