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87화 (87/97)

87화.

그녀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던 유일한 것이었다. 헤일라는 여전히 헤일라일 것이라고. 사랑을 버렸어도 여전히 그를 애틋한 눈으로 봐 줄 것이라고, 아파할지언정 차게 내려다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는 천치처럼 믿고 있었던 것이다. 리안은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그리고 눈을 뜨고 있는 헤일라의 입술에 입 맞췄다. 아랫입술을 천천히 빨고 잡아 당겼다. 체취가 훅 끼쳐 들어 아찔했으나 신중한 손짓으로 어깨를 잡고, 혀를 섞었다.

반항은 없었다. 그녀는 순순히 제 입술을 내주었다. 리안은 거기서 묘한 절망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입을 떼고 헤일라를 일으켜 주었다.

“네 자식은 세리아 하나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히 채워 주는 남자의 손에는 과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애는 착하게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고, 넌 이제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이견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목소리였다. 이전에 헤일라를 겁먹게 했던 모습과 흡사했다. 헤일라는 리안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빠르게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럼 다리온은?”

“…….”

“난 그 앨 양육할 의무가 있는데. 엄마니까.”

헤일라는 하늘이 파랗고 태양은 붉다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리안의 말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죽일 게 아니면 내 옆에 데려다 놔.”

“…….”

“그럼 내가 널 조금 덜 끔찍해할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말을 마치고 조금 웃었다. 리안과 오 년 만에 마주하고 처음 보여 주는 미소였다.

마차 안에는 다시 바퀴가 덜컹이는 소리만 희미하게 울렸다.

* * *

헤일라가 휴리트 저택에 돌아온 지 세 달이 지났다. 그동안 저택의 분위기도 미묘하게 바뀌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헤일라가 있을 때부터 일을 해 온 이들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헤일라가 부재한 동안 들어온 하인들이었다.

기존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은 포악한 주인의 만행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헤일라의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애썼다. 그들은 그냥 조용히, 책잡히지 않을 선에서 헤일라와 리안의 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헤일라가 없을 때 저택에 발을 들인 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공작이 공작 부인을 각별히 아낀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속으로는 도망친 공작 부인을 탐탁잖게 여겼지만, 동시에 어떻게든 그녀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특히 하녀 중 몇 명은 헤일라의 전담이 되겠다고 발 벗고 나서기까지 했다. 그들은 주인마님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성격인지 알아내기 위해 연차가 쌓인 사용인들에게 선물을 들고 찾아가기도 했다.

지금처럼.

“아이, 노데이나 님. 그러지 말고 알려 주시면 안 돼요?”

“안 돼. 쓸데없는 짓 말고 청소나 해.”

“너무해…….”

앳된 하녀가 노데이나의 옆에 붙어 칭얼댔다. 노데이나는 한숨을 푹 쉬고 뒤를 돌아 단호하게 말했다.

“괜한 짓 하지 마.”

“마님을 잘 모시려고 하는 게 어떻게 괜한 짓이에요!”

“마린느.”

노데이나가 꽤나 엄격하게 이름을 불렀다. 저택에 들어온 지 반 년이 채 되지 않은 마린느가 살짝 풀이 죽은 채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노련한 하녀가 된 노데이나는 하녀들 사이에서 꽤 영향력 있는 존재였다.

“얼른 가서 네 일을 해. 오늘 세탁 당번은 너잖니.”

마린느는 정말 대답해 줄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입을 비죽대기는 했지만 더 이상 조르지는 않았다.

“그럼 저, 오늘 세리아 아가씨 시중 같이 들어도 돼요?”

더 큰 건을 조르려고 그랬나 보다. 노데이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마린느를 바라봤다. 마린느는 웅얼대면서도 세리아의 시중을 들고 싶다는 선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건 내 권한이 아냐.”

“세리아 아가씨를 모시는 건 전적으로 노데이나 님 소관인 거 다 안단 말예요. 네?”

노데이나는 마린느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저 영악하고 어린 하녀를 세리아 곁에 둘 마음이 없었다.

“안 돼.”

“아, 정말 너무하세요!”

도련님 뵙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며 마린느는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도련님. 노데이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복도를 걸었다. 마린느도 결국은 세리아 따위는 안중에 없고, 새로운 도련님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리온.

헤일라가 돌아온 날 함께 저택에 입성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휴리트’의 성을 받은 아이였다.

‘다리온 휴리트.’

