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사실 내가 언니의 망령을 봤을 때, 언니는 나한테 죽으라고 했어요.”
노데이나는 그제야 헤일라가 말하는 레테가 환상임을 깨달았다.
“정말 죽으려고도 했지. 난 말을 잘 듣는 동생이었거든. 그런데 그때 깨달았지 뭐예요.”
지직. 헤일라가 발로 흙을 짓이겼다. 동시에 행렬을 이어 가던 개미들이 그녀의 발에 밟혀 으깨졌다.
“난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달라진 공기가 노데이나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
노데이나는 홀린 듯 헤일라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그녀의 음성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래서 노데이나는, 자신의 뒤쪽에 젊은 정원사가 서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헤일라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무슨 일을 해서든 말이에요.”
탐스러운 붉은 뺨과 빛나는 머리칼이 햇살 아래에서 나부꼈다. 정원의 향기가 그녀의 완벽한 들러리가 되어 주는 순간이었다.
누구도 헤일라의 아름다움을 거절치 못하리라. 그 방증으로 노데이나는 입술을 살짝 벌리고 주인마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헤일라는, 노데이나 뒤의 정원사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지고, 도톰한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치켜 올라갔다.
* * *
공작 부인이 도망쳤다.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하녀가 공작 부인과 머리칼 색이 비슷했던 게 화근이었다. 부인은 하녀의 머리통을 후려쳐 정신을 잃게 한 뒤 침대에 뉘어 자신처럼 꾸몄다. 그리고 하녀의 옷을 입고 발코니로 뛰어들어 탈출했다.
조력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저택 안의 누군가가 그녀를 도왔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일이 발각되자마자, 저택 안은 온통 혼잡스러워졌다.
먼저 가장 끔찍해진 공간은 공작의 침실이었다. 리안은 헤일라로 위장되어 있는 은빛 머리칼의 하녀를 긴 칼로 찔러 죽였다. 그 피가 사방으로 튀어, 보고 있던 사용인들의 뺨에 튀었다.
그다음은 부인을 지키고 있던 보초들과 저택을 감싸고 있던 몇몇 병사들, 그리고 죄 없는 사용인 두어 명…….
피가 저택의 복도에 흩뿌려졌다. 매끄러운 나무 바닥 위에 벨벳 카펫이 펼쳐진 듯 붉은 기가 그득했다.
“……찾아와.”
리안은 그렇게만 말했다. 공작의 심복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공작 부인을 찾아 나섰다.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만큼, 최선을 다했다.
그 덕에 공작 부인은 네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잡혀 들어왔다.
“왜.”
금빛과 은빛이 섞인 머리칼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뺨에는 잘은 상처들이 나 있었다.
“왜 나갔어?”
리안은 헤일라를 고이 앉혀 두고 무릎을 꿇은 채였다. 그는 헤일라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왜 도망갔어?”
“…….”
“네가 원하는 대로 다리온도 살려 뒀어. 여기, 이 저택에 뒀다고. 그런데 뭐가 불만이었어?”
헤일라는 다리온도 두고 혼자의 몸으로 탈출했다. 리안은 헤일라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속이 바짝 탔다.
무엇보다.
“그 남자는 뭐야.”
헤일라를 도운 건 남자였다. 휴리트 가문의 정원을 돌보는 젊은 정원사.
“뭐냐고.”
말 한 번 나누어 본 적 없는 이라고 했다. 피투성이가 된 정원사는 히끅대며, 정원을 정리하다 마주쳤다고 변명했다. 도울 생각이 없었는데 우는 모습이 너무 사무쳐 보여 지나칠 수가 없었다고. 잠시 숨통을 틔고 다시 돌아올 생각이라는 말을 믿었노라고…….
죽어 가면서 말했다.
“그 남자, 어떻게 했어?”
“하.”
리안이 한탄하듯 웃었다.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죽였니?”
“살려 뒀을 리가.”
헤일라는 입을 닫았다. 샅샅이 살핀 얼굴 위에는 충격도 두려움도 없었다.
“아쉬워? 그게 마음에 들었나?”
리안은 꽤 반반하게 생겼던 다갈색 머리의 남자를 떠올리며 이를 사리물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헤일라의 두 볼을 쥐었다. 왼쪽 엄지가 헤일라의 오른쪽 눈꺼풀 위를 쓰다듬었다.
“이쪽 눈은 나 보라고 남겨 둔 거야.”
“…….”
“널 잡으면 제일 먼저 남은 눈부터 파 버릴 생각이었어. 그래도 나를 봐야 하니까, 네가 나를 보고 싶어 할지도 모르니까 남겨 뒀는데…….”
그는 괴로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괴로움은 헤일라가 자신을 외면한다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연인의 왼눈을 도려낸 남자에게서는 어떤 죄책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른 쪽 눈도 필요하다면 파낼 기세였다.
헤일라가 점점 힘이 들어가는 그의 왼손을 쳐 냈다.
“무슨 소리야.”
차가운 목소리였다. 헤일라는 리안을 거만하게 올려다봤다.
“나 너 진짜 보고 싶었어. 오 년 내내.”
검은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믿지 않는 듯싶었으나, 동시에 약간의 희망도 엿보였다.
“매일 매 순간…….”
