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헤일라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 다리온까지도 친자식으로 품을 만큼 다정한 여인이었다.
카델이 저택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헤일라가 알려 준 사실이었다. 크면서 조금씩 제 아비를 닮아 가는지, 헤일라와는 이목구비가 많이 달라져 가는 다리온을 보고 카델이 툴툴댄 적이 있었다. 다리온은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이어서 고고한 도련님처럼 보였다.
그런데 헤일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리온에 관한 비밀을 말해 준 것이다.
‘너는 앞으로도 다리온을 가장 옆에서 돌봐 줄 아이니까.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러니 리안이 혹시 의심하면, 네가 잘 말해 주렴. 다리온의 친부와 내 사이가 얼마나 좋았는지, 얼마나 좋아했는지…… 뭐 그런 거.’
카델은 다리온의 친부를 본 일이 없었다. 헤일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건, 다리온을 위해 거짓말을 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카델은 주저 없이 그러겠노라 맹세했다.
소녀는 친아들이 아닌 다리온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헤일라의 마음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다리온을 진짜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까 카델은, 헤일라가 다리온을 거두어 키우는 데 어떤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카델은 아직 어린 소녀였다. 헤일라가 공작을 아무리 미워한다 한들 없는 아들을 만들어 그를 괴롭힐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타론에서는 정조를 잃은 아내를 모질게 대하는 풍속이 남아 있었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다리온을 친아들로 삼아 끝까지 책임을 지기로 한 헤일라에게 감동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리온이 또 한바탕 난리를 부릴 게 걱정이 되긴 한다만.”
헤일라가 부드러운 얼굴로 다리온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곧 카델이 떠나면 다리온이 보일 반응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다.
“하하…….”
카델은 애매하게 웃었다. 이제 소년기에 접어든 소공자가 시중드는 하녀의 부재에 심통을 부리는 건 보기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리온은 카델이 저택에 없으면 상당히 불안해했다. 다른 사용인들에게 패악을 부리는 일도 번번이 일어나곤 했다.
“도련님도 조금만 더 크시면 절 본체만체하실 걸요.”
카델은 곧 다가올 시원섭섭한 미래를 그리며 헤헤 웃었다. 그걸 지켜보던 헤일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베일 안쪽의 얼굴에는 짙은 의문이 그어져 있었다.
“글쎄.”
그러나 카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무엇보다, 옅고 깊은 베일이 헤일라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름 낮의 산책은 그렇게 끝이 났다.
* * *
산책을 마치고 침실로 돌아온 헤일라는 베일을 바닥에 내던지고 침대로 향했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쏘다니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것 같았다. 씻지도 않고 바로 침상에 털썩 앉은 헤일라는 뚱한 얼굴로 제 머리칼을 꼬았다.
의상실을 세 곳이나 둘러볼 필요는 없었나. 헤일라는 오늘 자신이 쓸어 담은 드레스들과 예약해둔 옷가지들의 수를 가늠해 보며 다리를 쭉 폈다. 가는 발목이 침상 아래쪽을 향했다.
그때, 리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헤일라, 나 왔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한 번 까닥였다. 리안은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런 그의 발에, 베일이 감겼다. 헤일라가 던져 둔 천이었다. 리안이 그녀에게 씌운 천이기도 했다. 그는 그것을 못 본 체하고 헤일라의 옆에 털썩 앉았다.
“오늘 나갔다 왔다며?”
“…….”
“재미있었어?”
아내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눈빛은 집요했다. 헤일라는 그의 초조를 음미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헤일라는 리안이 없는 바깥 외출 따위,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녀를 감시하며 보호하기 위한 눈들도 거추장스러웠고 따라붙는 이들은 귀찮았다. 그럼에도…….
이런 순간이 너무 좋아서 멈출 수가 없었다.
“헤일라, 혹시 밖에서 뭐 봤어?”
리안이 다시 물었다. 분위기가 약간 침체 되었다. 그가 자신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마음에 드는 거라도 찾은 거야?”
헤일라는 ‘마음에 드는 것’이라는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리안이 말하는 건 드레스나 보석, 장신구 따위가 아니었다.
남자였다.
리안은 헤일라가 자신 이외의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둘까 매일 매 순간 전전긍긍했다. 헤일라의 외출을 끔찍이 싫어하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응.”
헤일라는 보란 듯이 그렇다고 대답하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있었다고 하면 어쩔 거야?”
“……헤일라.”
리안이 애원하듯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부인이 장난을 치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방식으로.
“앞으로는 베일을 쓰고도 밖으로 나돌지 못하게 할 거야? 아니면, 나를 여기 묶어 두고 개처럼 다루려나?”
리안의 표정이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헤일라가 그어 준 금을 지나치기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받고 있었다.
“그도 아니면…… 남은 한쪽 눈알도 파 버릴 거니?”
그녀가 장난스럽게 오른쪽 눈꺼풀 쪽으로 제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이었다. 리안이 거칠게 헤일라의 팔을 잡아챘다.
“이런 장난치지 마.”
긴 머리칼이 실타래처럼 침대 위에 늘어졌다. 리안이 그녀를 뒤로 눕힌 탓이었다. 그가 떨리는 손끝으로 헤일라의 뺨을 쓸었다. 나비가 꽃에 날아 앉듯 가볍고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내가 너한테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못 하는 거…… 네가 가장 잘 알면서…….”
눈썹을 찌푸리고 괴로운 듯 이를 악문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억울한 듯도, 슬픈 듯도 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리안의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덤덤하게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
“버린 지 좀 됐잖아. 내다 버린 감정 따위 알 게 뭐니?”