아이의 이름을 묻는 집사에게 성의 없이 알려 준 리안은 멀뚱히 서 있는 헤일라의 반응을 열심히 살폈다. 노데이나는 리안의 파격적인 발언이 누구를 의식한 것인지 깨달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떡 벌리고 서 있던 사용인들과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혼외자가 분명한 이 아이가 모두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이제 사용인들은 세리아보다 다리온을 더욱 신경 썼다. 돌아온 공작 부인이 세리아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처음 세리아를 마주한 공작 부인은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이를 훑어보기만 했다.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라고 말한 뒤 계속 두 손을 꼭 모으고 있던 세리아가 울음을 터트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리아는 그 뒤로 조금 더 소극적인 아이로 변했다. 그럼에도 공작은 아이에게 눈길 한 번 더 주는 법이 없었다. 그는 완전히 헤일라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노데이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도련님보다 어릴 때부터 업어 키운 세리아가 더 눈에 밟혔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노데이나는 세리아의 방 앞에 다다랐다. 아마 이 문을 열면, 세리아 님과, ‘도련님’이 있을 터였다. 오늘은 둘이 만나 노는 날이었으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리아가 고개를 돌리고 하녀를 향해 방긋 웃었다. 노데이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세리아에게 인사를 하고, 세리아의 앞에 앉아 장난감을 갖고 노는 남자아이 하나를 바라봤다. 세리아보다 한참 작은 아기는 조용히 나무 장난감을 옮기며 놀았다.

“왜 이제 왔어.”

“죄송해요. 재밌게 놀고 있으셨어요?”

“몰라.”

세리아는 퉁명스레 말하고 노데이나에게 손을 뻗었다. 앉아 있는 아기는 둘에게 관심 없는지 바닥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리온은 재미없어.”

노데이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달리 할 말을 찾지는 못했다. 다리온은 정말로 조용한 편이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잘 주지 않았다.

아기는 소공자가 되면서 따뜻하고 안락한 잠자리, 비단옷, 부드러운 음식, 노련한 보모를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리안은 아주 가끔, 아기가 어미를 만나는 것도 허했다. 그러나 다리온이 정말로 조르는 것은 따로 있었다.

때마침, 다리온이 나무 조각을 집어 던지고 울음을 터트렸다. 축축한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불렸다.

“카데- 카델-”

바로 다리온과 함께 저택에 들어온 카델이라는 계집애였다. 하녀 방에서 매일 처박혀 울다가 가끔 얼굴을 비추는 아이였다. 노데이나는 언제나 수척한 몰골을 하고 비척대던 카델을 떠올리다가, 또다시 터져 나오는 한숨을 애써 막았다.

오늘도 저 도련님을 달래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 * *

“흣, 아아!”

새된 신음이 침상의 캐노피 안쪽에서 부유했다. 가는 여체 위에서 허덕이는 남자는 신음에 더욱 몸이 달았는지 제 입술을 헤일라의 입술 위에 얹었다. 고통과 쾌감을 넘나들다 못해 실신할 지경이었던 헤일라는 입이 막히자 더욱 바동댔다.

“흐, 읏, 흣……!”

뭉툭한 손톱이 너른 등을 마구 긁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덩어리진 근육들 위에 얇은 생채기가 새겼다. 헤일라가 남기는 상처에 반응한 리안이 허리를 더욱 격하게 놀렸다. 퍽퍽 대는 소리와 함께 찔걱이는 마찰음이 더욱 선명히 울려 퍼졌다.

“헤일라, 헤일라…….”

그는 헉헉대면서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허겁지겁 가슴을 빨고, 안으로 쏙 들어가 있는 젖꼭지를 조물댔다.

“예뻐, 예뻐, 헤일라…….”

“흣, 아앙!”

함몰되어 있던 젖꼭지가 삐져나오자, 리안은 그것을 그대로 잡고 비틀었다. 동시에 자궁이 밀려 올라갈 만큼 강하게 성기를 박았다. 눅진하고 습한 안쪽이 그를 반기듯 옴찔댔다.

“좋아, 너무 좋아…….”

정신이 나간 짐승 같았다. 아니, 누군가 그의 꼴을 본다면 짐승이라는 칭호도 과분하다 말했을 것이다. 그만큼 난잡하고 추잡하게 들러붙었다. 남자의 몸에 새겨진 흉측한 자해의 흔적들이 근육과 함께 꿈틀댔다.

“하응!”

“읏, 좋아? 여기…… 좋은 거지?”

그는 선물을 받아 신이 난 아이처럼 밝아졌다. 그리고는 그녀가 반응한 지점을 다시 쳐올렸다.

“예전, 흣, 부터 여기, 엄청 좋아했어…….”

예전부터. 그 말을 내뱉는 리안의 표정이 묘하게 흐트러졌다.

그녀가 변하지 않은 부분은 몸을 섞을 때만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리안은 이런 순간이 아주 소중했다. 그리고 아주 많이 비참하기도 하였다.

순간, 리안이 차오르는 어떤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헤일라의 목에 손을 뻗었다. 요즘 들어 두드러지는 침대 위에서의 가학적 성향 중 하나였다.

“컥, 커헉!”

그는 두 손을 목 위에 얹어 그러쥐곤, 숨통을 조였다. 목이 졸리자, 헤일라의 안쪽이 바짝 조여들었다. 리안은 완급을 조절하며 헤일라가 정신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호흡을 허용했다.

“아, 아아!”

리안은 점점 벌게지는 헤일라의 얼굴을 관음하며 속도를 높였다. 아래에 깔려 신음하는 여자가 한없이 사랑스러운지,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틈틈이 목덜미와 가슴에 입을 맞춰 댔다.

결국 그는 헤일라가 절정에 이르고 한참 뒤에나 사정했다. 목을 놓아준 건 그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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