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말했잖아. ……넌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헤일라는 무어라 반박하려고 했다. 리안이 자신을 꼭 안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입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는 게 옳은 표현이리라.
“네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 봐야…… 그렇잖아, 응?”
레테가 헤일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둘의 눈이 마주친다. 헤일라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피할 수 없었다.
“너, 내가 나타났을 때…… 싫었잖아.”
쿵.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조금이라도 날 보고 싶어 했으면, 내가 좋았으면…… 조금이라도 반길 법한데, 너.”
“…….”
“끔찍해하기만 했어. 지금도.”
아.
아아…….
헤일라는 속으로 탄식했다. 자신이 만들어 낸 환영이, 자신이 만든 견고한 거짓을 허물고 있었다.
“넌 날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 아마도 그 순간부터.”
그 순간.
헤일라는 입모양으로 그 단어를 따라했다. 언니가 알려 주지 않아도 언제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때를 넘어, 모든 것을 알게 된 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피가 낭자했던 집, 칼로 낭자된 두 구의 시신들, 그리고 귀신처럼 칼을 들고 서 있던 언니. 그리고 언니의 살인을 눈감았던 자신.
언니의 말이 맞았다. 그때부터였다. 언니가 사창가에서 병을 얻고 돌아와 부모를 죽였을 때, 그리고 자신이 언니의 공범이 되었을 때.
그때부터 나는…….
죄책감에 질식해 가고 있었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손과 발을 묶은 건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을 알게 된 순간 헤일라는 외면해 왔던 자신의 진심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때때로 언니가 미웠다. 자신의 탓이 아닌데 자꾸 화를 내는 언니에게 실망하기도 했다. 언니의 수발을 드는 게 고되었다. 돈을 버는 것도 힘이 들었다.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언니의 심술이 싫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죽어 버리라는, 감정을 말려 죽이라는 언니의 말을 거역하고 싶었다.
……지금도.
왜냐하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건 더 이상 언니가 아니니까.
나는 이제 언니의 뜻대로 살 필요가,
없다.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건 뭐지?
헤일라는 리안에게 안긴 채로 제 손을 쥐었다 폈다. 눈도 깜빡여 보았다.
나는…….
작은 입술이 움직이며 어떤 단어를 만들어 냈다.
난, 나는, 살고, 싶…….
“아, 아아…….”
살고 싶다.
살고 싶어.
헤일라는 처음으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마주했다.
살고 싶었다.
누구보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이 당연한 것을 깨닫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헤일라는 속으로 자신의 염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눈물 사이로 보이는 언니가 얼핏, 웃은 것 같기도 했다.
* * *
아이가 태어났다. 지나가며 듣기로, 이름은 세리아라 했다.
헤일라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다만, 해산하고 몇 달 뒤 정원에 꽃을 심어 달라 부탁했을 뿐이었다.
꽃의 이름은 루아두였다.
* * *
황제가 쓰러졌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언니의 사람이라는 베르디안이 헤일라에게 접근했다. 베르디안에게서 네이오라를 받았다. 헤일라는 언니가 리안을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을 써서 리안을 떠나라는 것이리라.
가슴이 울렁댔다. 헤일라는 언니의 유지를 따를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리안이 필요했다. 아주 징그러운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헤일라를 살게 했다.
* * *
모든 준비가 끝났다.
헤일라는 어리숙한 노데이나라는 하녀에게 계획의 일부를 흘리고, 리안이 그것을 알아채기를 기다렸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왼눈을 포기하기로 일찍이 마음을 먹은 헤일라는 망설이지 않았다. 왼눈이 뽑히면 리안의 저주는 풀리고, 그는 며칠 동안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동안 도망쳐야 했다.
“재밌었어?”
정말로 고통의 순간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고 느꼈을 때에는, 두려웠다. 그러나 헤일라는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지금은 그것이 신체의 일부일 뿐이었다.
“네가 재미있었으면 됐어.”
리안은 나른한 얼굴로 헤일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당황한 연기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몸을 떨었다.
“……왜 마신 거야?”
노데이나가 필히 배신했기를. 그리하여 리안의 분노가 극에 달하기를 바랐다.
“네가 준비한 건데 안 마시면 서운할 거 아냐.”
그리고 헤일라의 염원은 이루어졌다. 노데이나는 배신했고.
“……미친놈.”
