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86화 (86/97)

86화.

덜컹대는 마차의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둥근 바퀴가 만들어 내는 파열음만이 마차 내부에 간간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마주 앉은 남녀의 침묵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리안은 헤일라를 멀건 눈으로 보다가 건조한 손으로 눈두덩을 주물렀다. 다시 눈을 뜨고 앞을 보는데, 또 헤일라가 있었다.

꿈이,

꿈이 아니구나.

수면이 만들어 낸 환상도, 불면이 만들어 낸 허상도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건 헤일라가 맞았다. 그는 그제서야 완벽하게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움에 파묻혀 잔상의 조각들만 엉성하게 맞춰 왔는데, 지금은 이렇게 선명한 상이 눈앞에 있었다. 리안은 헤일라를 찬찬히 살폈다.

창밖만 응시하는 눈은 여전히 동그랬다. 그 안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빛났다. 투명하다 느껴질 정도로 흰 피부도, 가는 목과 동그란 어깨도, 약간 굳은살이 박인 손도 변치 않았다.

……가려진 왼눈의 흉과 달라진 머리칼 색만 제외하면 정말로, 똑같았다.

리안은 저도 모르게 일어나, 헤일라의 옆에 앉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왼 볼을 조심스레 만졌다.

보드라웠다.

“아…….”

그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에 몸서리쳤다.

“헤, 헤일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끝이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손을 쳐 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여자에게 용기를 얻어, 볼을 쓰다듬던 손으로 머리칼을 만졌다. 목덜미를, 어깨를, 팔을, 팔목을, 그리고 손을…….

“헤일라, 헤일라.”

대답이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그녀는 가만히 앉아 창에 하나둘 얹어지는 빗줄기만 감상하고 있었다. 마치 리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헤일라가 그럴 리가 없다. 리안은 자신의 허튼 생각을 비웃으며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헤일라.”

“…….”

“헤일라, 화났어?”

혹시 내가 마을의 인간들을 몇 죽였다고 이리도 심통을 부리는 것일까? 하지만 그건 헤일라의 잘못이었다. 리안으로서는 아주 많이 참은 것이었다.

검은 눈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는 헤일라에 관해, 아니 파멜라에 관해 입수한 정보 하나를 떠올렸다.

‘남편은 일 년 전 지병으로 사망, 슬하에 아들 하나.’

믿지 않았다. 헤일라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고 다른 이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았을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헤일라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미 소거하지 않았나.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질 일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리안은 파멜라라는 여인과 헤일라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지난한 추적과 기다림에 신물이 나면서도 파멜라는 헤일라가 아니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리안은 그녀가 다른 사내를 모르길 바랐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헤일라가 맞았다. 그래서 리안은 생각의 궤를 달리했다. 친아들이 아니구나. 진짜 남편이 아니겠구나. 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에도 화가 났다. 다른 사내와의 혼인을 꾸며 내고, 다른 사내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키우다니. 그건 자신과 세리아에 대한 배신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그녀를 만나자마자 살인을 눈앞에서 보여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리안은 오랜만에 만난 헤일라를 궁지로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 다정하게 어르고 달래 주고 싶었다. 그러다가 투정을 부리고, 품 안에 잠기고 싶었다.

이전처럼.

“헤일라.”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안은 턱에 힘을 주었다가 간신히 풀고 다시 그녀를 불렀다.

“헤일…….”

“다리온은 어딨어?”

다리온. 리안은 속으로 그 이름을 두어 번 되뇐 뒤에야, 헤일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리안의 손등이 살짝 꿈틀했다.

“다리온 어디 있냐고.”

리안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건 왜?”

평소에는 붙어 있는지도 몰랐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애써 억눌러 왔던 의심이 대가리를 들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 아이가 헤일라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이었다.

긴장감에 목이 죄였다.

“아니지?”

“…….”

“네 아이 아니잖아.”

헤일라는 쉬이 답을 내놓지 않았다. 초조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네가 그럴 리 없는데 내가 실수했어. 그냥 불쌍한 걸 주워서 키우는 건데, 내가 괜히 심통이 나서 그랬던 거야. 너무 화내지 말고…….”