헤일라가 손을 뻗어 리안의 뺨에 얹었다. 그리고 코가 맞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였다.
“얼마나 죽이고 싶었는데.”
순식간이었다. 헤일라의 오른쪽 엄지가 리안의 안구를 찔렀다. 파고든 손톱이 왼쪽 동공을 스쳤다. 번쩍이는 고통이 왼눈에 찾아 들었다. 리안이 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그 모습을 본 헤일라가 피식 웃었다. 리안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 생채기만 나도 자신의 상처처럼 아파하던 여자가.
“사랑을 모르고 슬픔에 무뎌졌다고 해서 너에 대한 증오까지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헤일라.”
“왜 그렇게 봐?”
“…….”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헤일라는 리안과 눈을 맞추며 히죽, 웃었다. 한쪽 눈을 손으로 가리고 있던 리안이 천천히 팔을 움직여 내렸다. 왼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리안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물었다.
“나, 피 나, 헤일라.”
그는 이전에 헤일라가 제 손에 감싸 주던 손수건을 떠올렸다. 그건 아직도 보물처럼 협탁 아래 잠들어 있었다. 헤일라라면, 상처를 보고 마음이 약해져 다시 상처를 보듬어 줄지도 몰랐다.
그러나 리안의 눈을 본 헤일라는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고개를 획 돌렸다. 마치 흉한 걸 본 행인처럼 무감한 눈빛이었다.
순간, 숨이 멈췄다.
“아, 안 돼……. 이러면 안 돼.”
헤일라는 침묵했다. 더듬더듬 말을 잇는 그를 방치했다.
“네가 이러면 안 돼. 너는, 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안은 갑자기 돌변해서 의자에 앉아 있던 헤일라의 어깨를 콱 쥐었다. 의자의 앞다리가 살짝 들렸을 정도로 그녀를 밀어붙였다.
“이럴 거면 왜 날 사랑해 줬어? 결국 변할 거면, 왜 그랬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잘못 따위를 전혀 되짚지 않는 오만한 남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헤일라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왜 사랑해 줬을까.”
“…….”
“후회가 돼.”
멀거니 헤일라를 내려다본 남자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헤일라는 지금 완전히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정말로 타인이 되어 버린다. 지금이 그 전환점이 될 것이다.
“안, 안 돼.”
몸을 섞어도, 강제로 자신만 보게 만들어도, 그 안에 어떤 감정도 없이……. 죽은 인형을 끌어안고 살게 될 것이다. 헤일라는 이 시간 이후로 자신을 완전히 포기할 테니까.
리안에게는 다시없을 위기감이었다. 리안은 헤일라가 사랑을 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큰 상실감을 맛봤다. 다시는 애증 섞인 눈동자를 볼 수 없다는 게 사무치도록 아렸다.
그러나 사랑을 몰라도 헤일라는 자신을 특별히 여길 것이라 믿었다. 양방의 감정이 오갈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영영 그녀의 분노와 슬픔을 감당하며 행복에 젖고 싶었다. 그렇게 자위했다. 그러면 리안은 헤일라의 몸과 마음을 모두 가지는 게 되니까.
하지만 이래서는, 이래서는 안 되었다. 송두리째 삶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쿵, 소리가 날 만큼 큰 소리가 났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헤일라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왼 눈을 뜨지도 못하고 덜덜 떠는 채였다.
“나 버리지 마.”
리안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어떻게 해야 예전처럼 날 봐 줄 거야?”
“…….”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원할 수는 있잖아. 밀어내지 않을 수는 있잖아. 영영 내 곁에 남아 줄 수는 있잖아…….”
“아.”
드디어 헤일라의 입이 열렸다. 리안은 숨을 헐떡이며 젖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너처럼?”
“…….”
“너도 그러잖아. 나를 사랑하지는 않으면서 몸은 원하고, 영영 나한테 들러붙으려고 하잖아.”
“무슨, 무슨 소리야. 나는 너를,”
“사랑이 아니야.”
단호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쥔 리안의 손을 가볍게 쳐 냈다.
“네가 하는 건 사랑 같은 게 아니라고.”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날카롭게 리안을 할퀴었다.
“내가 변했다고 했지? 맞아.”
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헤일라는 정말로, 점점 무감한 표정이 되어 갔다.
“하지만 날 먼저 기만한 건 너야. 네가 한 건 그냥 더러운 집착 같은 거였어.”
“아니야! 정말, 정말로 사랑해. 너만, 나는 너만…… 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야…….”
“…….”
“그래서 그런 거면, 못 믿어서 이러는 거면, 응? 내가 더 잘할 테니까. 어떤 식으로든 증명할 테니까 제발…….”
예전처럼 날 봐 줘.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다면, 증오가 담긴 눈으로라도.
리안은 속으로 마지막 말을 삼키며 헤일라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다리를 감싼 치마가 조금씩 축축해졌다.
“증명?”
그때, 그의 머리 위에서 헤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의 흥미가 담겨 있는 목소리. 리안은 이것이 기회임을 눈치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발을 핥을 수도 있었고 개처럼 길 수도 있었다. 다시 그녀의 관심만 독차지할 수 있다면, 온전한 감정의 배출구가 될 수만 있다면…….
“그럼 증명해 봐.”
미소 짓는 헤일라의 얼굴에 약간의 흥분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