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내 구슬로.”
그녀는 리안을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리안은 잠시, 구슬이라는 단어를 멍청하게 따라하고 눈을 끔벅였다. 헤일라의 말을 단박에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이거 말이야.”
헤일라가 리안의 두 어깨를 짚고 자신에게서 천천히 떼어 냈다. 그리고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투명하고 맑은 구슬 하나가 그녀의 손 위에 올려졌다. 리안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헤일라는 그런 그에게 한 자 한 자 설명했다. 유아기의 아이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모양새와 비슷했다.
“신전의 검을 써서 얻어 낸 구슬이야. 이걸 깨면…… 네가 깨면, 너는 내 사랑을 갖게 되는 거야…….”
검은색 동공이 확장되었다. 이제야 그는 이해한 성 싶었다. 신의 검을 쓰고 빼낸 구슬은 특정한 감정의 덩어리였다. 그리고 구슬을 깨는 사람은 그 감정에 완전히 매몰되어 증폭된 감정에 고통스럽게 얽매이게 될 것이다.
헤일라는 지금 리안에게 그 고통을 통해 사랑을 증명해 보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구슬을 깨면 너 스스로도 알게 될 거야. 네가 하던 그게 사랑이 아니란 거. 그럼 그땐 날 놔줘.”
“그대로일 거야. 아니면 너를 더 사랑하게 되거나.”
리안은 축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억울해 보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기대에 차 있는 듯도 했다.
“그래.”
헤일라는 더 사랑할 것이라는 다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리안이 헤일라를 더 끔찍하게 옭아매게 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있는 사람처럼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감수할게.”
리안은 모든 걸 감수하겠다는 헤일라의 다짐에 눈을 크게 떴다. 후회해도 그건 그녀의 몫. 리안은 이 기회를 잡아야 했다. 그는 무언가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갈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증명하면…… 그렇게 하면 나…… 안아 줘.”
“그래.”
간단한 대답에 리안의 손이 꽉 쥐어졌다.
“입 맞춰 줘, 좋아한다고 말해 줘…….”
“그래.”
“손, 손도…….”
그는 눈치를 보면서도 계속 요구했다. 자신이 돌려받고 싶은 모든 걸 말했다. 자신에게만 온전히 집중하는 삶을 살아 달라 간절히 애원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름, 이름도 불러 줄 거야?”
이름을 요구했다. 그녀에게서 지워진 자신의 이름.
헤일라는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름을 부른다뿐일까?”
얇은 손이 리안의 검은 머리칼과 귓가를 쓰다듬었다.
“영영 옆에 있을게. 예전처럼 될 수 있도록 나도 최선을 다 할 거야. 어쩌면 사랑 비슷한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
“아, 아아…….”
리안은 어딘가 감격한 사람처럼 탄성을 내뱉다가 후들대는 다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급히 헤일라에게서 구슬을 빼앗아 들었다. 헤일라가 약속을 철회할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구슬을 들고 이리 저리 살펴보다가 어딘지 기분이 좋은 아이처럼 그것을 꼭 쥐었다 폈다. 아주 소중한 것을 돌보는 양 쓰다듬기도 했다.
헤일라는 약간 질린다는 표정이었지만 그것을 빠르게 지워 냈다. 그리고는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 둔 구슬과 리안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하기 싫으면 물러도 좋아.”
헤일라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사람처럼 말했다.
“넌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정에 완전히 먹힐 수도 있어. 그건 네 삶을 파괴하고, 너를 괴롭게 만들고, 아프게 할 거야.”
시험, 또는 도발이었다. 그러나 리안은 마지막 자비처럼 내민 기회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눈가를 휘었다.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리안이 헤일라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맞았다. 이렇게 강렬하고 애틋한 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리고 만약 아니라 해도. 리안은 헤일라에게 받은 사랑으로 다시 그녀를 갈구할 것이었다. 그는 확신했다.
사랑에 먹혀 불행해질 일은 결코 없으리라…….
“그럴 리가.”
단호히 말하는 목소리가 단단했다. 그는 결심을 할 필요도 없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접었다. 그의 손에 구슬이 완전히 파묻혔다.
“사랑해.”
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꽉 쥐었다. 팍, 하고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가 미미하게 퍼졌다. 헤일라는 고요히 그것을 지켜봤다.
곧이어 뼈마디가 굵은 손이 천천히 펴졌다. 그 안에는 깨진 유리 파편이 황홀한 빛을 뿜으며 빛나고 있었다. 그것들은 곧 연기처럼 흩어져 리안의 가슴께로 모여들었다.
잠시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묘한 긴장에 감싸였던 리안이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었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은 여전히 헤일라를 사랑했고, 다른 어떤 감정도 돌출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틀린 것이다.