리안은 벌게진 눈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뒷말을 삼켰다. 속에서 울컥대며 차오르는 것을 집어삼키느라 부단히 애쓰고 있었다. 헤일라는 그걸 지켜보다가 끔뻑, 하고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혹시 내가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말하지 못하는 건가? 데려갈 것이냐 물으며 마을의 인간들을 찔러 죽였으니 그럴지도 몰랐다. 리안은 이전과 달리 가늠할 수 없는 헤일라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미안해. 네 애라고 생각해서 데려가지 말라고 한 게 아냐. 네가 그럴 리 없는 거 아는데, 그런데 우리 너무 오랜만이라, 응, 내가 조금 화가 나서…….”

그는 마을에서의 살인에 관해 횡설수설 변명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리안은 갈급한 마음에 다시 한번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헤일라가 조금 더 빨랐다.

“맞는데.”

얼핏 무감하기까지 한 말투였다.

“다리온은 내 아이야. 내가 낳았어.”

헤일라는 약간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럼에도 리안이 멍한 얼굴이자, 조금 답답한 듯 조곤조곤 반복했다.

“다리온은 내가 낳았어. 걘 내 아들이야.”

리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헤일라.”

“내 아기라고.”

그녀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입증하듯 흔들림이 없었다.

진짜, 헤일라가 다른 사내와 정을 나누었나? 그걸 지금 내 앞에서 저렇게, 너무나 당연하게…….

리안의 숨이 가빠졌다.

“아니라고 해.”

“내 아기야.”

“아니라고 하라고.”

“억지 부리지 마.”

헤일라는 팔짱을 끼고 조금 지루한 얼굴을 했다. 그의 분노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리안은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그는 채근하듯 묻기 시작했다.

“아니잖아, 아니잖아, 응?”

“어떻게 해도 사실은 안 바뀌어.”

“내가 그 애를 죽여도 좋아?”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대화였다. 리안은 정말로 헤일라의 말 한마디에 그녀의 아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녀가 하고 있는 말이 사실이라면, 다리온은 헤일라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어 만든 불순물이었다. 그녀와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는 증거였다.

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리안은 결심했다.

“정말 죽여도 좋은 거야? 응?”

헤일라가 자신에게 애원하면, 그때 다리온을 죽이자. 작은 몸을 조각조각 내어 헤일라의 앞에 전시하고 그녀를 괴롭혀야겠다. 울부짖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울음소리의 음률을 즐기며 새로운 씨를 뿌려 그녀를 잡아 두자.

이전처럼 폭력과 갈취로 헤일라를 길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음.”

헤일라가 목을 울렸다. 그것이 사고의 흐름을 흐트러트렸다. 그녀는 나긋하게 몸을 뒤로 기댄 뒤 동요 한 점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지는 않지.”

그것뿐이었다. 아들이 죽는다는 가정에 대한 감상은 지극히 짧고 간결했다. 헤일라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였다.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거야? 오 년 만에 만나서 할 말이 이것뿐이니?”

그녀는 리안의 한심함에 개탄하는 것 같았다. 아니, 조금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넌 내가 그날 뭘 했고 뭘 버렸는지 알잖아.”

리안은 깨어난 뒤 노데이나에게 모든 사실을 들었다. 헤일라가 검을 쓰고 신전을 나갔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검을 쓰기 위해 신전에 왔다는 사실을 파이라와 노데이나가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쓴 내가 다른 사람 목숨 따위에 연연할 것 같으니?”

“…….”

“난 이제 사랑 같은 건 못 느껴.”

손가락 끝부터 온도가 조금씩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된다고 해도 아무런 느낌이 안 들어.”

이상하지? 헤일라는 그렇게 덧붙이며 창가에 턱을 괴었다. 나른해 보였다.

리안은 헤일라가 말하는 증상의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의 검을 써서 감정을 소거하면, 그 뒤에는 영영 소거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저주에 걸렸다. 그리고 하나의 감정이 소거되면 덩달아 마모되는 감정들도 생기는 법이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작용하니까.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어떤 것들은 나가떨어지면서 다른 존재를 이탈시키기도 했다. 그 결과물이 지금의 헤일라인 것이다. 헤일라는 사랑과 함께 많은 것을 잃었다.

헤일라는 창백한 리안의 안색 따위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것이 리안을 미치게 만들었다.

“이제는 너를 봐도…… 흣.”

순식간의 일이었다. 리안이 헤일라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덜컹이는 마차 의자에 그녀를 밀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름, 이름 불러 줘, 헤일라.”

“…….”

“헤일라.”

헤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나른한 눈으로 리안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 순간 리안은 깨달았다.

정말로.

정말로 헤일라는……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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