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88화 (88/97)

88화.

헤일라는 침대에 축 처져 있었다. 아랫배와 가슴께까지 튄 정액이 등허리 쪽으로 주룩, 흘렀다. 리안은 장관이라도 본 사람처럼 입을 약간 벌리고 그걸 지켜봤다.

“닦아.”

차가운 명령이었다. 헤일라는 방금까지의 뜨거운 정사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 같았다.

“핥을까?”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팩 돌렸다. 그는 곧 축축한 천으로 헤일라의 몸 구석구석을 닦아 주었다. 그 꼴이 꼭 말을 잘 듣는 노예 같았다. 리안은 그녀의 명을 충실히 이행한 뒤 몸을 굴려 헤일라의 옆에 털썩 누웠다.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눈치를 보다가 먼저 말을 건넨 건 리안이었다.

“헤일라.”

“…….”

“좋았어?”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리안은 약간 초조한 사람처럼 질문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다가 음습한 말투로 뇌까렸다.

“왜, 그 새끼가 더 좋았어?”

“…….”

“……사랑한 건 아니었지? 이제는 그런 거 못 느끼니까…….”

리안은 그것이 약간 다행이라 느끼는 사람처럼 웅얼댔다. 그러나 금세 침울해하고, 또 바로 화를 냈다. 마치 인격이 여러 개 있는 사람 같았다.

“그 새끼가 죽은 게 아쉬워. 내가 죽였어야 했는데. 감히, 감히 너를…….”

그의 얼굴에 무르익은 광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헤일라는 그걸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랑한 건 아니었어.”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안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약간의 기대감이 깃든 눈이었다.

“그런데 너랑 있는 것보다는 좋았어.”

헤일라는 피식 웃으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마치 리안과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 모습이 남자의 마음을 흐트러트렸다. 리안이 헤일라의 어깨를 잡아 거칠게 바로 눕혔다. 그대로 헤일라의 위에 올라탄 리안은 한쪽 다리를 손으로 들어 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 음부를 잡아 벌렸다.

“좋았는데 좆은 엄청 작았나 봐. 네 구멍, 전보다 더 좁아졌거든.”

“흣, 하지, 마!”

거칠게 휘젓는 손길에 눅진한 정액이 흘러넘쳤다.

“걱정하지 마. 내가 열심히 할 테니까…….”

리안의 목구멍에서 거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를 사랑하지는 않아도…… 원하게끔은 만들어 줄게.”

그는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의 끝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비참함이 리안의 발끝부터 올라와 그를 갉아먹었다.

* * *

붉은 장미와 루아두가 만발한 정원은 아름다웠다. 장미향과 풀 내음의 조화가 여름의 향을 뿜어 대고 있었다.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구부러진 둘레 길이 특히나 눈에 띄었다.

그리고 헤일라가 그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허리와 팔목은 금실로 엮어 짠 띠가 아름답게 매여 있었고, 치마는 찰랑이며 발목까지 떨어졌다. 옷을 바꿔 입었을 뿐인데, 헤일라는 영락없는 귀족 마님이 되었다.

“헤일라 님! 루아두를 아주 좋아하신다면서요?”

마린느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헤일라는 루아두라는 단어에서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하게 올렸는데, 뒤에서 따르던 마린느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보지 않아도 헤일라의 표정을 가늠할 수 있는지라, 노데이나는 마린느에게 눈총을 보냈다. 그녀는 저 철없는 하녀가 화를 자초하지 않기를 바랐다.

“장미는 또 얼마나 탐스러운지…….”

노데이나의 눈초리와 헤일라의 침묵에도 마린느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토록 정원에 공을 들인 걸 보면 주인님께서는 마님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게 아니겠어요?”

따위의 말이나 하며 노데이나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게 만들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마린느의 목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 헤일라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잠깐 멈춰 서서 유독 탐스럽게 핀 장미 한 송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큼, 그 앞으로 다가간 헤일라가 손가락 사이에 꽃을 끼우고 후두둑, 하고 꽃과 줄기를 분리시킨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 마, 마님! 피가……!”

마린느가 사색이 되어 헤일라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러나 헤일라는 멍한 얼굴로 중얼댔다.

“그러네.”

헤일라는 무감하게 말한 뒤에 무어라 더 중얼댔다. 그 소리는 마린느가 호들갑 떠는 소리에 완벽하게 묻혔다. 마린느는 급히 저택으로 뛰어 들어갔다. 노데이나가 말한 약을 찾기 위해서였다.

“…….”

노데이나는 마린느의 뒷모습을 보며 찝찝함을 곱씹었다.

‘그러네. 정말 예쁘네.’