내가 이겼다.
내가…….
“허억.”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리안이 물에서 이탈된 물고기처럼 몸을 퍼덕였다.
“윽, 헉…….”
그가 가슴을 틀어쥐었다. 어딘가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런 사람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식은땀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도 헤일라는 미동이 없었다.
“헤, 헤일라…….”
마치 모든 걸 예상한 사람처럼.
“리안.”
“흑, 아, 왜, 왜…….”
내가 왜 이러지? 리안은 질문을 맺지도 못한 채 눈물을 줄줄 흘렸다. 헤일라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리안의 오만함을 비웃었다.
“단 한 순간도 의심한 적 없니?”
“흐으, 아…….”
“내가 검을 찔러 넣었을 때 떠올린 게 네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
리안은 헤일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들을 새가 없었다. 심장이 여러 갈래로 쪼개지는 감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일 거라고 했잖아.”
헤일라가 무릎 꿇은 리안의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 다시 그를 떼어 냈다. 두 뺨을 들어 올려 자신의 황금색 눈과 검은 눈을 강제로 맞췄다.
“아.”
리안은 그제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덜덜 떨었다. 자신이 파낸 헤일라의 왼눈을 보는 순간, 미친 듯이 심장이 요동쳤다. 온 몸의 피가 다 빠져 나가는 생경한 감각이 몸을 지배했다.
그래. 확실히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이건, 이건…….
“사랑해, 리안.”
죄책감이었다.
* * *
“잘 생각해 봐.”
언니를 마지막으로 마주한 날, 그녀는 내게 충고했다.
“넌 날 사랑하는 게 아냐.”
아주 슬픈 얼굴로.
* * *
헤일라는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것도 선택한 적이 없었다.
‘반반하게 태어난 걸 감사히 여겨.’
어미는 종종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아름다움은 갈취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부모가 멋대로 물려준 외모는 헤일라가 원한 게 아니었다.
‘아프, 아파, 아파…….’
끔찍한 역병에 걸린 것도, 헤일라가 원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행은 언제나 제 발로 문을 열고 헤일라의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즈음, 소녀였던 헤일라는 그래도 안도했다.
이제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영민한 언니는 이 집을 뒤로하고 어떻게든 잘 살 수 있을 것이었다. 누군가의 짐이 되는 일도, 상품이 되는 일도 지친 헤일라는 자신이 죽음의 발치로 굴러떨어진 것에 안도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언니를 제물 삼아 기어이 살아났다. 이 또한 부모의 선택이었다.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끈질긴 숨통조차도 헤일라의 손 밖에 있었다. 그럼에도 헤일라는 모든 것을 감당했다. 책임을 졌다. 마치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인 양 견뎠다.
그래서였을까? 헤일라는 레테의 환영이 죽음을 종용했을 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언니 말대로 할게. 내가 잘못한 거니까. 다 내 잘못이니까…….”
그렇게 말했던가.
헤일라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실존하지 않는 언니에게도 거짓을 늘어놓지 않았다. 감히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손목을 향해 날카로운 조각을 들이 밀고 살을 갈랐다. 피가, 아주 많이 났다. 끔찍한 혈향이 공기를 타고 코를 찌르는 와중에도 고통은 물 밀 듯 밀려 왔다.
괴로웠다.
아팠다.
왜인지 눈물도 흘렀다. 그것이 지난한 삶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라 생각했다. 얼마나 어리석었던지.
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운명은 헤일라를 놓아주지 않았다.
헤일라는 살아남았다. 그녀는 살아남아 리안이 언니를 죽였다는 사실을 대면해야 했고, 언니를 죽인 리안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으며, 새로운 생명을 품어야 했다. 무엇 하나 끔찍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 레테가 속삭였다.
“신전으로 가서, 검으로, 여기를 찔러.”
검을 써서 사랑을 도려내라고 유혹했다. 찔러 넣으면 다시는 소거한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했는데.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요구했다. 칼로 난자한 손목의 통증이 가시기도 전이었다.
헤일라는 서러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사랑을 잃고 괴물이 될 자신이 그려졌다. 사랑을 잃으면 모든 게 무채색으로 보일 테다. 아름다운 꽃을 봐도, 고운 노래를 들어도 무엇도 느끼지 못한 채로. 누구에게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채로 외롭게, 쓸쓸하게…… 살아가야 하는데.
처음으로 언니의 명령을 거부하고 싶었다. 감히. 자신 따위가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데서 옅은 충격을 받았다.
헤일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니가 침대맡에 턱을 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그렇구나.”
레테는 대답을 듣지 않고도 헤일라의 의중을 눈치채고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