자신은 리안의 분노를 이용할 수 있었다.
“역시 너는, 괴물이야.”
리안의 손등이 움찔 움직였다.
“만나지 말걸. 너 같은 건…….”
“헤일라, 그만.”
그가 낮음 음성으로 경고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멈추지 않았다.
여러 말이 오갔다. 그녀는 리안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후회한다는 말. 끔찍한 너를 더 이상은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말. 너 같은 건 죽여 버리고 싶다는 절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옷소매 안의 작은 칼을 꺼내 리안의 목을 찌르려 했다. 남자는 아주 작은 동작으로 칼을 피했다.
그것이 실패하자, 헤일라는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 시도했다. 리안의 이성이 끊어진 건 이 지점이었다. 갑자기 그가 헤일라에게 달려들었다.
“커흑.”
목을 졸랐다. 핏발이 선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헤일라는 검은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확실한 건, 리안이 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불쌍한 리안.
헤일라는 그가 가엾게 여겨져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산소가 부족해 눈앞이 뿌예지는데도 그렇게 느꼈다.
몇 초가 지난 뒤, 목을 죄는 감각이 옅어졌다. 리안의 오른손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그의 엄지가 헤일라의 왼눈을 지그시 누르기 시작했다. 그의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리안의 저주가 풀리는구나.
헤일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자신의 왼눈을 후벼 파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떨리는 손가락의 감각만 눈꺼풀에 느껴질 뿐이었다.
“헉, 흐억…….”
눈을 떠 보니, 리안의 왼손이 오른손을 저지하고 있었다. 거의 비틀어지다시피 한 오른손은 점점 붉어졌다.
“흐, 안 돼, 안 돼, 헤일라…….”
그가 헤일라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가…….”
“아.”
헤일라는 짧게 탄식했다.
“아아…….”
그리고 울었다.
헤일라는 지금 리안이 어떤 상태인지 눈치챘다. 그는 지금 저주를 억누르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고통을 감내하며 헤일라의 왼눈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헤일라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헉, 허억…….”
리안은 점점 호흡이 가빠지는지 심장을 틀어쥐고 바닥에 헝클어졌다. 리안의 몸이 발작적으로 꿈틀댔다.
“안, 돼, 흐으, 헤, 헤일…… 라……. 가, 얼른…….”
헤일라는 천천히 리안에게로 다가갔다. 신의 뜻을 억지로 거스른 벌을 받고 있는지, 리안의 코에서 핏물이 주룩 흘렀다. 헤일라는 그걸 소매로 닦아 주었다. 그 사이 리안의 호흡은 더욱 간헐적으로 변해 갔다. 눈이 서서히 감겼다.
헤일라가 무릎 위에 리안을 뉘이고 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속삭였다.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 줘서, 고마워.”
“…….”
“정말 기뻐.”
헤일라는 옆에 널브러져 있던 자신의 작은 칼을 쥐었다. 살풋 웃은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왼눈을 향해 칼날을 들이밀었다.
푸욱.
잔인한 소리와 함께, 리안의 떨림이 멎었다. 그는 숨이 끊어진 동물처럼 축 늘어졌다.
신의 저주가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 * *
자신의 손으로 왼눈을 도려낸 헤일라는 도구로 쓴 단도를 방에 그대로 두고 나왔다. 차후, 자신의 눈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리안이라는 흔적을 남겨 두기 위함이었다. 헤일라는 그 거짓이 얼마나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스르륵.
리듀카의 앞에 혼자 당도한 헤일라는 문고리를 잡아 밀었다. 문은 아주 매끄럽게 열렸다. 여전히 중앙을 지키고 있는 환한 빛기둥이 눈에 띄었다. 헤일라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나아갔다.
그곳에서 언니의 환영을 만났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
언니는 새하얀 옷을 입고 빛기둥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헤일라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내가 준 약 따위는 쓸 생각 없었던 거지?”
헤일라는 리안에게 최고의 죄악을 선물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왼눈을 희생해야 했고, 신의 검을 써서 얻은 구슬이 있어야 했다.
리안은 그 구슬을 깨고 죄책감을 얻어 인간이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을 그에게 주고, 리안을 자신처럼 불행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리안처럼 사랑하는 괴물이 되리라.
헤일라는 그런 완벽한 행복을 꿈꿨다. 그러니 언니의 유품은 쓸모가 없었다.
“응.”