방금 헤일라가 한 말 때문이었다. 정말 예쁘다니. 피를 뚝뚝 흘리면서 하는 말이 굉장히 소름 끼쳤다. 그녀는 불손한 생각을 하면서도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물었다.

“이만 들어가시는 게 어떠세요? 치료도 해야 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노데이나는 이런 순간에 숨이 턱턱 막히는 듯했다. 오 년 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헤일라는 노데이나로 하여금 약간의 공포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 노데이나의 머릿속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시나리오 하나가 떠올랐다.

“서, 설마 지금 도망치시려는 건 아니시죠?”

헤일라는 여전히 제 손 위의 장미 잎들만 보고 있었다. 장미꽃을 쥐고 있던 손에 서서히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피 묻은 장미 꽃잎이 흙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노데이나가 기함하며 빠르게 속삭였다.

“주인님께서는 무서운 분이세요. 한 번 놓친 마님을 다시 놓치실 분이…….”

“애들은.”

“예?”

“애들은 잘 지내고 있어요?”

헤일라가 갑자기 다른 말을 하자 노데이나는 대화의 간극을 따라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세리아랑 다리온…… 그리고 카델이요.”

“아. 두 분은…….”

노데이나는 헤일라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에 굉장히 놀랐다. 그래서 하대해 달라 청하는 것도 잊고 어물댔다.

“세리아 님과 다리온 님은 잘 지내세요. 카델이라는 아이는 여전히 방에서 잘 나오질 못하고요.”

헤일라는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매일 악몽을 꾸면서 엄마를 찾는다고…….”

“살아 있다고는 말해 줬어요?”

무감한 말투였다. 눈앞에서 어미가 칼에 맞은 걸 본 아이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없는 사람 같았다. 노데이나는 약간 기가 질려 네, 하고 답하기만 했다.

“그 애는 과자랑 책을 좋아하니까 챙겨 줘요. 난 못 가니까.”

“네.”

노데이나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또 이렇게 챙기는 걸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 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주인마님을 종잡을 수 없다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문득, 헤일라가 세리아의 안부를 물었다는 사실에 약간 집중하게 되었다.

“저, 마님. 혹시 세리아 아가씨와 함께 저녁 산책이라도 하지 않으시겠어요? 주인님께서도 좋아하실 테고……. 아니, 주인님께서 좋아하실 테니 하시라는 게 아니고, 저는 그저, 아가씨와 마님께서 좋은 시간을 보내시면…….”

그녀는 말주변이 없는 자신을 탓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조금 더 조리 있게 모녀지간의 정을 나누라고 설득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나 노데이나의 후회는 헤일라의 따분함이 묻은 얼굴에 완전히 허물어졌다. 노데이나는 곧, 헤일라가 세리아에게 어떤 관심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리아 아가씨는 외로움을 많이 타시는 분이세요.”

하녀가 용기를 짜내 내뱉은 말에도 헤일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가 가엾지도 않으세요? 그분은, 항상 외롭게 지내셨어요. 따뜻하게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시면 굉장히 기뻐하실…….”

풉. 순간 헤일라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노데이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었다. 사용인으로서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노데이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주인마님께 설교를 하다니. 노데이나는 이 일이 리안에게 알려지면 자신의 혀가 뽑히리라 짐작했다.

손에 땀이 찼다.

“아니, 화 난 거 아니에요.”

“…….”

“꼭 내 언니 같아서.”

언니? 노데이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헤일라의 언니에 관해 떠올리려 노력했다. 대신관이 될 뻔했던 신관이었다고 했는데. 갑자기 그 여자는 왜.

노데이나는 가시지 않는 불안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나 앞의 사람에겐 관심이 없는지 헤일라는 여상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말이에요. 언니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참 많이 했는데.”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그건 대신관이 죽은 이후였다. 헤일라가 레테의 환영을 봤다는 사실을 모르는 노데이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지금의 마님이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네.”

그렇게 말하는 헤일라는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고개를 들고 멍하니 헤일라를 바라보고 있던 노데이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마님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반항도 복종도 하지 않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지…….

모호했다. 알 수가 없었다. 노데이나는 재회한 이후의 헤일라를 종잡을 수가 없어 불안했다. 사실 노데이나 이외의 모두가 종잡을 수 없는 헤일라를 두려워했다. 그녀는 저택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중추였다.

하녀는 자신이 무례를 저질렀음을 알고 있었으나 더 이상 말을 올리지는 않았다. 어쩐지 헤일라는 관대하게 대답해 줄 것 같았다.

복잡한 표정을 한 노데이나를 마주 본 헤일라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걸 물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원하는 거라……. 헤일라는 그렇게 속삭이며 발아래 기어 다니는 개미 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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