헤일라가 짓궂게 웃었다. 그 모습은, 헤일라가 리안에 관해 아무것도 모를 적 보여 주었던 깨끗한 미소와 아주 비슷했다. 순수하게 유희를 즐기는 투명한 눈이었다.
“네가 주워 간 건 네가 알아서 해. 난 그냥 재미나 보면 그만 아니겠어?”
얇은 손가락이 리안의 옷깃을 쥐고 끌어당겼다. 입술이 열렸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혀를 얽었다. 타액이 뒤엉키며 질척이는 소리를 내었다.
먼저 멈춘 쪽은 이번에도 헤일라였다. 리안은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얼굴 닦아 줘.”
헤일라가 편안한 자세를 찾아 앉고 리안에게 명령했다. 그는 종을 울려 젖은 수건을 갖고 오게 한 뒤, 손수 헤일라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녀는 매일 일부러 리안에게 자신의 얼굴을 닦게 했다. 특히 자신의 푹 파인 왼눈을 꼼꼼히 닦을 것을 주문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입술을 꼭 물면서도 정성스레 흉 위를 닦아 냈다. 지금처럼.
“기분 좋다.”
그녀는 고약한 심보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리안은 쉬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목을 닦아 주었다. 잔뜩 몸을 굳히고 있던 리안은 젖은 천을 내려 두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세리아랑은…… 오늘도 만나지 않았어?”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그는 카델과 헤일라가 낮에 산책을 했다는 보고를 받고 넌지시 묻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리안은 헤일라가 조금이라도 더 세리아에게 관심을 갖길 바랐으니까.
일순 헤일라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제껏 헤일라는 그것이 리안 스스로를 위한 바람일 뿐이라 여겨 왔다. 리안과 헤일라의 아이인 세리아에게 정을 붙이는 게 리안에게도 유리하니까.
그래서 헤일라는 세리아를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거리를 유지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곧잘 대화도 나누고 쓰다듬어 주기도 했으나 그뿐. 그녀는 리안이 안심할 만한 단 하나의 구석도 남겨 놓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리안의 속마음이 자신의 추측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세리아에게 미안하니?”
만약 리안이, 아버지로서 세리아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헤일라와 세리아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기를 바라고 있는 거라면?
리안이 날카로워진 헤일라의 눈빛에 당황한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난…….”
“리안.”
헤일라는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그의 한쪽 뺨에 손을 얹었다.
“내가 준 감정을 다른 것들에게 낭비하지 마.”
“…….”
“그러라고 준 게 아니잖아.”
불쾌했다. 세리아가 자신과 리안의 혈육이라는 사실 따위는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헤일라는 이것이 기형적인 감정임을 알고 있었지만 바로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오직 자신만 봐야 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저가 어떻게 했는데.
언니까지 버려 가며 여기까지 왔다. 인간성마저 도려내 괴물이 되었다. 그러니 그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어야 마땅했다. 헤일라의 가슴 속에서 잠시, 무언가 절절 끓었다.
“응. 알아.”
리안이 헤일라의 눈을 똑바로 보고 대답했다. 그의 눈가는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손끝은 약간 떨리는 채였고, 속눈썹도 파르르 진동했다. 그러나 저건, 초조나 우울 따위에서 파생된 변화가 아니었다. 리안의 입술은 선명한 호를 그리고 있었다. 헤일라는 그의 표정을 확인하곤 속으로 혀를 찼다. 괜한 걱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난 너만 생각하지. 정말이야.”
지금의 리안은 행복에 젖어 있었다. 헤일라가 자신에게 보이는 기형적인 집착에 흥분하고 있었다. 세리아에게 조금이라도 안타까움을 품었다면 저런 얼굴을 할 수 없으리라. 리안이 헤일라를 와락 안았다. 그의 옅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훅 끼쳐 들어오는 그의 향기가 달고 포근했다. 리안의 행복이 자신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아주 깊고, 진하게.
순간, 헤일라는 세리아가 조금은 가엾게 느껴졌다. 아비에게까지 이렇게 쉽게 버려지는 아이가 안타까웠다. 부모 중 누구도 세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아…….”
잠시, 씁쓸함이 입안에 돌았다. 언젠가 언니에게, 자신은 좋은 부모가 될 것이라 호언장담했던 때가 떠오른 탓이다.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자신은 결국 몹쓸 부모가 되었다. 또 언니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었다.
아니, 아닌가. 저 말을 했을 때는 검을 쓰기 전이었으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던가.
헤일라는 아주 쓸모없는 가정을 세워 보았다. 만약 검을 쓰지 않았다면, 그래서 수치와 죄악을 아는 인간으로 남았다면…… 지금보다 아이들을 더 살갑게 돌봤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책임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연기했으리라. 그럼 세리아도 끔벅 속아 더 명랑한 아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분명 자신은 잘 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헤일라는 자신을 꽉 껴안고 있는 리안의 목덜미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천천히 입술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제…….”
후회는 내 몫이 아니지.
리안에게는 들리지 않을 속삭임이었다. 헤일라는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가볍게 웃어 버렸다. 순식간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우선되는 명제를 떠올렸다.
그래.
내가 행복하면 되었다. 애초에 남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헤일라는 그렇게 맺음 지으며 리안을 더 꽉 껴안았다. 여전히 불안하게 뛰는 리안의 심장 소리가 저에게까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이 조금 더 행복해졌음을 깨달았다.
그 행복에 취해, 방금까지 무엇을 고민했는지 금세 잊을 수 있었다.
<검이 뽑힌 자리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