헤일라는 손바닥이 패이도록 손을 말아 쥐고 천천히 공간을 둘러보았다. 눈을 굴리지 않으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언니, 고마워. 어릴 때 나 지켜 준 거. 원치는 않았겠지만, 나 살려 준 거. 그리고 내 언니로 살아 준 거.”
그녀는 마지막으로, 언니에게 못 다한 말을 중얼댔다. 작별의 인사를 갈음하는 고백이었다.
“너…….”
“그런데 나는, 난…… 더 이상 언니 뜻대로 살기 싫어.”
헤일라는 그대로 달려 빛기둥 속으로 네이오라를 던져 넣었다. 언니의 유품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영영 매장해 버렸다.
레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를 버렸다.
“미안해, 언니.”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그러나 헤일라는 멈추지 않고 손을 뻗어 빛기둥 속의 검을 잡았다. 검이 잘게 울렸다. 마치 앞으로의 파란을 예고하듯 거칠게 요동쳤다.
헤일라는 입술을 빼어 물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마지막으로 언니를 보고 싶었다. 언니가 비난을 던질지라도 죽음의 문턱 앞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 혈육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는 없었다. 레테는 영영 사라졌다. 헤일라는 그 사실을 깨닫자 가슴속이 텅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지금 내게 남은 건 결국…….
헤일라는 손에 쥐어진 검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들어 올렸다. 왼쪽 가슴 위를 조준하자, 다시금 검이 진동했다. 그녀는 그것을 내리찍듯 아래로 휘둘렀다. 여린 살갗과 쇠붙이가 만나는 순간,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언니.
헤일라는 언니에 대한 죄책감을 소거해 달라 신에게 간청했다. 대상에 대한 진실하고 가장 강렬한 감정을 말하는 자리에서, 죄책감을 읊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끔찍함을 곱씹는 순간, 검이 찬란한 빛을 뿜어 댔다.
귓가에 누군가 어떤 말을 속삭였다.
너의 생이 끝났다는 선고인가?
헤일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대로 심장에 검이 꿰어 죽지는 않을까. 상대에 대한 가장 큰 감정만 소거할 수 있다고 하니까, 지금 죽게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죄책감보다 크기를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레테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하지만 신의 속삭임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었다.
결국 헤일라는 살아남았고,
오래도록 그를 기다렸으며,
다시 리안 휴리트를 만나 구슬을 건넸다.
교만한 남자는 검이 뽑힌 자리에 사랑 이외의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그는 그녀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으므로.
헤일라의 승리였다.
* * *
“헉, 허억…….”
“네가 없는 오 년간, 네가 너무 원망스러웠어. 어째서 날 더 빨리 찾아내지 못했어?”
헤일라는 헐떡이는 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헤일라의 비어 있는 왼눈을 보기가 힘든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경쾌하게 웃으며 그의 턱을 쥐고 자신 쪽으로 돌렸다.
“나를 봐. 네가 이렇게 만든 헤일라야. 설마 내 왼눈이 흉해서 그래?”
그녀는 자신이 만든 상처를 리안의 탓으로 돌렸다. 거짓을 읊는 그녀의 눈동자는 아주 차분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리안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매달렸다.
바닥에 떨어진 투명한 눈물 자국을 보던 헤일라가 무릎을 꿇어 리안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검지로 그의 심장 위를 꾹 눌렀다.
“여기가 찢어질 것 같지?”
“흑, 아, 헤일라, 나는…….”
“정말 기뻐, 리안.”
리안은 억억대며 헤일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오물보다 더 질척한 감정을 감당하지 못한 남자가 숨을 허덕인다.
“살려 줘, 살려 줘 헤일라, 나, 나…… 흑, 아아, 죽을 것, 죽을 것 같…….”
헤일라는 그것이 아름다운 선율이라도 되는 양 느긋하게 감상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네게 돌아오려고 했어. 왜 아니겠니?”
그녀의 가는 손이 리안의 목을 감싸 안았다. 작은 품에 기댄 남자가 억억대며 울었다. 그는 헤일라가 하는 말의 반도 알아듣지 못하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너만큼 날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 그리고 나도…….”
헤일라는 그의 불행의 방증이 어깨에 적셔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행복이 짙어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사랑해.”
복수와 사랑이 한 데 어우러져 행복의 형상을 띠었다.
둘은 한참이나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